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엠마 허프 홉스, 릴라 바르기스|Australia|2025|87min |Korean Premiere |15+ |‘메리 고 라운드’ 섹션
▶퀴어 농담이 난무하는 즐거운 성장 영화
레즈비언이 우주의 패권을 장악하고 이성애자 백인 남성은 문자 그대로 납작하게 생김새가 변해 우주의 한쪽 구석에서 여전히 ‘여자 꼬시는 방법’을 연구하는 먼 미래. 레즈비언 왕국의 공주 사이라는 늘 풀이 죽어 있다. 화려한 두 어머니와 달리 인기도 없고, 자존감도 없어서 세간에서 지루하고 따분한 공주라 혹평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연인이 이성애자 백인 남성들에게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사이라에게 무언가를 뜯어내기 위한 인질극이다. 사이라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전 연인을 다시 현 연인으로 만들기 위해 모험을 떠나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자기혐오를 걷어내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깨달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이 얻은 자존감을 바탕으로 레즈비언 왕족의 무기인 라브리스를 손에 넣고 스스로 거듭난다. 심지어 공허한 남성성에 심취한 이성애자 백인 남성들까지 진정한 자기애의 세계로 인도하고, 동성애의 기쁨으로 그들을 계몽시키기까지 한다. ‘인디-SF-뮤지컬-코미디-애니메이션’을 표방하는 혼합 장르로 그려낸, 퀴어 농담이 난무하는 즐거운 성장 영화다.
한제이|Korea|2025|94min |World Premiere |G | 폐막작
▶백반집과 돌봄, 연결, 공동체를 ‘진부하게’ 연결하기
동네 백반집. 이 말은 그저 동네에서 장사하는 식당 이상의 함의를 가진다. 그곳이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식당 사장이 ‘오지랖’ 넓게 손님과 이웃을 챙기는 곳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이 영화는 어느 날 실종된 ‘모두의 어머니’ 백반집 사장을 일타 강사 딸과 그녀의 동네 ‘의붓’ 형제들이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그러나 납치 사건의 비밀이 고작 상속받지 못한 어느 못난 남자의 불만 때문이었다는 사건 개요는 조금 싱겁다. 백반집과 돌봄, 연결, 공동체의 키워드와 너무 직접적이고 투명하게 대비되는 범인의 맥락에 김이 빠지는 것이다. 전형적인 상상력을 넘지 못하고, 심지어 익숙하게 갱신하지도 못하는 아쉬움이랄까. 부천의 폐막작이라면, 조금 더 신선한 무언가를 보여줄 것이라 기대했다.
브루노 포르자니, 엘렌 카테|Belgium, Luxembourg, Italy, France|2025|87min |Asian Premiere |19+ |부천 초이스: 장편
▶끝내 풀지 못한 수수께끼에서 연유한 매혹적인 장르의 이미지
이 영화는 어느 늙은 스파이의 혼란을 통해 과거와 현재, 진짜와 가짜, 영화와 현실, 장르의 경계를 제멋대로, 능숙하게 넘나든다. 남자가 과거에 해결하지 못한 수수께끼는 여전히 실재하는 걸까, 아니면 그저 어느 늙은 남자의 정신착란일까? 수도 없이 피부 가면을 벗는 사람들에게 ‘진짜’ 얼굴이 있기는 할까? 진지하게 피 튀기며 싸우는 사람들을 비추던 프레임이 확대되자 갑자기 웃음을 지으며 초콜릿이 들어간 특수 제작 피의 맛을 논하는 배우들은 남자의 고난이 그저 연출된 무언가임을 폭로하는 것일까? 설령, 영화로 연출된 혼란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과연 ‘없는 것’ 취급할 수는 있을까? 가장 긴박한 순간에 화면이 만화로 바뀌어 전개되는 장면들은 이 혼란스러운 모험에 어떤 영화적 질감을 부여할까? 매끈히 이어지지 않는 이미지와 시퀀스의 연속에서 관객은 어느 순간 헤매다가도 매혹의 순간에 진입하게 되고, 남자가 끝내 풀지 못한 수수께기의 혼란에 동참하게 된다. 영화제는 이 영화를 ‘유로 스파이 장르에 대한 아트하우스 스타일의 열정적인 오마주’라고 설명했다.
서극|China|2025|147min |Korean Premiere |12+ |매드 맥스
▶무림 고수와 공권력 사이의긴장에 주목하면
송나라 출신으로 몽골에서 자라 강호의 고수들에게 무공을 익힌 곽정. 송‧금‧원 교체기라는 극심한 시대 혼란을 배경으로, 영화는 다중 정체성을 지닌 곽정의 무용담과 사랑 이야기를 펼쳐낸다. 흥미로웠던 것은 무림 고수들과 공권력의 긴장과 공존이었다. 장이머우는 〈영웅〉, 〈연인〉 등의 작품에서 무림 고수와 중앙집권적 군대를 대비시켜, 전자를 후자의 등장을 위해 무대를 비워줘야 하는 존재, 즉 낭만적 퇴물로 그렸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곽정은 자신을 거둬준 몽골의 칸에게 감사해하면서도 그가 송나라를 통로 삼아 금나라를 침략하려는 일을 막아서고, 동시에 자신의 비기祕技를 노리는 또 다른 무림 고수 서학에게서 칸을 지켜내기도 한다. 이렇게 신의는 두터워진다. 자기 소신과 원칙을 지키는 무림 고수와 공권력을 독점하는 국가가 어떻게 공존 가능한지를 둘 중 누구 하나 욕보이지 않으면서 그려낸 것이다. 완성도 측면에서야 앞서 언급한 장이머우의 영화들과 비할 바가 아니지만, 절대적 두 강자의 길항이 만들어내는 긴장의 측면에서는 계속 눈길이 간 영화였다. 김용 원작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