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LT Jun 25. 2020

충칭, 장개석의 눈물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5편 중국 여타 도시-07)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중국 여타 도시



7. 충칭(重慶), 장개석의 눈물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과거 중화권에 있던 우리 회사의 판매 법인에서는 매년 한번 정도는 거래선들과 며칠간 함께 숙박하면서 그 해 신제품을 소개하고 판매 전략도 협의하는 그런 마케팅 행사를 갖곤 했었다.  


통상  행사는 거래선들이 선호하는 해외 유명 관광지에서 실시했는데 2008년 대만 법인에 근무하던 시절 직원들이 가져온 행사장소 안을 보니 동남아나 중국의 관광 명소와다소 거리가  중국 내륙 '충칭'이라는 도시가 행사장소로 제안되어 있었다.


선정된 장소가 다소 의외였는데 알고 보니 충칭대만인, 특히 대륙에서 온 국민당 출신의 대만인에게는 나름 특별한 사연이 있는 도시였고 그래서 거래선들 제안으로 그 도시로 행사 장소로 정해졌다고 했다. 어쨌든 장소가 그렇게 중국 충칭으로 정해진 덕분에 중국 대륙에서 근무할 때도 가보지 못했던 충칭이라는 중국 내륙 깊숙한 위치에 있는 도시를 대만에까지 와서 처음 가보게 되는 기회를 가질 수 었다.




중국의 내륙 쓰촨(四川) 분지에는 인구 약 1,700여만 명의 청두(成都)라는 대도시 외에 또 다른 대도시가 있는데 바로 이 충칭(重慶)이다. 그런데 인구나 면적에서 중국 내 1위의 도시라면 베이징이나 상하이를 생각하기 쉽겠지만, 사실은 이 충칭이 압도적인 1위다.


충칭의 인구는 2019년 기준 약 3,200만으로 2위 상하이 인구보다 800여만 명이나 더 많다. 또 면적도 82,400㎢로 베이징 면적의 5배가 넘는다. 한국과 비교하면 남한의 전체 면적  83%에 해당할 정도이니 충칭이라는 중국의 한 개 도시 면적이 거의 남한 전체 면적에 육박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충칭은 세계의 대도시들을 거론할 때는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충칭시 도심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이 아직 도시화되지 않은 농촌지역이기 때문이다. 인구 밀도로 봐도 충칭시 인구밀도는 380명 수준으로 서울의 약 1만 6천 명과는 비교조차 안된다. 중국에서 사용되는 행정 구역 시(市)의 개념이 한국에서와 같이 도시만을 의미하지 않고 좀 더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이러한 착시 현상이 종종 나타나는 것이다.

 

충칭 중심에 있는 6개 구가 실질적인 도시로서의 충칭이라 하는데, 그 6개 구의 인구는 약 600만 명으로 그다지 많지 않다. 런 배경에서 당시 쓰촨 성 지역을 관할하던 회사의 법인도 충칭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쓰촨 성 성도(省都) 청두(成都)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충칭에는 청두 법인 산하의 지점(판사처)을 두고 영업을 했다.




현재는 인구, 면적 면에서 중국 최대의 도시가 되어있지만, 사실 충칭은 애당초 그다지 크고 유명한 도시가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2차 대전 기간 일본군이 당시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시를 점령하 1937년에 장개석은 충칭으로 대피하면서 충칭을 중국의 임시 수도로 정했다. 그러면서 연합국 사령부 포함 난징 등 중국 동부에 있던 많은 인력과 산업시설들 역시 충칭으로 따라서 대피하게 되었고 이것이 충칭이 빠르게 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다.


2차 대전이 종료되면서 난징이 일본군 점령에서 해방되자 1946년 장개석(蔣介石)은 9년여간 체류했던 충칭을 떠나 난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후에 마오쩌둥(毛澤東) 이끄는 공산당군과의 내전이 발발했고 1949년 4월 이제는 공산당군에 의해 난징이 다시 점령되자 장개석은 광저우를 거쳐 3년여 만에 충칭으로 되돌아와야만 했었다. 장개석은 이번에도 다시 충칭을 임시 수도로 정하고  한 번 재기를 꾀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에 마침내 충칭 마저도 공산당군에게 함락되자 장개석은 청두, 시창을 거쳐서 대만으로 도피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을 마지막으로 중국 대륙에서의 삶은 이후 영원히 접게 되었다. 한때 중국 대륙 전체를 통치했던 그가 이후에는 두 번 다시 중국 대륙 땅을 밟아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장개석과 그의 국민당군은 한동안 중국 전역을 지배했었고, 마오쩌둥의 공산당군을 거의 궤멸시킬 지경에까지 몰고 갈 만큼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에 있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우선 다급한 일본과의 전쟁을 위해서는 공산당과 협력해야 한다는 국민당 내 일부 의견에 따라 1937년 국공합작(國共合作)이라는 공산당과의 력이 이루어졌고 이후 공산당에 대한 공격은 멈추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그동안 수세에만 몰려서 거의 궤멸 지경에까지 갔던 공산당은  휴전기간을 전력 회복의 절호의 기회로 최대한 활용했고, 1945년 일본이 항복하고 2차 대전이 종료되어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이 없어진 시점에는, 휴전기간 키워온 그 전력을 바탕으로 국민당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충칭을 임시 수도로 정하고, 공산당과 휴전했던 충칭 정부 시절 9년의 시간이 마오쩌둥의 공산당군에게는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천재일우와 같은 귀중한 시간이었고, 장개석과 국민당군에게는 대륙 내의 모든 거점을 포기하고 대만으로 도주할 수밖에 없게 되는 비극적인 운명에 빠지는 계기가 되는 그런 시간이었던 셈이다.


이제는 중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진과 같이 인식되기도 하지만 베이징의 천안문 앞에는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런데 의외겠지만 그 자리에는 원래 장개석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장개석이 중국을 통치하던 시절이던 1945년 12월부터 베이징이 공산당군함락되던 1949년 1월까지 3년 1개월간은 현재 마오쩌둥의 초상화보다 더 큰 장개석의 초상화가  자리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장개석이 결국은 공산당에 패해 중국 대륙을 떠나 작은 대만섬으로 쫓겨갈 수밖에 없었으니 대륙을 떠날 당시 그의 심정이 얼마나 원통했을지....


(천안문에 장개석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모습)

https://news.joins.com/article/7030234

(마오쩌둥의 초상화로 대체된 이후 최근 모습)

https://j.map.baidu.com/2f/ftD


중국 대륙에서 어쩔 수 없이 대만으로 쫓겨났던 국민당군은 아열대 밀림이 가득한 대만에 살면서도 당연히 그들 고향이 있고 그들의 과거 기억이 남아 있는 중국 대륙이 그리웠을 것이다. 아울러 이제 오직 작은 대만섬만을 관할하는 그런 초라한 신세로 전락을 했지만, 한때는 충칭을 중국의 임시 수도로 삼고 중국 대륙 전역을 다시 회복하려 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와 아쉬움도 많았을 것이다.  


1949년 말 장개석이 대만으로 밀려날 때 같이 대만으로 온 국민당군이 무려 120만 명에 달했다 한다. 120만 명에 달하는 대륙 출신의 대만인들에게는 충칭이 그러한 특별한 기억과 의미가 남아 있는 도시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러다 보니  2008년에 우리 법인의 행사 목적지를 정할  역시 유명 관광지와는  거리가 있는 중국 내륙의 도시 충칭을 거래선들이 선택했던 것 같다.




하지만 막상 충칭에 와서 보니, 충칭은 국민당의 전시 임시 수도였다는 점 이외에는 그야말로 특별하게 내세울 것들이 거의 없는 너무도 평범한 도시 같았다. 오히려 주변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내륙 쓰촨 분지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런지 뭔가 좀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충칭에도 도심에는 초고층 건물들이 즐비했다. 그러한 면에서 보면 중국 내륙 오지 그곳에서도 역시 중국 경제가 급성장했음을 새삼 느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베이징이나 상하이, 광저우 같은 도시의 도심에서 느낄 수 있었던 뭔가 좀 세련된 그런 느낌은 솔직히 충칭의 도심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것 같다.


사진) 충칭 행사 지원을 위해 한국에서 출장 온 임원이 법인 직원들과 충칭에서 매장 점검하는 모습. (2008년 9월)


한편 충칭에는 한국과는 너무나 밀접한 장소도 하나 있는데 바로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있었던 곳이다.


한국 임시정부는 원래 상하이에 오래 있었지만 임시정부를 지원했던 국민당 정부가 일본군에 쫓겨 이 도시 저 도시로 도주해야 했을 때, 한국 임시정부 역시 같이 따라갈 수밖에 없었고, 그 마지막 도시가 충칭이었던 것이다. 1940년 충칭으로 온 임시정부는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약 6년간 충칭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한다.


(충칭 임시정부 소개 블로그)

https://m.blog.naver.com/yaki07/221408384934




도시명 '重慶' 한글로는 '중경', 중국 표준어로는 '충칭', 중국 광둥어로는 '청킹'으로 읽힌다.


바로 이 '重慶'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유명한 영화도 있다.  오래된 영화지만 언제 들어도 여전히 너무나감미로운 'California Dreaming'이라는 노래가 주제곡처럼 나오 '중경삼림(重慶森林)'이라는 홍콩 영화다. 중경의 광둥어 발음이 청킹이어서 영어 제목은 'Chungking Express'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유명한  영화의 제목이 비록 '충칭의 숲'을 하는 '중경삼림'이기는 하지만, 여기서의 중경은 위에 언급한 중국 쓰촨 성의 도시 '충칭(重慶)'과는 관계가 없고, 홍콩의 구룡반도 침샤추이(TsimShaTsui)라는 지역에 실존하는 '중경(重慶) 맨션'을 의미한다. 중경 맨션은 범죄도 많이 발생하는 험하고 낡은 아파트인데 이곳을 배경으로 영화가 촬영되면서 아파트 이름이 영화 제목으로 선정된 이다.


나중에 홍콩에 주재 근무하면서 실제 이 건물에 여러 차례 가본 적도 있었는데 영화에서도 이 건물을 배경으로 범죄가 발생하지만 직접 가보니 건물 주변에 보이는 사람들온통 다소 인상이 험악해 보이는 흑인과 남아시아인이었고, 건물 안으로 선뜻 들어가기도 겁날 정도로 치안이 불안해 보였다 실제 내가 홍콩에 거주하는 기간에도 잘 모르고 이 건물의 여관에서 투숙하던 여성 여행객들이 자신들이 숙박하던 방 안에서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청킹맨션 모습)

https://blog.naver.com/sanjana1/150141657765


홍콩에 있는 그 아파트가 왜 중국 내륙에 있는 '충칭'이라는 도시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는지 배경은 잘 모르겠다. 아마 서울에 마산 식당, 전주 식당이 있고 테헤란로 역시 있듯이, 홍콩에도 중국 도시명을 딴 수많은 지명이나 건물이 있는데 중경 맨션도 아마 그런 배경에서 같은 이름이 붙게 되었을 것 같다.


한편 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면 솔직히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인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주제가 뭔지도 이해하기가 좀 난해하다. 그렇지만 분명했던 것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장면들 중에는 한 폭의 그림 같은 매혹적이고 인상적인 장면들이 너무나많았고 또 나른한 홍콩의 더위와 열기 속에 뭔가에 취한 듯이 묘하게 끌리는 그런 매력이 있는 영화라는 점이었다.

 

(중경삼림의 한 장면, 04:20)

https://youtu.be/qnPPyyRabjo




홍콩은 1997년 약 150년 만에 중국에 반환되었다. 그런데 무려 150년 만에 땅의 주인이 바뀌게  것도 충격적인데, 공산정권으로 갑자기 주인이 바뀌게 되었으니 당시 홍콩의 주민들 동요는 적지 않았을 다. 그리고 그런 홍콩인들 중에는 공산체제가 두려워 홍콩의 중국으로의 반환 이전에 제3 국으로 도피하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그들이 캐나다의 Vancouver로 몰리면서 Vancouver의 부동산 가격이 한때 급등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중국 반환 이전 홍콩인의 해외이주 관련 기사)

https://www.google.co.kr/amp/s/mnews.joins.com/amparticle/2857332


그런데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지 70년밖에 안되었어도 남북 간 문화, 사고방식, 심지어 언어까지도 그렇게나 많은 괴리가 생겨버린 것을 보면, 그보다 두배 이상 되는 너무도 오랜 기간을 중국에서 분리되어 서구 문화 속에서 살아왔던 홍콩인들은 같은 기간 공산주의 사상 속에서 교육받고  자라온 중국인과는 문화, 사고방식 등 여러 면에서 너무도 큰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스스로의 정체성을 중국인이 아니라, 영국령의 '홍콩인'으로만 인식하면서 성장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몇 년 후에는 자신도 이제 더 이상 홍콩인이 아니라 공산체제하 중국인이 되어야 하는 현실에 당면하게 되니 당연히 두렵고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아울러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영국령 홍콩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누리며 홍콩인으로서 살았던 시절에 대한 미련과 향수도 있었을 것이다. 중국에 반환된 지 23년이란 시간이 이미 흘렀음에도 최근 홍콩 시위 모습을 보면 영국 국기를 들고 다니는 홍콩인들이 적지 않은 것에서도 그러한 향수를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것 같다.


(홍콩 시위에 등장한 영국 국기)

https://www.yna.co.kr/view/PYH20191208085200013?input=1196m


그런데 돌아갈 수 없는 과거 식민 시절에 대한 홍콩인들의 그러한 묘한 불안과 향수를 우회적으로 묘사한 영화가 바로 홍콩의 중국 반환 직전 1994년 제작된 이 '중경삼림'이란 영화의 주요 메시지라는 것이다. 너무 매력적인 영화였지만 도통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던 이 영화의 주제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는 것이다.


(홍콩의 중국 반환과 영화 중경삼림)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oonho1202&logNo=221459140494&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kr%2F




대만 거래선들이 충칭 방문을 통해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영광과 향수를 다시 한번 느껴보려고 했던 심정과, 홍콩인들이 중경삼림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역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 영국령 홍콩에 대한 그들의 향수를 표현하려 한 것이 결국 근저에서는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다.


그런데 매우 묘한 일치지만 공교롭게도 '중경(重慶)'이라는 중국 내륙에 있는 도시의 이름을 통해서 홍콩인과 대만인의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향수의 감정이 같이 표출되고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 치고는 꽤 특이한 우연의 일치이고 어찌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총칭에 있던 장개석 관저)

https://www.google.co.kr/amp/s/kknews.cc/zh-cn/travel/g92ry9.amp

(총칭 장개석 관저 2011년 철거 전후 모습)

https://www.chinadaily.com.cn/china/2012-04/16/content_15059305.htm

(1945년 충칭에서 장개석과 마오쩌둥이 함께 찍은 사진)

https://kknews.cc/history/b3k66.html

※ 나란히 서서 이 사진을 찍은 약 4년 후에 한 사람은 중국 대륙의 절대 권력자가 되고, 한 사람은 대만으로 도주해야 하는 운명을 게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