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섭, 《만세전》(문학과지성사, 2014)
《삼대》에서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시간성이 문제다(《만세전》이 더 먼저 나온 작품이지만, 여기서는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의 순서를 따랐다). 《삼대》의 주인공 삼부자는 각기 전통적 시간, 질곡의 시간, 근대의 시간을 대변했고, 여자들은 이들 근처를 기웃거리며 기생했다. 《만세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남자들은 시대의 무게를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가지만, 여자들은 현실의 질곡에 갇혀 죽거나 모순에 빠진다.
〈두 출발〉(1927)은 어이없는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부잣집의 머슴으로 일하는 원석과 그 친구들은 떡을 얼마나 먹을 수 있는지를 두고 내기를 벌인다. 그러다 사달이 난다. 과식으로 그중 한 명이 죽어버린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원석과 부인은 집에서 쫓겨나 서울로 향한다(부인은 집에 남으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망설이다 결국 남편을 따라나선다). 원석의 주인도 평소 그들을 못 마땅히 여기던 일본 경찰들에게 시달린다. 그러다가 양복을 입고 다니며 사람을 만나면 일이 해결된다는 말에 두루마기를 벗고 양복을 입기 시작한다. 봉건적 삶을 영위하던 두 남성이 각자 도시 노동자와 양복쟁이로 변신한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둘은 근대적 인간으로 새로이 출발한다.
‘의도치 않은 근대인으로의 출발’은 일제에 식민 지배를 당하는 조선의 현실과 닮았다. 〈만세전〉(1922)은 보다 직접적으로 일제와 조선 사이의 시차와 근대적 주체의 문제를 다룬다.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주인공 이인화는 부인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조선으로 향한다. 그러나 이인화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카페 여급인 시즈코를 비롯한 몇몇 여성을 만나며 여유롭게 조선으로 향한다.
〈만세전〉에서 이인화가 여러 여성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 교차된다. 이인화를 감시하며 가방과 소지품을 검사하는 일본 경찰, 조선인 노동자를 팔아 큰돈을 남길 수 있다는 일본인들의 대화 등등. 민족·국가의 상황에 별 관심이 없던 이인화는 이 과정에서 조금씩 무언가를 각성해나간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스스로의 길을 찾아내고 개척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한 의무가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처는 기어코 모진 목숨을 끊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남편 되는 나에게, ‘너 스스로를 구하여라! 너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여라!’는 귀하고 중한 교훈을 주고 가기 때문이올시다.”
아내가 죽은 후,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에 인화가 시즈코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별다른 목적 없이 유유자적하며 이 여자 저 여자에게 치근대던 이인화는 아내의 죽음을 계기로 불현듯 자신의 ‘사명’을 깨닫는다.
《삼대》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염상섭은 남성의 시간에 여성을 들러리 세운다. 죽기 직전의 상태라는 전언으로만 등장한 후, 끙끙 앓다가 맥없이 죽는 이인화의 아내는 일제에 시름하는 조선의 현실(이인화가 각성하는 계기)을 상기시키는 은유로써만 활용되고, 조선인 어머니를 놔두고 일본인 아버지를 찾아 일본으로 가겠다는 부산의 기생은 이인화가 민족적 열등감을 성찰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는 식이다. 여성 캐릭터가 이인화가 민족적·근대적 주체로 각성하는 수단으로써만 소모되는 것이다.
요컨대, 〈두 출발〉과 〈만세전〉의 남자들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비극적 운명이라는 위기(식민지 조선) 앞에서 여자들을 들러리 삼아 근대적·민족적 주체로 새로이 태어난다.
그렇다면 여자들은 어떨까? 〈해바라기〉(1923)와 〈미해결〉(1927)의 여자들은 〈두 출발〉, 〈만세전〉의 남자들과 너무나 다른 길을 간다.
〈해바라기〉의 주인공 영희는 남다른 예술가 자의식을 가진 신여성이지만 현실과 타협하여 결혼을 선택한다. 결혼식 와중, 영희는 “지금이라도 부모나 형제가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하루 세 끼씩 먹여준다 하면 결혼할 필요는 없어지겠지……”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는 그런 영희를 품지 못하기에 그녀는 결혼할 수밖에 없다. 영희는 남편이 그나마 영희의 사상과 삶을 존중해주는 사람이라는 것에서 위안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
결혼을 마친 영희와 남편은 신혼여행을 떠난다. 모든 것을 영희가 계획했기에 남편은 목적지가 어딘지 모른다. 영희는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왜 여행지를 감췄는지를 남편에게 털어놓는다. 영희는 본격적인 결혼생활을 시작하기 전, 과거 진정으로 사랑했던 옛 애인의 묏자리를 살피고자 했다. 다행히도 남편은 그런 영희를 이해해준다. 영희는 옛 애인의 묘지에 비석도 세우고 제사까지 치러준다.
의아한 것은 〈해바라기〉의 전개방식이다. 작품의 전반부에는 현실적인 이유로 원치 않는 결혼을 하는 영희의 내면이 굉장히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작품이 전개되면서 영희 내면의 긴장은 엉뚱한 곳으로 향한다. 예술가로서의 강한 자의식을 가진 영희가 정작 향하는 곳은 죽은 애인의 묏자리다. 예술가이자 신여성이었던 영희가 신파 속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물론 ‘자유연애’, ‘사랑’ 등은 그 자체로 근대적 신여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하지만 〈해바라기〉에서 자유연애와 사랑은 ‘과거’ 일뿐이다. 현재 영희의 곁에는 그녀의 과거마저 '너른 마음으로' 포용하는 남편이 있다. 영희의 사랑 서사를 '결국 가정으로 돌아오는 신여성'으로 독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무엇보다 영희가 옛 애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작품 초반 섬세하게 묘사됐던 예술가의 내면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 문제다. 신여성이자 예술가인 영희의 주체성은 소거되고 죽은 애인의 마지막까지 보듬는 비련의 여주인공만 남는다. 겉으로는 영희가 모든 걸 계획하고 통제한다는 서사가 전개되지만, 정작 영희의 ‘자율적’ 결정은 전통적 젠더 각본이 한정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해바라기〉의 한계다.
〈미해결〉의 정순은 조금 더 극적이다. 명망 잇는 기독교 집안인 김장로의 아들에게 시집 온 정순은 사실 따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하지만 정임의 부모는 임신한 사실을 모른 채 딸을 시집보냈다. 정임의 배가 점점 불러오자 몇몇 교회 사람들이 분주해진다. 정임의 ‘정숙치 못함’을 빌미 삼아 교회에서 김장로를 밀어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결국 정임의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를 두고 교회 내부의 갈등이 폭발한다. 사람들은 진실을 묻기 위해 정임에게 향한다. 하지만 정임은 이미 아이를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태였다. 이후 편지가 발견된다. 정임이 사랑했던 남자는 다른 여자와 붙어먹었다는, 시댁에 폐를 끼치더라도 진실을 숨기고 김장로 반대세력의 말을 따르라는 정임 아버지의 편지였다.
정임은 사랑할 줄 아는 근대적 여성이었지만, 그 사랑으로부터 배신당하며 끝내 봉건적 현실로부터 사형선고를 받는다. 정임의 ‘부정의不正義’가 단죄되어야만 교회와 집안의 평화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세상이 굴러가기 위해서는(〈만세전〉의 이인화가 근대적·민족적 각성을 하기 위해서는) 불편한 진실을 품은 여성이 논개가 되어 ‘봉건적 질서’를 품은 채 죽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작품의 완성도, 힘 있는 전개와는 별개로 염상섭 문학(혹은 염상섭의 얼굴이 대표하는 한국 근대문학)의 젠더화된 시간성은 비판적으로 성찰되어야만 한다. 남자가 부조리한 운명 앞에서 민족적·근대적 주체로 거듭나는 동안 여자는 들러리 서거나, 전통적 성역할을 반복하거나, ‘봉건’이라는 오명을 쓰고 죽어야만 한다면, 이 결과로 탄생한 남성 주체성을 긍정할 수 있을까?
고작 이런 것이 민족적·근대적 주체성이라면, 남성 주체성은 썩은 모래성일 뿐이고 여성의 근대는 시작조차 못한 셈이다. 잘못 꿰어진 근·현대 역사의 첫 단추는 ‘실패한 친일파 청산’이 아닌 ‘젠더화된 주체성’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역사 바로 세우기’도 역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슬프지만, 나는 여기서 염상섭의 현대성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