박태원이 그린 자본주의적 근대의 풍경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에는 중심 서사가 없다. 수많은 주인공들이 하나의 사건으로 얽혀있지도 않다. 그들이 공유하는 건 도시 공간에 산다는 사실뿐이다. 박태원은 이처럼 느슨한 연결을 통해 근대적 도시공간에서의 삶을 자신만의 독특한 미학으로 재현해낸다. 도시에 흩어져 살아가는 여러 주인공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개별적으로 존재하던 그들의 삶이 갈무리되어 공통의 울림으로 나아가는 따뜻한 역설을 마주할 수 있다.
재봉, 창수, 만돌어미, 이쁜이와 이쁜이 엄마, 민주사, 금순, 기미꼬, 하나꼬, 점룡 등등. 《천변풍경》의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문제로 끙끙거리며 살아가는 도시민들이다. 개중에는 부자도 있지만(민주사), 대개는 가난한 하층민이다.
여러 인물의 서사 중 유독 기미꼬, 하나꼬, 금순의 서사에 눈길이 갔다. 소설 속 다른 주인공들은 전통적 권력관계의 '내부'에서 나름대로의 행위자성을 발휘하여 살아간다. 하지만 기미꼬와 동료들은 기존 권력관계에 균열을 만든 후 그 균열을 점차 확대한다. 이들이 특별한 이유다.
한국 근대 문학에 드디어 등장한 주체적 여성 캐릭터,
그리고 그들의 한계
기미꼬와 하나꼬는 카페에서 일하는 여급이고, 금순은 모진 시집살이를 하다가 서울로 도망왔으나 어찌할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시골 여성이다. 기미꼬는 금순의 처지를 들은 후, 여자 셋이 함께 살며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자고 제안한다. 셋 중 누구도 안정적인 삶을 누리지 못했지만, 그들은 함께 살고 지지해줌으로써 자기 삶의 단단한 토대를 스스로 정초해내고자 한다.
기미꼬는 하나꼬가 시집갈 때 친정 엄마와 같은 마음으로 여러 조언을 해주며 살림을 챙겨준다. 하나꼬가 떠난 뒤에는 금순의 오라비 순동에게 공동생활을 제안하기도 한다. 금순을 언제까지 데리고 있을 수는 없기에 그를 손주사와 이어줄 궁리도 한다. 요컨대 기미꼬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여자들을 모아 가족을 만들었고, 그들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었다.
물론 기미꼬가 적극적으로 모색해준 하나꼬의 금순의 미래가 마냥 장밋빛인 것은 아니다. 하나꼬는 호된 시집살이로 힘들어 한다. 기미꼬가 주선할 금순의 결혼 생활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하지만 어쨌든 기미꼬는 ‘실패’하는 도전이나마 동료들이 지금까지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산파 역할을 맡는다. 아무도 하층민 여성의 삶을 신경 쓰지 않을 때, 기미꼬만이 그들의 부모, 남편, 사회의 역할을 대신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천변풍경》에는 왜 기미꼬가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에 관한 설명이 없다.* 기미꼬가 만든 대안적 공동체와 그로부터 가능해지는 가능성이 소설적 필연성을 부여받지 못한 채 의로운 개인의 선행 정도로 축소되는 것이다.
기미꼬의 행위에 필연성이 없다는 것은 그가 열어젖힌 가능성이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폐지될 수 있다는 의미다. 기미꼬의 행동에 소설적 필연성이 부여되어야만 또 다른 누군가도 그 필연성과 결합하여 기미꼬처럼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독특한 개인의 우연적 선택에 기댄 가능성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개별적이고, 우연적이라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기미꼬의 가능성은 닫히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기미꼬의 가능성은 완전히 닫히지 않는다. 첫째, 그는 남자에게 자신의 운명을 내맡기지 않는다. 기미꼬는 한국 근대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캐릭터다. 기미꼬는 여자도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점, 또 다른 여자의 삶을 보듬을 수 있다는 점을 알려줬다. 이것만으로도 기미꼬의 행동은 의미가 있다.
둘째, 기미꼬가 가진 ‘여성의 능동성’은 ‘삶의 능동성’으로도 확장된다. 《천변풍경》은 자본주의적 근대가 본격적으로 태동하던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이 거대한 변화 앞에서 대부분의 인간은 수동적 방랑자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적 근대는 그들이 지금껏 세상을 이해한 방식으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복잡한 체제다. 무너지지 않고 근근이 버텨나가는 것만으로도 힘에 벅찬 시대란 소리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근대의 이데올로기에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에 함몰되어 그 밖을 보려 하지 않는다.*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지도 않고, 변화가 생기지도 않는 괴로움 대신 수동적 일상성에 매몰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미꼬는 여성과 하층민이라는 이중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고, 또 다른 하층민 여성들을 세상에 안착시키려 한다. 《천변풍경》에서 기존 권력관계에 균열을 내고 그 균열을 확장시키는 적극적 행위자성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은 기미꼬뿐이다. 다른 캐릭터들이 거대한 변화 앞에서 수동적 행위자성의 영역으로 도피**하는 동안, 기미꼬만이 변화를 만들어가고자 한다.
입춘이 내일모레라서, 그렇게 생각하여 그런지는 몰라도, 대낮의 햇살이 바로 따뜻한 것 같기도 하다.
소설이 끝난 후에도 삶은 여전히 퍽퍽할 것이다. 하지만 박태원은 위와 같은 따뜻한 문장으로 소설을 마무리했다. 이유가 뭘까? 한계가 있을지라도, ‘필연성’을 부여받지 못했을지라도, 적극적인 노력으로 자신과 동료들의 삶에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 그 자체에 희망을 느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박태원은 결국 ‘우연’의 한계를 넘지 못했고, 역사적 사실을 핑계 삼아 우연을 더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역사소설로 향했다.* 자본주의적 근대라는 거대한 체제의 폭력 앞에서 길을 잃었고, 체제의 모순을 까발리거나 내파하는 미학적 성취에는 다다르지 못했다. 그는 끝내 저항적·혁명적 모더니즘의 세계에서 후퇴했다.
하지만 적극적 행위자성을 발휘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변화를 상상할 수 있다는 소박한 가능성은 놓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박태원의 현대성을 읽었다. 누군가의 의지만으로 세계가 변화한다는 것은 낭만적일정도로 순진한 생각이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때 우리가 마주하는 건 극한의 수동성의 세계다. 회의하며 움츠리는 것보다 바보 같은 희망이나마 기대어 움직이는 것이 낫다. 《천변풍경》의 기미꼬처럼 말이다.
*해당 문장은 장수익의 작품 해설 "근대적 일상성의 부정과 자립적 공간"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를 '도피'라 부를 수만은 없다. 일상에 적응하며 삶을 어떻게든 이어나가는 수동적 행위자성도 종종 변화의 공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나아가 거대한 체제 앞의 수동적 개인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생존 그 자체가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