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리《김동리 단편선-무녀도》(문학과지성사, 2004)
‘근대’의 기준은 무엇일까? 근대와 전前근대를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있을까? 근대의 사전적 정의는 ‘중세와 현대 사이의 시대’다. 하지만 단순한 년도 구분을 넘어 조금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특정한 사건의 발생이나 전근대적 패러다임의 붕괴를 근대의 시작으로 잡을 수도 있고, 전근대적 삶과는 다른 자잘한 삶 경험의 누적이 사람들에게 야기하는 변화의 축적을 근대의 시작으로 잡을 수도 있다. 혹은 근대와 전근대의 구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무엇이 정답이든 간에 김동리는 자신이 살아간 시대에 발 디디고 선 채, 뒤편으로 사라져 가는 무언가(전근대성)를 탁월하게 감각했던 작가다. 그의 작품에서 사라져 가는 것들은 비극의 형식을 띠고 역사 속으로 퇴장한다.
김동리가 그리는 전근대적 삶이 비극인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전근대성 자체에 내재된 모순이다. 모든 시대는 나름의 비합리성을 갖는다. 하지만 축적된 시간에 비례하여 질곡의 깊이가 달라진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때는, 시대의 비합리성이 삶의 역동을 낳기도 한다. 시대의 모순이 생산적 긴장으로 전환되어 사람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 시대가 마무리될 때는 시대의 비합리성이 더 이상 역동일 수 없다. 시대의 자랑거리였던 규칙·규범은 낡을 대로 낡아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한 채 사람들을 옥죄기만 한다. 내재적인 역동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외부의 충격으로만 운동이 발생한다. 저물어가는 시대의 사람들은 옴짝달싹 못한 채 온몸으로 그 충격을 받아낼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 이유와 정반대다. 낡고 오래된 규칙·규범일지라도 여전히 그에 기대어 삶을 꾸리는 사람들이 있다. 두 번째 비극은 여기서 생겨난다. 더 이상 현재로 존재할 수 없고, 과거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자들의 삶은 쓸쓸함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
〈화랑의 후예〉(1935), 〈산화〉(1936), 〈달〉(1947), 〈역마〉(1948)는 전근대적 삶의 비극을 높은 수준으로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화랑의 후예〉의 주인공 황진사는 호칭만 진사일 뿐 여기저기 점을 봐주며 밥 동냥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비루한 현실일지라도 자존심만은 여전하다. 그는 과부와 중매를 서주려는 주변의 호의에 “황후암 육대 손이 그래 남의 가문에 출가했던 여자한테 장갈들다니 당하기나 한 소리요”라고 답하며 오히려 역정을 낸다.
그러던 어느 날 황진사가 잔뜩 흥분한다. 자신의 조상이 신라 시대에 화랑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약장수와 마을을 돌며 엉터리 약을 팔다 순사에게 잡혀가는 처지지만, 그 와중에도 핏줄로 존재를 증명하려는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한다. 남들이 끌끌거리며 혀를 차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지나간 시대의 족보는 그의 영원한 자긍심이기에.
〈산화〉는 신분제 사회의 비극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찢어지게 가난한 뒷골 사람들은 벼락 출세한 윤참봉이 환갑을 맞아 나눠준 소고기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먹는다. 하지만 그 소는 죽어서 땅에 묻혔던 소였다. 죽어버린 소가 아까웠던 윤참봉이 마을 사람에게 선심 쓰듯 썩은 고기를 나눠준 것이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육독肉毒이 올라 죽어나간다. 높은 신분에 속한 자의 호의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서글픈 결말이다.
〈달〉과 〈역마〉는 전근대적 사랑의 비극을 다룬다. 〈달〉은 풋사랑의 좌절에 목숨을 잃은 두 남녀의 이야기다. 소녀 정국과 소년 달이는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연애를 시작한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금세 마을 사람들에게 소문난다. 정국은 사랑의 좌절과 낙인의 수치심에 목숨을 끊고, 달이 역시 서서히 죽음에 가까워진다. 사랑이 '관습'이었던 시대에 '감정'으로 서로를 사랑했던 둘의 비극은 처음부터 예정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역마〉도 비슷하다. 이야기는 늙은 보부상과 그의 딸 계연이 옥희가 운영하는 주막에 머무르면서 시작된다. 계연과 옥희의 아들 성기는 서로 호감을 느끼다 이내 사랑에 빠진다. 옥희도 계연을 며느릿감으로 삼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내 그녀가 자신의 배 다른 동생임을 알아챈다. 떠돌이 보부상은 사실 수십 년 전, 옥희의 어머니가 주막을 운영할 때 하룻밤 묵었던, 옥희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계연의 그 시뻘건 두 눈은 역시 성기의 얼굴에서 그 어떤 기적과도 같은 구원만을 기다리는 것이었고, 그러나, 성기는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아버릴 뻔하던 것을 겨우 버드나무 가지를 움켜잡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사랑하지만 생이별할 수밖에 없는 계연과 성기의 슬픔을 묘사하는 대목이다. 인륜이 거대한 장애가 되어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두 남녀는 기를 쓰고 버틸 때에야 쓰러지지 않을 수 있다. 친밀성을 둘러싼 전근대의 규범은 이토록 가혹하며, 그 앞에 선 개인은 위태롭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 결국 성기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엿판을 맞춘 후 유랑하는 삶을 선택한다. 거대한 비극으로부터의 탈주 외에 그가 제정신으로 버티며 살아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동리는 신분, 가난, 사랑 등의 영역에서 전근대성의 비극을 끄집어냈다. 김동리가 그린 전근대의 풍경은 서정적인 아릿함을 자아낸다. 하지만 김동리는 철저하게 젠더화된 방식으로 전근대의 비극성을 인식했다. 〈황토기〉(1939)를 보자.
타고난 장사인 억쇠는 어른들로부터 늘 힘을 숨기고 살라는 말을 들어왔다. 어른들은 그가 힘을 잘못 쓰면 온 가문이 화를 입을 거라 걱정했다. 늘 자신의 힘을 감추어야 한다는 말의 무게에 억눌려온 억쇠는 “무엇이든지 눈에 뵈는 대로 때려 부수고 싶고 메어치고 싶고 온갖 몸부림과 발광이 치밀어올라 잠시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득보가 나타난다. 그 역시 힘이 장사다. 서로를 알아본 둘은 주기적으로 힘을 겨룬다. “해가 지고 어두운 산그늘이 내려오도록 이 커다란 피투성이들은 일어날 생각도 없이 연방 서로 피를 뿜으며 엎치락뒤치락”한다. 이는 서로를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한 번도 제대로 써보지 못한 힘을 쓰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이다. 무엇보다 억쇠는 자신만큼, 혹은 자신보다 강한 존재가 있다는 데 쾌감을 느낀다. 억쇠는 득보가 자신을 들어 내던질 때조차 “몸이 공중으로 스스로 떠오르는 듯한 즐거움이 가슴에 솟아”오른다.
하지만 득보는 치정 사건에 얽혀 허무하게 죽어버린다. 득보의 죽음을 접한 억쇠는 죽음 충동을 느낀다. 억쇠는 “득보의 단돗날이 자기의 가슴 한복판을 푹 찔러, 이 미칠 듯이 저리고 근지러운 간과 허파를 송두리째 긁어내”주기를 바란다. 득보 없이는 자기 삶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억쇠와 득보(남자)의 비극은 시대의 질곡으로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데서 생겨난다. 다른 시대였다면 훨훨 날아다녔을 사람들이 시대를 잘못 타고나 제대로 빛도 보지 못하고 사그라드는 상황이 슬픔을 자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여자의 비극은 다르다. 김동리 작품의 남자들이 자신의 가치를 몰라주는 시대와 불화했다는 데서 비극성을 획득했다면, 김동리 작품의 여자들은 사라져 가는 시대 그 자체로 육화되어 비극성을 성취한다. 남자들과 달리 그들에겐 펼쳐낼 능력과 가능성이 없다. 전근대에 박제된 그녀들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과거’로 사라진다. 그들은 사라져 가는 시대 그 자체다. 사라짐으로써만 비극성을 획득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바위〉(1936)는 ‘문둥병’에 걸린 여성이 비참하게 떠돌다 마을 사람들이 떠받드는 ‘복바위’ 앞에서 불타 죽는 이야기다. 그는 복바위에 모든 희망을 걸고 날마다 그 앞을 지나며 간절히 기도했지만 복바위는 그의 간절한 기도를 잔혹한 고통으로 되돌려준다. 마을 사람들에게 복을 가져다준다는 복바위마저 비참한 그의 삶을 외면한 것이다.
〈무녀도〉(1936)의 주인공 모화도 죽는다. 무당이었던 모화는 오래전 헤어져 애타게 기다리던 아들을 다시 만나지만 그가 간절히 기다렸던 아들은 ‘예수꾼’이 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 서로를 그리워하던 마음이 무색하게, 모화와 아들은 끊임없이 갈등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을에 교회가 들어서고 모화는 점차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잃어간다.
모화는 아들을 잡아간 ‘예수귀신’을 물리치고 떠나간 마을 사람들을 되찾아올 마지막 굿판을 기획한다. 하지만 굿을 하던 중 물가로 들어간 “모화의 몸은 그 넋두리와 함께 물속에 아주 잠겨버렸다……” 기독교와 기독교라는 제도에 밀려 모든 것을 잃은 무당 모화는 근대에 밀려나는 전근대성을 온몸으로 체화한 인물이다. 여기에 남자(목사)와 여자(무당)의 구도가 더해진다. 모화의 몸이 이중으로 뒤쳐진 존재로 재현되는 것이다.
〈찔레꽃〉(1939), 〈동구 앞길〉(1940), 〈혼구〉(1940)의 여성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남편의 부름에 오랜 세월 정든 가족과 땅을 떠나 멀리 만주로 갈 수밖에 없는 여인의 슬픔(〈찔레꽃〉),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잣집에 소실로 들어가 아들을 낳아준 순녀가 본부인에게 잔혹하게 보복당하는 비참함(〈동구 앞길〉), 자기 삶의 선택권을 빼앗긴 채 집안 생계를 이유로 팔려갈 위기의 소녀가 겪는 두려움(〈혼구〉). 선택을 내리는 자들은 모두 남자지만, 그 선택의 뒷감당은 오롯이 여성의 몫이다. 그녀들이 처참한 현실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동안 선택(비극의 원인)의 주체인 남자들은 등장하지도 않거나 사건을 회피한다. 요컨대 김동리 소설 속 여성 인물의 비극은 전근대적 여성에게 강제된 수동성에서 출발하여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종결된다.
누군가는 이를 전근대를 살아가는 여성 삶의 ‘현실적’ 재현이라 독해할 것이다. 하지만 〈황토기〉의 억쇠를 생각해보면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억쇠 역시 나름의 비극성을 지닌 존재지만, 그에게는 힘(능력)이 있고 힘을 겨룰 동료도 있다. 다만 시대를 잘못 만났을 뿐이다.
하지만 김동리 소설 속 여성 인물들에게는 잘못 만날 시대조차 없다. 그녀들이 사라지는 시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도전도, 저항도 없다. 그저 부조리한 시대와 하나 되어 사라져 버린다. 김동리는 여성의 ‘한恨’에 주목하긴 하지만, 시대의 비극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으로써만 그러하다. 그에게 여성은 인간적 연민의 대상이 아닌 예술적 재현의 도구였다.
물론 김동리의 모든 소설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해석할 순 없다. 각각 해방과 이념 갈등을 배경으로 한 〈혈거부족〉(1947)과 〈광풍 속에서〉(1949)는 다른 작품처럼 젠더화된 비극의 구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배경, 사건의 강렬함 때문이다. 다른 작품들이 작가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전근대성의 문제를 다뤘다면, 이 두 작품은 시대적 격랑의 기록인 것이다.
동시대의 역동적 사건에서도 비극성을 길어오는 작가의 역량은 탁월하다. 하지만 김동리의 작품이 빛나는 순간은 역시 전근대의 비극을 (젠더화된 방식으로) 다룰 때다. 멀찍이 보면 별 탈 없이 무난한 사람들의 삶에 어떤 슬픔이 축적되어 그들을 파멸시키는지, 그 파멸의 이유는 무엇인지를 좇을 때야 말로 김동리 작품의 깊이가 확보된다.
김동리가 젠더화된 방식으로 전근대성의 비극을 읽어냈다는데 동의한다면, 우리는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한, 젠더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는 비극의 경험에 주목해야 한다. 비록 김동리는 여성의 삶을 전근대에 고정시켜 전시함으로써 시대의 비극을 드러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의 한계를 넘어야 한다. 오늘의 비극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의 삶’을 섬세히 관찰하고 개선시켜 나가야 한다. ‘여성’이란 이름으로 표상되는 모든 소수자의 삶이 박제되지 않고 생동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비록 비극일지라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소수자의 삶을 기록해야 한다. 나는 여기서 김동리의 현대성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