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황순원 단편선-독 짓는 늙은이》(문학과지성사, 2004)
흔히 황순원의 작품이 시대를 '초월'한 서정성을 자아낸다고 한다. 그의 작품이 시대 배경을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대 배경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그의 작품은 내내 아름답다. 절제된 문장에 함축된 무언가를 음미하는 재미가 있다. 시대, 사회를 날카롭게 드러내는 문장은 그 잔혹한 리얼함으로 독자를 전율케 하지만 황순원의 ‘순수하게’ 아름다운 문장은 간결한 형식에 응축한 서정성으로 닫혀있던 우리 내면의 깊은 곳을 울린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황순원은 시대를 ‘초월’할 수 없고, 그의 문장은 ‘순수하게’ 아름다울 수 없다. 그의 작품을 읽는 내내 감탄과 회의를 반복했다. 황순원 작품의 아름다움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작품을 맥락화 할 수 있는 지점이 없을까 고민했다. ‘실패한 남성, 그리고 생명의 윤리’. 나는 여기서 황순원의 현대성을 읽었다.
황순원 작품의 거의 모든 화자는 남성이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에는 거의 언제나 트라우마와 결핍이 묻어 있다. 그들은 이미 실패했거나, 실패하는 중이며, 실패할 예정이다. 어린 소년의 풋사랑을 그린 〈소나기〉부터 시골 풍경을 배경 삼아 불쾌한 남성 욕망을 형상화한 〈허수아비〉까지 이 흐름은 일관되게 이어진다.
〈별〉의 주인공은 죽은 어머니를 이상화하여 현실의 누나를 멸시한다. 시집간 누나가 죽었다는 소식에 슬퍼하다가도 그 슬픔이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버금가려 하자 성급히 거리를 둔다. ‘못생긴’ 누이는 결코 아름다운 어머니와 같은 위치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는 어머니는 죽었지만(〈별〉), 현실의 아버지는 소년의 롤모델로 살아있다. 〈산골 아이〉,〈황소들〉은 아버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아들의 이야기다. 물건을 팔러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는 소년(〈산골 아이〉)과 지주에게 당한 것을 되갚아주려는 아버지를 설레는 마음으로 동경하는 소년(〈황소들〉)의 내면은 그들이 꿈꾸고 나아가야 할 지향점이 아버지임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어린 소년이 꿈꾼 아버지의 모습은 어떠한가. 아버지라는 자리는 과연 욕망할 만한 자리인가? 황순원은 그렇지 않다고 본 것 같다. 그의 작품 전반에 씁쓸함의 미학이 깔린 이유다.
〈소리〉의 주인공 덕구는 본래 소박하고 건실한 남자였으나 전쟁에 다녀온 이후 완전 딴 사람이 되어 점점 타락해간다. 그가 본래의 근면함을 회복하는 계기는 ‘아버지 됨’의 순간이다. 하지만 덕구의 희열은 오래가지 않는다. 〈집〉, 〈내 고장 사람들〉, 〈곡예사〉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듯, 모든 아버지는 실패한다. 〈집〉의 주인공 막동이 아버지는 도박 중독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자살한다. 점잖은 지주였던 〈내 고향 사람들〉의 김구장 역시 아들을 학도병으로 보낸 후 무너지고 만다. 〈곡예사〉의 주인공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전쟁 후 가족과 함께 살 곳이 마땅치 않아 전전긍긍한다.
그저 원컨대 나의 어린 피에로들이여, 너희가 이후에 각각 자기의 곡예단을 가지게 될 적에는 모쪼록 너희들의 어린 피에로들과 더불어 이런 무대와 곡예를 되풀이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에게 마음속으로 건네는 말이다. 피에로는 위태로운 삶의 곡예를 이어가면서도 천진하게 웃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나’는 피에로의 비극이 더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실패한 아버지들은 끝끝내 반전을 이뤄내지 못한다.
〈원색오뚝이〉의 주인공 윤노인의 며느리는 전쟁이 끝나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도망친다. 이후 윤노인은 우연히 며느리를 마주친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인륜을 근거로 화를 내기엔 그와 며느리의 처지가 모두 비루하기 때문이다. 윤노인이 아버지로서의 권력을 복권하기엔 상황이 너무도 척박하다.
〈독 짓는 늙은이〉의 송영감도 마찬가지다. 부인이 젊은 조수와 눈이 맞아 도망간 후 갓난아이와 둘만 남게 된 그는 어떻게든 살아보려 애쓰지만 얼마 못가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아이를 남의 집에 보낸 후 불타는 가마 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그 안에는 송영감을 닮아 실패한, 깨진 독의 파편이 널려 있다. 실패의 좌절을 품고 비장하게 사라지는 것만이 송영감이 품위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다.
비참한 상황에 내몰린 아버지만 실패하는 것도 아니다. 〈황노인〉의 상황은 〈원색오뚝이〉, 〈독 짓는 늙은이〉의 주인공과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그 역시 헛헛함을 비껴가지 못한다. 황노인은 재산도 넉넉한 편이고 자녀들도 혼인하여 손주까지 보았다. 온 가족이 황노인의 환갑을 축하해주러 모이기도 한다. 하지만 황노인은 기쁘지 않다. 자신을 축하해주러 온 사람들의 얼굴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아내의 얼굴이 더 아른거린다. 그가 지나온 세월은 자부심이 아닌 알 수 없는 회한으로 채색되어 있다.
결국 실패한 아버지도 성공한 아버지도 행복하지 않다. 〈산골 아이〉, 〈황소들〉의 소년들이 꿈꾸던 늠름한 아버지는 환상에 불과했다. 아버지라는 자리는 애초에 행복해질 수 없는, 실패할 운명의 길이었다. 그렇다면 아버지라는 선택지를 벗어난 남성들의 삶은 어떨까? 남성 청년들은 아버지가 되지 않았더라면 꽃 피웠을 삶의 가능성을 품고 있을까?
이번에도 그렇지 않다. 부유하는 생의 풍경이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모이고 흩어지는 〈사마귀〉를 보자. 창녀, 고양이, 벙어리, 소녀와 할미 그리고 현. 이들은 무의미하거나 의미를 알 수 없는 것들을 주고받으며 하루하루를 이어간다. 이들은 삶의 의미가 오직 무의미로만 채워질 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무의미한 (남성) 삶에도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성적 욕망을 느낄 때뿐이다. 이성애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황순원 작품 속 남성이 생동감을 표출하는 몇 안 되는 순간의 근거가 된다.
이러한 런닝선수의 폼을 바라보면서 태섭은 소녀의 두꺼운 가슴이 테이프를 걸치고 골인하며 테이프 끝을 푸르르 날리는 장면을 머리에 그리고 저도 모르게 여윈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늪〉의 주인공 태섭은 자신이 과외하는 어린 여학생을 욕망한다. 소녀에게 딴마음을 품어선 안 된다는 도덕률이 그를 저지하지만 태섭의 욕망은 서서히 그 도덕률을 양심 바깥으로 밀어낸다. 하지만 소녀에겐 연애하는 남학생이 있었다. 그제서야 태섭은 엄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 불량한 소년과 어울려서는 안 된다고 소녀를 꾸짖는다. 〈독 짓는 늙은이〉의 송영감이 아내와 함께 도망간 젊은 조수를 질투하듯, 태섭 역시 자신이 욕망하는 여성을 차지한 어린 남자에게 질투를 느낀다. 실패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이전’의 삶도 여자를 향한 욕망과 어린 남성을 향한 질투를 느낄 때에야 의미를 채울 수 있는, 변변치 않은 것이다.
결국 〈소나기〉, 〈별〉, 〈산골 아이〉, 〈황소들〉, 〈집〉, 〈사마귀〉, 〈소리〉, 〈내 고향 사람들〉, 〈원색오뚝이〉, 〈곡예사〉, 〈독 짓는 늙은이〉, 〈황노인〉, 〈늪〉, 〈허수아비〉의 모든 남자들은 실패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실패는 그들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황순원 작품의 아름다움이 ‘시대를 초월하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가진다는 주장은 의미심장해진다. 황순원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우리가 남성 실패의 서사를 ‘보편’의 서사로 읽어 왔음을, 남성 실패가 야기하는 안타까움을 ‘보편적’ 아픔으로 이해해왔음을 보여준다. 남성을 초월적 주체로 인식할 때만 남성 실패의 서사가 시대를 초월한 순수한 아름다움을 지닌다는 과대해석이 가능하다.
요컨대 황순원 문학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그의 작품이 기대고 있는 젠더권력에 주목하지 않았을 때만 가능하다. 이는 황순원이 지금껏 누려온 긍정적 평가의 역사가 한국 문학에서 젠더가 주요한 비평 도구로 부상하기까지의 전사前史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젠더가 없을 때만, 황순원의 작품이 ‘시대를 초월한 순수한 아름다움’의 코드로 읽힐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황순원의 작품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실패한 남성이 자아내는 서정성이 황순원 문학을 관통하는 첫 번째 흐름이라면, 그에게서 윤리적 가능성을 발견할 두 번째 흐름도 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조우다.
널리 알려진 작품인 〈학〉이 그 출발점이다. 이념이 갈라놓은 중년의 두 친구가 폭력을 거스르고 화해하는 계기는 어린 시절 그들과 함께 놀았던 학이다. 묶어 놓고 기르던 학이 사냥당해 표본이 되어버릴 위기에 처하자 둘은 부리나케 달려가 학을 풀어준다. “그저 자기네의 학이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른이 된 소년들은 다행히 그 절박함을 잊지 않았고, 화해할 수 있었다.
궁핍한 자신의 처지에서 징용 나간 아들의 삶을 겹쳐 읽고 따뜻한 호의를 베풀어준 여인에게 보답하고자 하는 노인의 마음을 그린 〈필묵장수〉, 모두가 미쳤다고 손가락질하며 때려잡자는 개를 홀로 옹호하며 지켜낸 후 끝내 새로운 생명으로의 확산을 이끌어낸 간난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목넘이마을의 개〉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실패한 남성 이전에 생명이 있음을 보인다.
모든 것을 걷어낸 생명이 품은 경이는 〈겨울 개나리〉, 〈닭제〉, 〈뿌리〉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겨울 개나리〉를 보자. 수술 후유증으로 식물인간이 된 화자의 처제를 간호하는 ‘아줌마’는 정성을 다해 환자를 돌본다.
아줌마의 시선엔 무표정한 환자의 얼굴로부터 무엇인가를 분명히 읽고 있는 빛이 역력했던 것이다.
무표정에서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 즉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의미를 발견해낸다는 것은 처제와 아줌마가 하나 되었음을 보여준다. 아줌마의 얼굴은 점점 상해가지만, 환자의 얼굴은 점점 뽀얗게 변한다. 아줌마가 환자와 완전히 연결되어 자신의 생 에너지를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끝내 둘만의 세계를 창조해낸다. 의사도 예상하지 못한 환자의 임종을 아줌마 혼자 예감하는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식물인간이 된 환자의 소통 불가능성은 아줌마의 지극한 헌신을 만나 소통 가능의 상태로 전환된다. 생명의 가능성에 온전히 집중하면, 닫혀있던 문이 열린다. 생명의 가능성에 온전히 집중하면,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고 느끼며 소통할 수 있다.
〈겨울 개나리〉의 '아줌마'가 열어젖힌 세계는 〈닭제〉에서도 이어진다. 수탉이 늙으면 뱀이 된다는 동네 어른의 말에 한 소년이 눈물을 머금고 정든 수탉을 죽인다. 수탉이 뱀이 되어 이제 막 태어난 제비 새끼들을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년은 점차 초췌해진다. 정든 수탉을 죽인 죄책감과 죽은 수탉이 뱀이 되어 새끼 제비를 헤칠까 싶은 노파심이 그를 내내 괴롭혔기 때문이다. 마을 어른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소년의 ‘병’을 치료하려 애쓰지만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다. 소년의 병은 새끼 제비가 날갯짓할 때, 즉 죽은 수탉을 온전히 추모할 수 있을 때에야 치유될 수 있다.
다섯 마리 제비 새끼가 축가지 않고 완전히 날 수 있던 날, 소년은 그 제비들을 내다보며 미소를 얼굴 가득히 띠었다.
하지만 소년의 어머니는 그의 미소를 보고 대성통곡한다. 아이가 끝내 미쳐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작 소년을 미치게 하는 것은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이 광기로 독해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어른들은 소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소년이 영원히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겨울 개나리〉의 '아줌마'와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한, 아무도 그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에.
〈뿌리〉는 소년의 미소가 맞이할 쓸쓸한 미래를 보여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가장 낮은 자세로 교회를 섬겼던 ‘교회아줌마’는 죽어서야 다시 웃을 수 있었다. 세상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녀의 진심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죽은 아들의 환영을 품에 안은 채 죽음으로써만 자신의 세계를 인정받는다. 〈닭제〉의 소년과 〈뿌리〉의 교회아줌마는 생명의 경이를 알아본 자가 견뎌야 할 외로움의 무게가 얼마나 큰 것인지 각각 '광기'와 죽음으로 증명한다.
〈학〉, 〈필묵장수〉, 〈목넘이마을의 개〉, 〈겨울 개나리〉, 〈닭제〉, 〈뿌리〉의 주인공들도 실패한다. 하지만 이들의 실패는 남성의 실패와 다르다. 생명의 가능성을 깨닫지만 세상에 인정받지 못한다는 실패는 남성의 실패보다 더 근원적이다. 생명 사이를 가로막는 것들을 걷어낸 이후의 감동은 황순원의 첫 번째 실패(남성의 실패)를 넘어선다.
다만 ‘근원적’ 생명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떨칠 수는 없다. ‘모든 것을 걷어낸 생명’에서 그 ‘모든 것’의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생명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뿐만 아니라 젠더화된 생명의 조건도 포함된다. 황순원의 ‘초월’이 남성 젠더 기득권의 다른 이름이었듯, 황순원의 ‘근본적 생명’ 역시 젠더화 된 생명의 조건을 비가시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생명이 어떤 맥락에서 구체화되어 드러나는지를 면밀히 살펴야 생명의 내용이 특정한 방식으로 한정되지 않을 수 있다.
자식을 학도병으로 보낸 후 망가진 〈내 고향 사람들〉의 김구장은 “메칠 전에 내 아들 놈이 군대에서 도망을 텠대”라고 속삭이며 미소 지었다. 아들이 살아있다는 소식, 즉 생명의 가능성에서 시작된 웃음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의 장에서 그 의미를 획득한다. 만일 우리가 김구장의 웃음을 별다른 고민 없이 긍정한다면 아버지와 아들이 수없이 반복했던 실패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김구장이 주목한 생명의 의미를 더 확장시키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생명의 가치가 드러나는 구체적인 맥락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황순원이 회귀하려 했던 근원적 생명은 또다시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실패하더라도 이전과는 다르게 실패해야 한다. 남성, 아버지, 아들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실패를 넘어 모든 비非남성의 실패에도 주목할 때에야 우리는 황순원이 강조한 생명에 한 발 가까워질 수 있다. ‘초월’, ‘순수한 아름다움’ 따위는 그 이후에 논해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