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소시민의 탄생

채만식. 《채만식 단편선-레디메이드 인생》(문학과지성사, 2004)

by rewr

국가 없는, 레디메이드의 세상


풍자는 채만식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다. 때로는 시니컬하게,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때로는 변명하듯 조심스럽게. 채만식의 풍자가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은 국가·자본의불합리다.


<논 이야기>의 주인공 한생원은 빈둥거리다 빚이 쌓여 자신의 땅을 일본인에게 팔아버린다. 그러고는 큰소리친다. ‘일본놈들’이 쫓겨나면 그들에게 판 땅은 다시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고. 소설은 오랜 세월 이어져 온 한생원의 믿음이 처참히 박살나는 극적인 결말로 나아간다. 그의 어리석음을 한껏 비꼰 후, 소설은 묻는다. 무엇이 한생원을 그리 만들었냐고.


국가는 단 한 번도 한생원에게 기댈 구석이 되어준 적이 없다. 그래서 광복을 대하는 한생원의 태도는 시큰둥하다. 그에게 “나라라고 하는 것은 내 나라였건 남의 나라였건 있었댔자 백성에게 고통이나 주자는 것이지, 유익하고 고마울 것은 조금도 없는 물건이었다.” 독립이 된다고 해도 “가난한 농투성이가 느닷없이 부자장자 될 이치가 없는 것”이고, 농민을 핍박하는 ‘권세 있는 양반들’은 이름만 바꿔 다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언제나 불공정한 경제 구조의 충실한 조력자였다. 한생원이 독립에 시큰둥한 이유다. 채만식의 풍자가 깊어지는 지점은 이 지점이다. 국가의 무능과 불공정한 경제구조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미 간파한 한생원조차, 독립을 하면 일본인에게 팔았던 땅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만큼은 놓지 못한다. 그가 게으르고 욕심만 많은 탓이기도 하지만, 회의적이나마 광복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약삭빠른 투기꾼들이 한생원의 마지막 기대를 철저히 짓밟는다. 일제 패망을 일찍이 눈치챈 그들은 조선을 떠나는 일본인의 땅을 헐값에 사들여 주인 행세를 한다. 이들로 인해 한생원의 꿈은 완전히 끝장나고, 그의 ‘어리석음’은 '진실'이 된다. 한생원의 어리석음은 그 자신의 것인가 국가와 경제구조 때문에 생겨난 것인가?


<논 이야기>의 풍자는 <미스터 방>에서도 이어진다. 주인공 방삼복은 독립된 후에도 “우라질! 독립이 배부른가?”라고 비꼴 뿐이다. 그러던 그가 벼락출세한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닌 탓에 영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이유로 미군 소위의 통역사가 된 것이다. 하지만 방삼복은 그 권세가 원래 제 것이었던 마냥 까불다가 모든 것을 날린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방삼복의 몰락이 그의 허영 때문인지, 아니면 국가·사회·민족 대신 미군에게 빌붙는 것을 통해서만 ‘상승’할 수 있었던 사회 구조 때문인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논 이야기>와 <미스터 방>의 풍자가 국가의 부재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레디메이드 인생>은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을 파고든다. <레디메이드 인생>의 두드러지는 서사는 인텔리의 비극이다. 소설은 큰 뜻을 품은 인텔리들이 일을 하지 못해 빈곤하다는 시대적 배경과 이로 인해 인텔리가 겪는 내면의 고뇌를 굉장히 섬세하고 날카롭게 조화시킨다.


주인공 P는 돈, 여자, 직업에 관한 망상을 반복한다. 갑자기 큰돈이 생기길 바라다가도 당장 월세 낼 돈만 있으면 좋겠다 싶고, 자유롭고 의미 있는 직업을 꿈꾸다가도 정작 돈만 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식이다. P는 현실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생각들을 헛되이 반복한다.


<논 이야기>와 <미스터 방>에서 던진 질문을 다시 던져보자. P의 고난은 인텔리 특유의 허영과 현실감 없음 때문일까? 이번에도, 그렇지 않다. 진짜 문제는 레디메이드(기성품) 인생을 넘치도록 양산한 사회·경제적 구조에 있다. 레디메이드들은 “아무 때라도 저편(자본가)에서 필요해야만 몇씩 사들여” 가는 존재일 뿐이다.


모든 개인은 자본가의 호출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좁은 밥벌이 문을 통과하기 위해 다른 레디메이드들과 경쟁해야 한다. P가 어떤 개별적인 장점을 갖고 있는지, 그가 어떤 뜻을 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즉시 ‘사용’될 수 있는 상태로 준비되어 있는지의 여부만이 중요하다. 이렇게 본다면, P의 고난은 인텔리 특유의 허영과 자의식 과잉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두를 레디메이드로 만들어버리는 근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본격화 때문이기도 하다.



근대적 혼란, 길 잃은 소시민


모든 삶이 레디메이드로 전락했지만 국가는 이들의 기댈 곳이 되어주지 못했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시대의 관찰자였던 채만식은 시대의 한복판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것 같다. <낙조>, <쑥국새>, <당랑의 전설>, <치숙>, <민족의 죄인>에서 그 고뇌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낙조>의 주인공 ‘나’는 주변 인물들 사이에서 시대의 어지러움을 체감한다. 황주 아주머니는 무일푼으로 서울에 와 자식을 키우고 성공시켰지만, 해방 후 모든 것을 빼앗겼다. 그는 이승만이 공산당을 쓸어버리면 다시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녀의 첫째 아들 재춘은 야심만만하고 기회주의적인 관료조직의 일원이다. 친일 경찰로 승승장구하지만, 해방 이후 지역민들에게 처참하게 맞아 죽는다. 둘째 아들 영춘은 형의 죽음 이후 군인이 된다. 그는 이승만을 지지하기는 하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의 자주다. 남이든 북이든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오롯이 혼자 서기를 바란다. 막내 춘자는 ‘나’와 서로 연애감정을 느끼지만 ‘나’가 연애라는 낯선 감정을 거부하자 상처받는다. 이후 미군과 연애를 하고 결혼하지 않은 채로 임신을 한다. 춘자는 근대적 연애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다.


‘나’ 주변의 인물은 모두 근대, 식민지, 독립, 이념 대립, 자유연애의 흐름이 솟구치고 중첩되던 과도기를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반면, ‘나’는 학교 선생님으로 무탈하고 소박하게 살아가고자 할 뿐이다. 그래서 이들을 마주할 때마다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미래의 가능성에 자신을 강력하게 투신하는 주변 인물에 비해 자신이 뒤처져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나아갈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현재에 머뭇거린다. 국가의 부재를 살아가는 레디메이드의 지극히 소시민적인 불안이다.


<치숙>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은 마르크스주의에 빠져 집안을 내팽개친 아저씨를 비난한다. 하지만 화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 역시 일본인에게 빌붙는 한심한 작자일 뿐임을 알게 된다. 이 이중의 풍자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친일 사이에서 배회하는 소시민의 방향상실을 읽어낼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와 친일 모두 소시민의 삶에 맞닿아 있는 선택지가 아니다. 둘 다 풍자의 대상이다. 레디메이드 소시민에게는 선택할 만한 미래가 없다.


친일 행위에 대한 작가의 참회로 읽히는 <민족의 죄인>도 앞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은 다른 독해가 가능해진다. 채만식은 작품에서 일제 말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한 참회와 변명을 번갈아 늘어놓는다. 그는 친일이 분명 잘못된 일이지만 그 잘못을 따지는 일은 계급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부유한 도련님은 친일 신문사를 때려치울 수 있지만 가난한 기자는 그럴 수 없다, 작가로서 사회적 유명세를 타긴 했지만 그 역시 소시민이었기에 일제의 고문과 압박 앞에 ‘민족의 죄인’으로 미끄러지기 쉬울 수밖에 없었다, 등등.


요컨대, 소시민적 공포에 휩쓸려 적극적 저항자가 되지 못한 모든 사람을 부역자로 몰아붙일 수 있냐는 것이다. <치숙>과 마찬가지로, 그는 시대를 예민하게 읽고 느꼈지만,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지는 못한 채 큰 혼란을 겪었다. 친일도 그 연장이다. 그는 머뭇거리다 친일이라는 흐름에 휩쓸려버렸다. 채만식의 ‘참회’ 이면에는 그 역시 시대의 혼란 앞에 방황하는 소시민이었음을 강변하는 억울함이 묻어 있다. 판단하기 쉬운 문제는 아니지만, 그의 '변명'은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다.



지나가버린 과거


<낙조>와 <치숙>, <민족의 죄인>이 혼란한 시대에 길을 잃은 소시민의 비애를 다뤘다면, <당랑의 전설>과 <쑥국새>는 지나간 시절과 작별하는 작가의 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쓸쓸함과 씁쓸함이 담겨 있다.


<당랑의 전설>은 제목에서부터 수레바퀴 앞 사마귀의 비극적인 운명을 떠오르게 한다. 원석은 잘나가는 지주 집안의 큰아들이다. 집안 살림이 점차 쪼그라들자 이를 다시 일으키려 여러 사업을 벌였지만 모두 실패하고, 결국에는 미두(쌀로 하는 투기)꾼으로 전락한다. 고향집에서는 부모, 형제, 자식이 원석을 간절히 기다리지만 그는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차마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 결국 관리들이 집에 들이닥쳐 집안의 물건을 경매에 넘기려고 한다. 원석의 아버지 박진사는 그들에게 사정사정하다가 일이 풀리지 않자 도끼를 들고 나와 그들이 압수한 베틀을 내리찍는다.


박진사의 도끼질은 식민지의 수탈, 하부구조의 근대적 전환에 발맞추지 못한 자들의 마지막 울분이다. 하지만 그 울분조차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 박진사 댁 사람들은 레디메이드조차 되지 못하고 근대 자본주의 질서에 밀려 무대에서 퇴장할 수밖에 없다.


<쑥국새> 역시 전근대적 시골 마을의 비극을 다룬다. 주인공은 다른 남자와 연애하던 여자와 억지로 결혼한 남자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전근대적 혼인의 암울한 미래를 예감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근대적 연애와 전통적 결혼 관념의 충돌이 빚은 비극이다. 소설의 시작과 끝은 자살한 아내의 무덤을 찾아 추모하는 남자의 모습을 담는다. 채만식은 따뜻하지만 쓸쓸한 심정으로 남자의 추모를 그린다. 여자의 죽음을 풍경으로 하는 남자의 쓸쓸함으로 한 시대에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채만식이 지나가 버린 시대에 울적함을 느끼는 이유는 분명하다. 소시민은 확신을 갖고 미래로 나아갈 수 없고, 레디메이드 운명을 거부할 수 없다. 즉 그들에겐 현재와 미래가 없다. 그런데 이제는 돌아갈 과거마저 없다. <당랑의 전설>과 <쑥국새>는 비극적인 현재와 미래를 거부하고 과거에 머무르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미 시대는 변했고, 누구도 이를 돌이킬 수 없다.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다루는 두 작품에 아릿함의 정서가 묻어나는 이유다.



미래를 포기하지 않고 현재를 기록한 예민한 관찰자


식민 지배, 국가 역할의 부재,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도입, 레디메이드의 탄생, 해방, 이념의 대립, 근대적 연애관계와 전통적 혼인관계 등등. 채만식은 이 모든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갈등하는 혼란의 시대를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읽었다. 그리고 그 예민함에 괴로워했다. 새로운 시대가 왔지만 우리는 고작 레디메이드가 되었을 뿐이고, 방황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도 자신의 미래를 의탁하지 못한 채 갈대처럼 휘둘렸다.


채만식은 그저 이 모든 것을 기록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는 비판의식은 충만했지만 나아갈 길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레디메이드 소시민 앞에 놓인 수많은 선택지 중 어떤 것이 정답인지 감히 판단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독히 근대적인 혼란의 한가운데서, 채만식은 자신이 그려내는 근대적 풍경의 일부가 되어 함께 방황하고 휩쓸렸다.


조심스레 말하자면 꽤나 겸손하다고 할 만하고, 과감하게 말하자면 섣불리 젠체하지 않은 양심적인 작가라 할 만하다. 나는 여기서 채만식의 현대성을 찾았다. 거대한 혼란 앞에서 길을 잃더라도, 이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는 그의 태도에서 말이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내팽개치지 않았다. 나아갈 길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그 시대를 살아갔고, 기록했다.



채만식이 ‘창녀’를 활용하는 방식


채만식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풍자는 ‘창녀’의 비유다. <레디메이드 인생>에서는 정조를 잃은 후 자살한 여성과 하룻밤에 "20전도 좋소"라고 말하는 ‘갈보’를 비교한다. 처음에는 갈보의 타락을 비난하지만 이내 방향을 튼다. 갈보도 노동으로 돈을 버는데 인텔리인 자신은 그러지도 못한다고 자조하는 것이다. ‘갈보보다 못한 인텔리’의 구도로 풍자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다.


<민족의 죄인>에서 자신의 매문賣文 행위를 반성할 때도 마찬가지다. “창녀가 가정으로 돌아왔다고 그의 생리生理가 숫처녀로 환원되어지는 법은 절대로 없듯이” 자신의 매문 행위도 돌이킬 수 없는 죄다. ‘되돌릴 수 없는 더럽혀진 창녀’는 참회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도구다.


<낙조>의 주인공 ‘나’는 한때 연애감정을 느꼈던 춘자가 미군에게 몸을 팔고 애까지 뱄음을 비난한다. 춘자가 반발한다. “외국놈한테 정조 팔아먹는 년이 더러면, 외국놈한테 절갤 팔아먹는 서방님네들은 무엇일꾸?” 몸을 판 것이 나라를 팔아먹은 죄보다 중하냐는 것이다. 이번에도 ‘창녀’의 비유는 ‘나’의 부끄러움을 증폭시키는 수단이다.


채만식의 ‘창녀’ 비유는 당시 여성 젠더의 내용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자기 밥벌이도 못하는 남자, 민족을 배신한 남자, 나라를 팔아먹은 남자들은 모두 창녀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들에게 여성은 식민지·자본주의 이전의 ‘순수’다. 처음에는 가장 순수한 존재마저 몸을 팔고 타락했음을 개탄하지만, 이내 그들의 생존력, 그들보다 큰 자신의 죄로 인해 부끄러워하는 식이다. ‘순수한 여자’와 ‘타락하고 무능한 남자’의 구도에서 풍자의 효과는 극대화되고 부끄러움은 증폭된다.


근대적 질서의 도입을 가장 예민하게 읽어낸 작가조차 여성은 근대 이전에 머무르는 순수한 존재라는 관념을 작품에 재활용한 것이다. 물론 채만식만 탓할 순 없다. 그의 '뒤처진' 젠더의식은 '현실'이기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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