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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Dec 18. 2023

연애와 연대 사이의 사랑

〈사랑은 낙엽을 타고〉

6★/10★


  2023년, UN 자문기구에서 발표하는 세계행복보고서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핀란드를 꼽았다(한국은 OECD 가입국 중 최하위권인 57위다).* 무려 6년 연속 1위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해서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을 테다. 지상에 천국은 존재하지 않고, 행복은 상대적인 개념이니까. 핀란드 헬싱키를 배경으로 하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핀란드의 거장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작품이다. 감독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핀란드 노동계급의 삶을 비춘 영화로, 올해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고, 국제비평가연맹이 선정한 2023년 최고의 영화로 꼽히기도 했다.


  안사는 마트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홀라파는 건설 현장에서 일한다. 물건을 정리하는 안사와 기계로 무언가 작업을 하는 홀라파의 표정은 건조하고 권태롭다. 색깔에 비유한다면 무채색의 느낌이다. 기분 좋은 일은 없어 보이고, 조금은 염세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안사와 홀라파는 한 술집에서 처음 만나 호감을 느낀다. 통성명도 없이 데이트를 이어가던 둘. 그러던 중 안사가 홀라파에게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건네며 그를 집으로 초대한다. 그런데 홀라파는 그만 그 종이를 잃어버린다. 홀라파는 둘이 함께 있던 곳을 돌며 안사를 수소문하고, 홀라파의 연락 없음에 실망하고 있던 안사를 다시 만난다.     


  영화에서, 노동 현장에서의 생기 없는 표정과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때의 표정은 분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 대비는 서로 다른 사람에게서가 아닌, 안사와 홀라파 안에 함께 존재한다. 이들은 일할 때는 활력을 잃고, 사랑할 때는 기운이 샘솟는다. 불안정한 직장에서 당장 눈앞의 생계비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과 사랑에 빠져 설렘과 애타는 마음으로 감정이 들끓는 사람은 한 사람이다.     



  이토록 선명한 대비의 공존은 둘의 사랑을 ‘연애’인 동시에 ‘연대’로 만들기도 한다. 안사와 홀라파는 비정규직이다. 그들의 고용 상황이 불안정하다는 의미다. 깐깐하고 까탈스러운 관리직원에게 자그마한 트집이라도 잡히면 바로 해고다. 실제로 둘의 직업은 수시로 바뀐다. 안사는 마트에서 버리는 물건을 챙겨가다가 해고당하고, 고용주가 마약 거래를 하다가 체포돼 직장이 사라져 일거리를 잃는다. 홀라파는 항상 조금은 술에 취해 있는 것이 걸려서 해고당하고, 장비 노후화로 산재를 당해도 그 원인이 술로 돌려져 해고당한다. 그럼에도 빈털터리인 둘은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혼자 있을 때는 흐릿하게만 보이던 미래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연애와 연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을 전하는 라디오 방송이 반복해서 흘러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듯싶다. 라디오가 전하는 전쟁의 참상은 채널을 바꾸거나 꺼버리고 싶을 만큼 끔찍하지만, 안사와 홀라파는 서로 다른 곳에서 같은 방송을 들으며 같은 감정을 느낀다. 커다란 폭력은 사람들의 유대와 연대, 일상을 파괴하며 개별 인간을 단절시키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위축된 채 서로 떨어져 있다는 공통적인 처지에서 무언가를 벼려내기도 한다. 안사와 홀라파가 그러하듯이.     



  그러나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도 연출이다. 투박하고 고전적인 화면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는, 종종 능청스럽고 뻔뻔하며 동시에 비장한 대사와 만나 웃음을 자아낸다. 사회적 체면이나 가식 따위에 대한 고려 없이, 때로는 ‘망상’에 가까운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인물들은 영화가 그려내는 핀란드 노동계급의 삶과 그럴듯하게 어우러져 잔잔하면서도 파격적인(?) 코미디의 효과를 자아낸다. 산재로 병원에 입원한 홀라파에게 안사가 키스한 후, 그가 눈을 뜨는 장면은 이와는 또 다른 패러디의 효과를 낸다. 연애와 연대 사이의, 안사와 홀라파의 사랑은 생기 없는 표정으로 일상을 버텨내는 사람들의 삶이 바로 그들이 거주하는 세계로부터 반전될 수 있음을 무채색 세계에 따뜻한 유머를 곁들여 알려준다.     


     

*https://www.joongdo.co.kr/web/view.php?key=20231210010002697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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