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김성웅/일본/2023/125min
▶“많은 일이 있었다. 잘 살아왔다. 인간은 강하다.”
“많은 일이 있었다. 잘 살아왔다. 인간은 강하다.” 이 짧은 글은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엄청난 무게감을 얻을 수 있다. 재일교포 1세인 서유순 할머니의 사연을 들었을 때, 저 사이사이에 깃든 기나긴 세월과 무수한 몸과 마음의 기억, 여기에 수반되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전율이 일었다. 국적도 없이 낯선 곳에서 삶을 꾸리며 정착한 재일교포 1세 여성들은 평생 생계를 꾸리다 80이 넘은 후에야 은퇴한 후 공동체 학교에서 배운 것들로 자기 삶을 털어놓는다. 이 영화는 할머니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생의 막바지에 자기 삶을 회고한 결과물을 덤덤히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바다를 넘나든 할머니들의 삶과 기억의 생명을 연장한다. 오키나와 할머니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들의 경험이 깊이 공명하는 점도 인상적이다. 혐한 시위와 일본의 우경화에 맞서 “전쟁이 얼마나 비참한지 우리는 안다”라고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는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김미례/한국/2023/82min
▶그들 자신이 우물이 된 여자들의 이야기
지독하게 가난한 시절(70년대), 철거민들이 모인 바닷가를 마주한 인천의 한 마을에 여성들이 들어왔다. 그러고는 탁아소를 꾸리고, 지역 여성과 연대하며, 교육 운동을 전개했다. 열 개의 우물이 있던 이 마을에서, 이 여성들은 그들 자신이 우물이 되어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고 함께 가진 것을 부풀렸다. 이 영화는 각자 하나의 책이 될 만한 이야기를 품은 이들 여성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기득권화된 운동권의 폐해에 대한 고발이 쏟아진다. 그러나 나는 어느 유명 대학 총학생회장 출신의 정치인이 유력 정치인이 되고 기득권을 누렸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지역에서 공부방을 만들고 헌신한 여성들이 권력을 잡아봤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가, 그들의 하나가 되어, 지금도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청산’ 대상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들이 지나온 시기에 대한 서사는 더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
파멜라 호건/아이슬란드, 미국/2024/71min
▶지난 세대 위대한 승리의 기록
아이슬란드는 손꼽히는 성평등 국가다. 여기에는 1975년의 여성 파업이 큰 몫을 했다. ‘중산층 주부’가 여성이 꿈꿀 수 있는 행복한 미래의 전부이던 시절, 아이슬란드의 여성들은 전국적인 파업(‘파업’이란 말에 거부감을 보인 우파 여성 단체의 반발로 공식적으로는 ‘휴일(day off)’이라 불렸다)을 조직했다. 1975년 10월 24일로 파업일이 선포되자 전국의 여성들이 들썩였다. 수많은 여성이 각자의 자리에서 고조되거나, 반신반의하거나, 불안해하거나, 불만을 표시했다. 무언가 폭발하기 전의 꿈틀거림이 온 사회에 요동쳤다. 아이슬란드의 여성들은 결국 여자들의 연결망(노조, 사적 관계, 전단지 등)을 최대한으로 활성화해 90퍼센트에 달하는 여성이 파업에 참여하는 대성공을 이뤄냈다. 사회는 마비되었고, 여성 파업을 조롱하던 남자들은 이날을 ‘긴 금요일’이라 부르며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 같은, 지난 세대 페미니즘의 가장 커다란 승리의 순간이 당시 참여자들의 회고로 재구성하는 이 영화는 현세대 페미니스트에게 기분 좋은 에너지를 전한다. 운동의 목표와 과제, 방법론이 다를 수밖에 없는 지금, 그들에게서 무엇을 배우고 계승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