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익. 《최명익 단편선-비 오는 길》(문학과지성사, 2004)
최명익 단편집 《비 오는 길》은 식민지 지식인의 내면, 고뇌를 섬세하고 치밀하게 좇는다. 작품 속 주인공은 지식인의 길에 확신하다가도 이내 자기혐오에 빠지며 무너지기를 반복한다. 파멸하지만 끝내 구원받는다.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 파멸, 구원은 작품의 주제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삶 그 자체이기도 했다.
〈폐어인〉의 주인공 현일은 실직한 선생이다. 아내의 품삯으로 근근이 먹고살고는 있지만 이마저도 언제 끊길지 모른다. 다시 일을 시작하기도 녹록지 않다. 음식을 잘못 먹어 각혈하며 죽어가는 현일의 고양이는, 현일을 꼭 닮았다.
면접을 망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 현일은 자신과 같은 처지인 도영을 만난다. 그는 현일보다 더 위태로운 상태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지식인의 자의식을 버렸다. '덫 속에 갇힌 쥐가 오직 할 일은 덫 속에 있는 미끼를 먹고사는 것밖에 없다'를 신념으로 삼은 도영에게서 현일은 동질감과 혐오를 동시에 느낀다.
과거 현일의 제자였던 병수는 그를 더 괴롭게 한다. 일본으로 유학 간 병수는 현일을 만나 신학문에 대한 감상, 생각을 종종 들려주곤 했다. 현일은 그런 병수를 통해 자신에게 더 이상 허락되지 않은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을 충족시켜왔다. 하지만 그랬던 병수마저 어딘가 기운이 없다.
현일은 "실생활에 나서기가 무서워서 그러죠"라고 말하는 병수에게 실망하고 분노한다. 병수마저 "불안이라는 유행병"에 걸렸다면, 현일의 지식인 정체성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현일은 실존적 삶에서도, 관념적 삶에서도 모두 죽어가는 중이다. 작품 전반에 비참한 패배의식이 깔려 있는 이유다.
〈비 오는 길〉의 주인공 병일은 〈폐어인〉의 현일 비슷한 듯 다르다. 그는 공장에서 잡무를 보며 박봉을 받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사 읽는다. 소설과 멀어진 삶을 살지만 책을 버리지는 못한다. 책과의 정신적 거리를 물리적 가까움을 통해서라도 보상받고자 하는 것이다. 책은 방구석에 처박힌 채 펼쳐지지 않을 것이지만, '방에 있다'는 물성物性만으로 병일을 위로해준다. 읽지도 않는 책을 버리지 않는 병일에게서 지식인의 순수한 낭만 혹은 무능한 생활력을 읽어낼 수 있다.
우연한 계기로 술친구가 된 사진사 이필성은 병일과는 정반대다. 그는 세속적이고 평범한 삶의 화신이다. 차곡차곡 돈을 모아 생활을 불리는 재미를 진심으로 즐기고,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키우는 보람에 행복해한다. 병일은 당당하고 확신에 찬 필성에게 경멸과 부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필성이 행복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행복이 진짜 행복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병일은 자신의 세계와 필성의 세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뇌한다. 지식인 자의식과 물질세계의 고단함을 두고 저울질하며 그래도 첫 번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자의식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를 생각했을 때 명확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 수치스러워 한다. 그러던 중, 필성이 허망한 죽음을 맞는다. 병일에게 필성의 죽음은 물질세계에 대한 지식인 자의식의 우위를 재인식하는 계기다. 병일은 다시금 독서에 "강행군"하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의 꿈을 버리고 세속적 욕망을 좇기에는 삶이 너무도 예측 불가능하다고, 병일은 생각했던 것 같다. 독서에 강행군하겠다는 병일의 결심은 생활인에 대한 지식인의 '승리'선언이다. 설령 자기만족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그 결심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든, 병일은 〈폐어인〉의 현일이 겪은 '불안이라는 유행병'을 '극복'했다.
하지만 지식인의 고뇌 이전에 지식인의 위선이 있다. 물질세계에 관심을 거두는 지식인의 삶은 어떻게 지속되는가? 〈무성격자〉와 〈역설〉에 그 답이 있다.
〈무성격자〉의 정일은 선생 일을 하며 박봉을 받는다. 하지만 생활은 궁핍하지 않다. 그의 아버지가 부자이기 때문이다. 정일은 그 돈으로 유흥을 즐기며, 애인 문주와 로맨스를 이어간다. 정일은 한때 "문화탑에 한 돌을 쌓아보겠다는 야심"을 가진 적도 있으나 이제는 옛날 일일 뿐이다.
애인 문주와 연애(근대적 사랑)한다는 것이 그에게 남은 지식인·교양인의 마지막 자존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혼례를 치른 아내가 채워주지 못하는 근대적 낭만을 문주를 통해 보충하는 것이다(〈무성격자〉에서 정일의 아내는 스치듯 등장했다 사라진다. 작가는 그녀를 전통적인 '아낙네'의 모습으로만 재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와 문주가 동시에 죽어간다. 정일이 마주한 두 죽음은 그의 존재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아버지의 돈을 받아 생활하지만 그로 인해 가능해진 삶의 모든 에너지를 문주에게 쏟아왔다. 아직 죽기 싫다고 발버둥 치는 아버지에게 혐오를 느끼지만, 자기가 죽으면 잊어달라는 문주에게는 묘한 끌림을 느낀다.
하지만 정일은 결국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고, 문주의 죽음은 소식으로만 듣는다. 정일의 존재(아버지의 물질적 지원)와 의식(문주를 향한 마음)은 끊임없이 균열하지만, 그 균열은 결코 분열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는 흔들리지만 넘어지지 않는다. 정일은 존재와 의식의 충돌을 끈덕지게/뻔뻔하게 버텨낸다. 돈이 있어야 지적 허영도 가능함을 알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일의 삶은 '안정적인 균열'이라는 형용모순이다.
〈무성격자〉가 존재와 의식 사이의 균열을 보여줬다면, 〈역설〉은 지식인이 무엇을 좇는지를 풍자한다. 한물 간 작가인 문일은 자신이 선생으로 근무하는 학교의 교장 자리를 제안받는다. 여러 교장 후보가 있었지만 모두 나름의 이유로 걸러지고, 그에게 최종 제안이 온 것이다. 최종적으로, 문일은 그 제안을 거부한다. 하지만 흐뭇하다. 문일을 설득하러 온 S 씨가 문일의 '인망'을 강조하며 그가 교장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기 때문이다.
문일의 내면을 묘사한 다음의 문장을 보자. "자신의 자존심과 결벽성은 어느덧 세속에 더럽혀져서 가십파들이 씹다 버린 껌과 같은 '인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슬며시 집어서 씹어보는 것으로 굶주린 긍지를 만족해보려고 한 것이다." 문일은 더 이상 좋은 작품을 쓰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인망'이 남아있다. 겨울잠에 든 옴두꺼비가 꿈을 먹고 살듯, 사회에서 쓰임을 잃은 문일은 '인망'으로 공허한 자의식을 지속한다.
허명虛名에 만족하는 문일의 모습은 〈폐어인〉과 〈비 오는 길〉 주인공들의 고민이 과연 의미 있는 것이었는지를 회의케 한다. 모든 것이 고작 허명으로 귀결될 운명임을 알았다면, 그들이 치열하게 지식인의 자존을 고민할 수 있었을까?
요컨대, 지식인은 치열하게 자기 존재를 고민하지만 정작 그들의 존재조건과 지적 목표는 위선적이라는 것이 최명익의 진단이다. 하지만 최명익은 절망하지 않는다. 답은 없지만 우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불안과 파멸, 체념을 거쳐 마침내 '구원'을 얻는다.
〈봄과 신작로〉는 상징하는 바가 뚜렷한 작품이다. 금녀는 시골마을로 시집온 새색시다. 그런 그녀를, 도시에서 온 자동차를 가진 남자가 유혹한다. 그 남자는 금녀를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에 몰아넣고 결국 자신의 욕망만 채운 후 금녀를 버린다. 이후 금녀는 성병에 걸려 허망하게 죽는다. 그 즈음 금녀네 집에서 키우던 소도 미국에서 온 아카시아를 잘못 먹고 죽어버린다.
'시골에서 온 자동차'와 '미국에서 온 아카시아'는 모두 외부의 것들이다. 최명익은 '바깥 것'에 기댄 구원을 갈구하지 않는다. 그가 지금껏 천착해온 문제는 생활인과 지식인의 괴리였다. '어떻게 자괴감에 빠지지 않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자기 존재를 구축하는 지식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가 그의 문제의식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바깥'에서 온 것(자동차, 아카시아)은 그의 고민 대상이 아니다. '바깥 것'은 구원은커녕 우리의 생명을 앗아간다.
〈심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낭만적일 정도로 처절한 지식인의 파멸 이야기다. 드라마의 구조와 깊이, 전개가 압도적이다.
화가이자 선생인 문일은 아내를 잃은 후 여옥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여옥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는 아내를 추억하기 위해 여옥을 만났을 뿐이다. 여옥도 이를 알고 있다. 그래서 문일을 떠난다. 그러던 어느 날 하얼빈에 있는 지인을 만나러 간 문일은 초라한 댄스홀에서 여급으로 일하는 여옥을 다시 만난다.
여옥은 과거의 연인 현혁과 재결합한 상태였다. 현혁은 "한때 좌익 이론의 헤게모니를 잡았던 유명한" 사람, "지식 계급으로는 모르는 이가 없을 만치 유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두 지나간 일이다. 현혁은 그의 화려했던 과거만큼이나 추락해 있다. 그는 모르핀, 아편 중독자며 여옥의 급여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선도적 좌파 지식인이었던 현혁이 완전히 길을 잃은 채 "모히(모르핀) 연기와 추억의 꿈을 먹고 사는 사람"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현혁은 화려했던 시절의 연인인 여옥이 자신을 떠나지 않았다는 데서 간신히 삶의 자존을 끌어오는 초라한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현혁은 그런 여옥마저도 돈을 받고 팔아넘기려 한다. 현혁은 여옥의 몸값으로 문일에게 얼마를 받아낼 수 있을지 계산하기 바쁘다.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는 추락이다. 작품의 강렬한 비극적 결말(여옥의 자살)은 현혁의 타락을 더욱 극화한다.
무엇이 현혁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래도 순수한 마음으로 지식인이라는 존재를 고민했던 〈폐어인〉, 〈비 오는 길〉 속 지식인들은 왜 현혁처럼 타락할 수밖에 없었을까? 〈무성격자〉의 정일처럼, 존재와 의식 사이에서 모순을 겪었기 때문일까? 〈역설〉의 문일처럼 세속적 명예만 좇았기 때문일까? 〈봄과 신작로〉의 금녀처럼 '바깥(마르크스 주의)'에서 답을 찾았기 때문일까?
어쩌면 현혁의 타락은 모든 지식인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장삼이사〉는 지식인의 운명에 관한 비극적인 비유다. 이야기는 찻간 안에서 전개된다. 배 나온 중년의 남성 포주는 도망친 여성을 붙잡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포주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대놓고 '갈보'를 희롱한다. 포주의 아들은 그녀의 뺨을 때리기도 한다. 주인공 '나'는 화장실에 간 그녀가 자살을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으나, 그녀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자리에 돌아온다. 지독히 평온한 표정으로.
'갈보'는 탈출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갇힌 존재다. 마치 고뇌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는 지식인과 닮아 있다. 한국 근·현대문학의 많은 남성 작가가 그러하듯, 최명익 역시 (남성, 지식인) 삶의 비극성을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비유로 '창녀'를 활용했다. 답을 구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지식인들은 〈장삼이사〉의 갈보처럼 순응하거나, 〈심문〉의 현혁처럼 타락할 수밖에 없다.
지식인 최명익의 이토록 처절하고 서글픈 여정. 하지만 결국 그는 구원받는다. 그를 구원하는 건 김일성과 북한의 토지개혁이다(〈맥령〉). 갑자기 등장하는 김일성 예찬이 당혹스러웠지만,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왜 그가 김일성에게서 '구원'을 얻었는지를 알 수 있다(실제로 최명익은 1946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에 가입했다. 50년대 후반에는 평양문학대학에 재직하기도 했다).
〈맥령〉의 주인공 상진은 일제로부터 청년들을 전쟁에 참여토록 독려하는 글을 쓰라고 강요받는다. 어렵게 그 강압을 피해나가던 상진은 강제 징집된 인갑을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인갑의 아버지 죔손이영감이 과거 그의 집을 고쳐줬던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된다. 죔손이영감은 진정한 생활인이다. "제 집의 삼간 어영 하나도 제 힘으로 치워 못 가는 무능이 어이없어 걱정만 하던" 상진에게 "무쇠 갈고리같이 검고 억센" 그의 손은 경외의 대상이다.
이번에도 지식인 상진을 괴롭히는 건 생활인과의 대비다. 하지만 고뇌의 결과가 다르다. 상진은 〈비 오는 길〉의 병일처럼 생활인을 경멸하지 않는다. 상진이 대상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생활인의 능력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비 오는 길〉의 병일은 사진사 필성이 어떤 태도로 노동하는지, 그가 어떻게 돈을 모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맥령〉의 상진은 생활인이 어떻게 노동하는지, 그들의 노동이 어떻게 대상에 활기를 불어넣는지에 주목한다. 그러자 경멸이 경외로 바뀐다.
무엇보다도 생활인의 의식이 진보하고 있다는 것이 상진을 전율케 한다. 인갑은 말한다. "땅에 대한 디두(지주)들의 니해(이해) 관계와 생각은 우리 농사꾼들과는 애초에 다르니까요." 상진은 인갑의 말에 감동한다. "아, 젊은 농민! 그의 현실을 정확히 보는 눈과 제 위치에 대한 명백한 자각-그것은 멀지 않은 장래에 새 역사의 창조를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지식인 최명익은 돌고 돌아 마침내 구원에 도달한다. 죔손이영감과 인갑이는 관념적인 상진과는 달리 땅과 손으로부터 이론을 도출해낸다. 생활인에 대한 지식인의 오랜 경멸과 열등감이 마침내 농민, 땅, 김일성을 만나 '해소'되는 것이다. 최명익은 김일성에게서 이론가 현혁에게 없던 삶의 생동감을 발견한 것 같다. 사회주의자이자 항일 민족주의자였던 김일성에게서 '바깥 것(이론)'의 토착화를 읽어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를 '구원'이라 여겼던 것 같다.
그토록 치열하게 지식인의 존재와 길을 고민했던 최명익이 도달한 김일성이라는 구원. 아이러니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 책의 책임 편집자 신형기는 최명익의 작품을 근대의 속도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최명익이 단일한 목적론의 역사에 열광한 것은 '필연'이었다. 근대적 속도는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든다. 모든 것이 급변하는 사회에서 지식인은 너무 쉽게 '낡은 것'이 돼버린다. 그래서 지식인은 당황하며 길을 잃는다. 이 파멸적인 복잡성 속에서는 단순한 세계해석만이 구원이다. 삶과 세상의 복잡다단함에 주저앉은 최명익은 단순하고 직선적인 목적론적 역사관이 내민 손을 마다할 수 없었다. 그것만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삶의 복잡다단함을 외면한 채 단일한·단순한 세계해석에 자신의 삶과 정신을 의탁한다. 그들이 구원을 발견하는 곳은 제각각이겠으나, 최명익의 길이 그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극단적인 목적론적 서사의 세계화라는 지금의 화두(단순하고 직선적인 구원서사는 특정 이념과 세력만의 일이 아니다)가 이를 증명한다.
이렇게 본다면, 최명익의 궤적은 단순히 지식인의 것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불안과 파멸, 자기모순 속에서 증발해버리는 윤리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지식인은 그저 조금 더 예민하게 세상을 감각할 뿐, 특별히 윤리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소리다. 나는 여기서 최명익의 현대성을 읽었다. 지금의 나는 그저 구원이 저토록 납작하고 단순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 〈비 오는 길〉에서 병일이 내렸던 결단을 반복할 뿐이지만, 엉터리 구원에 순진한 낭만으로 대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조금은 서글프기도 하지만, '아직은' 단순한 구원에 스스로를 맡기지 않았다는 것에 위안을 느끼기도 했다. 최명익의 궤적은 나름대로의 치열함을 인정받아야함이 마땅하나, 여기에는 이를 반면교사 삼아 오늘을 성찰하는 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결심이 동반되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