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오(吳) 나라의 수도로 당시에는 건업(建業)이라 불렸던 도시다. 또 1368년 명(明) 나라가 건국된 이후 1421년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초기 53년간 명나라의 수도이기도 했다.
지금도 난징에는 위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당시에 명나라가 축조한 성벽이 남아있다. 이 성벽은 전 세계의 도시 성벽 중 가장 긴 성벽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길이가 무려 35.3km나 된다. 서울시청에서 인천시청까지의 거리보다 좀 더 길다는 의미다.
길이뿐 아니라 높이도 14~21m로 꽤 높고폭도 4~14m로 상당히 두껍다. 사실 중국 어느 도시에 가더라도 성벽들을 볼 때는 항상 비슷한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중국의 성벽은 한국의 낮고 아담해 보이는 성벽과는 너무도 달라서 솔직히 그 높이나 규모에서 한국의 성벽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웅장했다.
왕조의 수명이 평균적으로 한국보다 짧고 그러다 보니 전쟁 또한 한국보다 흔해서 그렇게 됐다고 보는 시각이 많은데, 성벽의 폭이 10여 미터면 그 길로 마차까지 몇 대나 나란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이니 그 규모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좋다, 나쁘다의 판단을 떠나서 한국에서는 그런 성벽을 볼 수 있는 곳이 없다.
난징은 또 2차 대전 기간 장개석이 중국에서통치하던 시절1928년부터는 중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고, 또 당시 난징 시민들은 역사상 그 유래가 흔하지 않은 참혹한학살을일본군들에게 당하기도 해야 했었다.
2000년대 초반 중국에는 궈메이(國美)와 쑤닝(苏宁)이란 전자제품 취급 양대 유통업체가 있었다. 그들은 약 14억의중국인을 대상으로 전자제품을 판매하는 대기업이었는데, 중국 전역에 걸쳐서 각각 천 개가 넘는 대형 매장들을 갖고 있었으니 그 매출 규모도 상당했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양대(兩大) 유통업체중 하나인 쑤닝 본사는 베이징이나 상하이와 같은 대도시가 아니라 인구가 이런 대도시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난징에 있었다. 다소 의외의 현상이었는데 알고 보니 쑤닝 창업자 출생지가 난징 인근이었고, 또 난징에서 그가 처음으로 사업을 시작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Retail 유통뿐 아니라, 한국의 재벌그룹들처럼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난징에는 골프장도 포함되어 있는 호텔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회사 중국 전 법인이 모여 쑤닝 측과 협의를 하는 회의가 바로 이 호텔에서 개최되면서 나 역시 처음으로 난징을 방문하게 될 기회가 생겼다.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 이후, 한때 년 10%에 이를 정도로 중국 경제가 가파르게 성장하면서 중국인 부자의 수도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고 쑤닝 회장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중국 경제 급성장 시기에 중국의 재벌로 성공한 이후 정치계에도 입문하였는데, 정협(政協)이라는 약칭으로도 불리는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全國人民政治協商會議)의위원이기도 했다. 한국으로 치면 국회와 유사한 기관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에서는 경제인들이 이처럼 정치에도 반쯤 발을 담그는경우들이적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정치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어야만 사업을 보다 더 원활하게수행할 수 있었기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사진) 쑤닝(苏宁) 회장이 소유하고 있던 난징의 호텔. 호수 그리고 골프장이 있는 조용한 호텔이었다. (2011년 8월)
쑤닝 회장이 소유하고 있던 난징의 호텔은 시내에서는 다소 떨어진 조용한 외곽에 있었다. 2박 3일 숙박을 위해 그곳에 도착해 보니 역시 중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재벌이 운영하는 호텔이라 그런지 매우 잘 관리된 아름다운 골프장은 물론, 호텔의 부대시설이나 운영 수준이 베이징의 최고급 호텔과 비교해서도 결코 뒤처지는 것 같지 않았다.
덕분에 그곳에서 2박하며 회의를 하는 동안은 번잡한 법인 일은 좀 잊고서 사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잔잔한 호수를바라보며조용하고도아름다운 공간에서 오랜만에 휴식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징에는 쑤닝 회장의 호텔 공간과같이 아름다운 것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새소리가 들려오는 골프장의 푸른 잔디, 고요한 호수, 멋진 유럽풍의 건물과는 너무도 다른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살려 달라는 비명과 절규가 지금도 들려오는것과 같은 또 다른 공간이 있는데, 바로 난징 대학살 기념관이다.
1937년 12월 당시 중국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이듬해 2월까지 약 2~3개월간에 무려 30여만 명에 달하는난징시민들을 온갖 처참한 방식으로 학살했다.
10살도 안된 어린아이 포함 여성들에 대한 강간, 여성들의 성기 도려내기, 살아 있는 난징 시민 대상으로 총검술 훈련, 포로로 묶여 있는 중국인 목 많이 그리고 빨리 자르기 시합 등만 아니라 심지어 갓난아이를 공중으로 던진 후 총검으로 찌르는 연습도 했다 하니, 차마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광기를 난징에서 적나라하게 모두 보여준 셈이었다.
이러한 만행에 대한 증언은 중국인뿐만 아니라 당시 난징에 거주하던 프랑스 신부, 독일 주재원 등 제3국 사람도 역시 증언하고 있고, 실제 살해당한 시신들이 남아 있으며 관련 기록과 사진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일본은 피해자 숫자나 피해 종류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광적이고 병적인 만행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부정하고 있다. 일본군에 의한 학살은 없었으며 모두가 거짓이라는 것이다.
일본군은 당시 자신들이 점령하는 대다수의 중국 도시에서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하는데, 그런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이 난징이었기 때문에 유독난징에 일본군의 만행으로 피해를 입은 중국인을 기리는 기념관이 세워지게 된 것이라 한다. 이 기념관의 중국어 정식 명칭은 '侵华日军南京大屠杀遇难同胞纪念馆'으로 번역하면 '중국을침공한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로 사망한 동포의 기념관'이다.
기념관 내부에는 잔인하게 죽어간 난징 시민들의 유골들이 땅에서 발굴된 상태 그대로 보관되어 있는 곳도 있었는데, 기념관에 가서 직접 보니 처참한 그 모습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라면 2차 대전 때 독일이 유태인을 독가스로 살해했던 것과 일본이 난징에서 한 짓이 결과적으로 크게 다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살육의 과정만 놓고 본다면 일본인의 잔혹함과 광기는 나치 독일과 전혀비교조차되지 않는 것 같았다. 굳이 왜 그렇게잔인한 방식을 택해 살인을 해야 했는지 정말 이해가 안 됐다.
※ 중국 Baidu 사이트에서 '南京大屠杀'로 검색하면 훨씬 적나라한 사진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 사이트에서 보여주는 사진들은 너무나도 끔찍한 것들이 많아 구글에서 검색한 위 사진으로 대체했다.
사진) 2011년 8월 난징 대학살 기념관 방문 시 찍은 사진.
2차 대전 기간에 비슷한 범죄를 저질렀지만, 독일은 철저히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또 반성하고있다.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반성은커녕 그런 학살이 존재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일본은 1937년 난징에서의 광기로 자신들이미개인임을 이미 한번 입증했고 그 이후는 지속적으로 사실 자체를 부정함으로써이번에는 자신들이 얼마나 뻔뻔한지를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난징 대학살 기념관에는 오래된 중국의 고사성어 중 하나인 '전사불망, 후사지사(前事不忘, 後事之師)'란 문구가 적혀 있다. '과거를 잊지 않음은미래의 스승이 되기 때문이다'란 의미로 국가가 힘이 없어 수많은 난징 시민들이 일본군에게 참혹하게 도륙당한 중국이 당연히 곱씹어야 하는 문구인 것 같다.
그리고 사실 냉정하게 말하면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바로 그 중국으로부터도 한국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침략, 약탈을 당해왔다.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 조공, 공녀, 소정방의 비석, 환향녀,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중공군의 6.25 전쟁 개입 등등 중국으로부터 당했던 아픔의 깊이도 결코 얕지 않다.
그뿐 아니다. 러시아로부터 받았던 고통과 굴욕 역시 결코 잊기 어려운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소련군의 독립군 학살 사건인 자유시 참변 사건, 18만 명에 달하는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외에도, 오래되지 않은 80년대에도 소련 전투기가 한국의 군용기도 아닌 민항기를 격추해서 탑승객 298명 전원이 바다에 수장되는 사건도 있었다. 298명이나 되는 민간인이 타고 있는 민항기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는 미친 행동을 테러단체도 아닌 한 국가의 정규 군인이 주저 없이 자행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일본, 중국, 러시아가 여전히 우리의 유일한인접 이웃 국가다. 일본과 러시아의 인구는 남북한 인구의약 2배이고, 중국은 무려 14배 정도다. 인구에서도 그렇게차이 나는 그 강대국들을 앞으로도 우리는 변함없이 우리의 유일한이웃으로 두고 생존해 가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독일이 주변국에 그랬던 것처럼 한국에 사죄한다고 하는 국가는 이 3개 국가 중 단 하나도 없다. 오히려 반대로 시진핑, 푸틴, 아베처럼 오직 자국의 이익만을 더 강조하는 정치인들이 그 국가들의 지도자로 부상하고 점점 더 한국을 압박하고 겁박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사불망 후사지사(前事不忘, 後事之師)란이 문구는 중국이 아니라 이러한 환경 한가운데서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오히려 더 깊이 새겨둬야 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북한이 국가 경제, 국민 생활 모두가 파탄에 다다를 정도로 어려운 실정임에도수십 년에 걸쳐 핵을 개발해 왔고 또한그토록 핵에만집착하며 핵을 놓지 않으려는이유도 어쩌면 바로 이 민족이 과거에 주변국으로부터 끊임없이 당해왔던그런 역사를 미래에는 두 번 다시 당하지 않겠다는 마음속 깊이 새겨둔 상처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핵을 같은 동족을 위협하는 데에도 역시활용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지만 말이다....
그런데 북한은 그나마 핵을 가지고 미국에까지 대항하는데, 우리는 중국, 러시아, 일본의 위협에 도대체 뭘로 대응해서 과거 수천 년간 당해왔던 그 치욕의 역사가재발하는 것을방지할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