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 법인 근무 시 몇 번 만났던 꽤 점잖아 보이는 거래선 사장이 있었다. 그런데 그 거래선 직원들은 물론, 우리 법인 직원들도 그를 부를 때는 항상 Boss라고 불렀다. Boss라면 대장, 상사, 두목 뭐 그런 의미의 영어 단어인데 당시 영어 호칭을 잘 사용하지 않았던 중국에서 그만은 그렇게 영어로 부르는 것이 꽤 특이한 현상이라항상 의아했었다. 하지만 어쨌든 모두가 그를 그렇게 부르니 나 역시 몇 달이 되도록 그들처럼 Boss라는 애칭 같은 호칭으로 그를 불렀다.
그런데 어느 날 직원들과 대화를 하다가 우연하게 알게 된 사실인데, 내가 영어 단어 Boss로 이해했던 그 단어는 사실 영어 Boss가 아니고 중국어로는 'Boshi'라고 발음되는 '博士(박사)'란 한자 단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한자로 '박사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인데 나는 몇 달이 넘도록 영어 Boss로 이해했던 것이다. 실제 그는 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사람이었고, 직원들은 그 학위를 존중해 박사님이라고 불렀던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오해했던 이유는 내 중국어 실력이 부족했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사실 한국어에서처럼 광둥어와 같은 중국의 남부 지역 방언들에는 r, zh, ch, sh 등과 같은 권설음(捲舌音) 발음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광둥어를 모어(母語)로 하는 광둥 사람들이 'sh'를 'ss'처럼 발음을 했던 것인데, '보쉬'로 발음되는 단어를 '보스'에 꽤 가깝게 발음을 하니 나는 영어 Boss로 오해했던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는 한심한 내 중국어 실력에 혼자 씁쓸한 미소를 짓기도 했는데, 어쨌든 뭐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니 법인의 동료들에게 그 황당하고 부끄러운 장기간의 오해를 고백하지는 않았다.
역사적으로 과거 한때 고구려나 발해 영토 일부이기도 했던 길림성(吉林省), 요녕성(遼寧省), 흑룡강성(黑龍江省) 등 중국의 동북 3성(東北三省) 지역은 우리 동포 조선족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약 18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조선족이 오래전부터 밀집해서 거주해 왔던 마을이나 도시가 이 동북 3성 곳곳에 산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물론 고구려 시절부터 그곳에 지속적으로 거주해 온 분들이라고 볼 수는 없고, 대부분 19세기 중후반 이후 경제 또는 정치적 이유로 한반도에서 이주해온 분들이다. 동북 3 성 안에서 그들의 가장 큰 집단 거주지는 역시 연변 조선족 자치주다. 그곳에만 약 80만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다 하니 중국 내 전체 조선족 인구 중에 약 45% 정도가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다른 소도시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연변의 조선족 젊은이들도 일자리와 또 보다 더 큰 기회를 찾아서 자신의 고향을 떠나 중국의 대도시로 떠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한번 고향을 떠났던 젊은이들은 좀처럼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보다 화려하고또 편리한 대도시의 삶에 적응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젊은이들이 지속 유출되는 지방 소도시들의 인구는 결과적으로 지속 감소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특히 연변 경우는 또 다른 특수한 상황도 겪고 있는데 중국 대도시로 떠나는 사람들 외에도 한국으로 떠나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수 또한 매우 많기 때문이다. 2019년 기준 한국에 와 있는 조선족이 약 53만 명이나 될 만큼 많다고한다. 그만큼 다른 도시보다 연변은 인구 감소가 더욱 빠르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중국 전체를 지배하면서 청(淸) 나라를 세웠던 만주족 고향 만주가 거의 다 한족화 되어 만주족의 흔적은 이제 좀처럼 찾기조차 어렵게 된 것과 같은 현상이 연변에서도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 시인 윤동주의 고향이고, 선구자란 가곡의 배경이었던 그 연변도만주처럼 한족화 돼가고 있는 실정이라는 말이다.
한편 동북삼성의 조선족들이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갈 때는 대부분 고향에서 상대적으로 가까운 베이징이나 상하이와 같은 중국 중북부에 있는 도시로 많이 이주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고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중국 남부 광저우로 온 조선족들도 광저우 법인 근무기간 중 꽤 볼 수 있었는데, 광저우 법인에만도 약 7~8명의 조선족 직원들이 근무를 하고 있었고그 외에도 광저우 시내에는 조선족들이 운영하는 한국 식당과 한국 식품점도 꽤 있었다.
고향에서는 가장 먼 대도시인 광저우로 온 조선족들은 물론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처럼 자신들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강제로 끌려온 사람은 결코 아니다. 단지 더 많은 기회와 더 높은 보수를 위해 스스로 판단하여 고향을 떠나 광저우까지 온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반도와 인접한 중국 동북지방의 고향을 떠나서 직항노선도 찾기가 어려워 몇 개 도시를 거쳐 항공 시간만 최소 4~5시간 이상은 소요되는 광저우에까지 와서 직장을 구하고 사업을 하는 조선족들을 볼 때는, 나로서는 왠지 모르게 힘없고 약해서 주변국에 끌려가고 당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민족의 과거 아픈 역사가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10) 생선 머리만 나오는 요리
광저우가 속한 중국 남부지역은 바닷가에 인접해 있다 보니 생선이나 해산물을 많이 먹는다. 그런데 어두육미(魚頭肉尾)라는 말이 있듯이 생선은 머리 부분이 더 맛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한국에서는 생선 머리만으로 만든 음식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하지만 광둥에서는 정말 생선 머리만 나오는 음식을 볼 수 있다.
생선 머리라는 의미의 '위토우(魚頭, 鱼头)'라는 음식인데, 이 음식을 주문하면 몸통은 전혀 없는 생선 대가리만 덜렁 나온다. 생선을 주문했는데 몸통은 하나도 없이 눈알까지도 그대로 남아있는 생선 대가리만 덜렁 나오는 것을 처음으로 보는 사람들은 아마 대부분 좀 섬찟한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 생선 머리 중에서도 아가미 부근의 볼 살이생선에서 가장 귀하고 가장 맛있는 부위로 알려져 있어, 광저우 고급 식당에 가보면 손님에게 생선 요리를 접대하면서 생선 머리 아가미 부근 볼 살을 작은 스푼으로 파내어 권하는 모습도 종종 볼 수가 있었다.
나는 소, 돼지, 닭 등 육고기는 태생적으로 먹지 못했지만, 생선은 꽤 좋아하고 잘 먹었는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생선 대가리만 덜렁 잘려 나오는 이 음식은 너무나도 징그러워서 중국에 거주하던 기간 내내 단 한 번도 먹는 것을 시도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11) 광저우 아시안 게임
2008년 8월 베이징에서 올림픽 게임이 개최된 바가 있다. 그리고 그 이후 약 2년 뒤인 2010년 11월에는 광저우에서 아시안 게임이 열렸다.
베이징 올림픽이나 광저우 아시안게임 모두에 일부 제품을 스폰서한 바 있는 우리 회사는 당시 개회식이나 폐막식 또 주요 경기 입장권을 사전 구매하여 각 법인 핵심 거래선을 초청하는 마케팅 활동을 했었다. 아울러 거래선의 사장들이 참석하니 당연히 우리 법인의 법인장들도 참석해야 했는데, 대만법인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진행되었던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 법인의 다른 주재원이 대신 참석하도록 했었다.
하지만 2010년의 광저우 아시안게임 당시에는 광저우에서 너무도 가까운 홍콩 법인에서 근무를 하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이 홍콩 거래선들과 함께 개막식에 참관하고 온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리는 곳이라 별로 가고 싶은 생각은 마찬가지였지만 워낙 가까운 곳에서 행사가 열리니 마땅한 불참 핑곗거리를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과거 2005년 6개월간 근무했던 광저우를 또다시 볼 수도 있었는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전후에도 그랬지만, 2010년 말 광저우에 다시 도착해 보니 광저우도 아시안 게임 개최 전후로 도시가 정말 많이 변해 있었다. 시내에 고층 빌딩도 훨씬 많아졌고, 도시 이곳저곳 행사를 위해 정비하고 손을 본 흔적도 뚜렷했다.
광저우 아시안 게임 개막식은 주강(珠江)이 보이는 곳에서 야간에 개최됐는데, 개막식장에서는 보이는 주강 주변 역시 대폭 정비되어 불과 4~5년 전에 보던 주강과는 비교도 할 수없을 만큼 멋진 야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또 오랜만에 광저우에 돌아오니 과거 광저우 법인 근무 시 헤매고 다녔던 정든 골목길과 거리, 가로수도 볼 수 있었고, 또 법인에서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의 반가운 얼굴들도 다시 볼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광저우 출장의 주목적인 개막식 행사 자체에는 정작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개막식 행사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의미는 아니고, 워낙 내가 그런 행사에 감흥을 잘 느끼지 못하는 성향이라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10여 년이라는 시간이 경과한 요즘에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대규모 행사에 내 돈 10원 한 푼 지불하지 않고 오직 회사 경비로 항공료, 입장료, 숙박비까지 모두 받으며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꽤 복 받은 일이었던 것 같다. 그런 행사를 보려고 멀리서 자비를 들여서까지도 굳이 찾아오는 사람들이사실 얼마나 많은가....
오랜 직장생활에 매달리다 보니 솔직히 놓친 것들도 많았고 아쉬운 것도 적지 않다. 하지만 같은 기간, 대신 다른 많은것들을 얻었고, 누렸고, 또 배웠다는 생각도 또 든다. 이미놓쳐버린 과거의 아쉬움과 미련에 집착하며 살기보다는, 그 기간 얻었던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좀 더 행복하게 이 인생을 사는 것이라는 지혜를 이제 서서히 터득해 가고 있는 것 같다.
사진) 광저우 아시안게임 개막식 모습. (2010. 11월) 우측 사진에 보면 주강(珠江)과 주강 위 불꽃놀이 모습이 보인다 좌측 사진은 한국 선수단이 입장하는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