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에서 만난 화교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6편 Taipei-10)

by SALT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Taipei



10. 타이베이에서 만난 화교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해외에서 한국 출신 화교분을 만난 것은 프랑스 파리에서가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이후에 주재했던 토론토나 베이징에서는 화교를 만나본 적이 없고, 광저우에 파견 근무할 때 다시 화교를 만났다. 광저우에서 만났던 화교는 좀 특이하게도 북한 출신 화교였다. 그다음 타이베이로 근무지가 바뀌었는데, 타이베이에서도 역시나 화교를 만날 수가 있었다.


해외 어느 곳에서 만나도 같은 느낌이지만 해외에서 화교를 만나면 기분이 참 묘했다. 파리에서 만났던 화교분 경우는 한국어를 많이 잊어버려 잘 구사하지를 못했지만, 광저우나 타이베이에서 만났던 화교분들의 한국어는 한국인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또 비슷한 시절 한국에서 성장했으니 과거 그들의 어린 시절 추억 또한 내 추억과 별 차이가 없었다.


결국 완벽한 한국어에다가, 어린 시절 추억까지 한국인인 나와 전혀 차이가 없다 보니 그런 화교분과 해외에서 한참 대화를 하다 보면 마치 한국에서 온 고향 친구를 오랜만에 다시 만난 것만 같은 꽤 친근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실제로 고향 친구라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다. 국적만 서로 다르지 같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건들을 보고 겪으며 성장했으니 말 그대로 고향 친구 아니겠는가?


하지만 솔직히 한국에서 태어나고 또 성장했던 화교분들은 한국인으로부터 친구처럼 대접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민간 차원에서 뿐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도 꽤 오랜 기간 차별과 배척을 받아온 것이다.


물론 정부 차원의 그런 정책의 결과로, 동남아시아에서처럼 화교가 한국 상권을 장악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사실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에서는 화교가 국부를 거의 전부 점유하고 있어서 "정치는 현지인이 하지만, 경제는 화교가 주무른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국가적 문제로 인식되기도 한다. 두 국가의 화교 인구가 각각 23%, 5%인데 이 소수가 국가의 부 대부분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었다. 화교 인구의 비중이 77%나 되는 싱가포르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정치는 그들이 해도, 경제는 우리가 주무른다!)

https://mnews.joins.com/article/21472293#home


동남아시아 화교 역사는 이미 15세기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동남아 화교는 15세기부터 현재까지 수백 년을 대대로 대를 이어 그 땅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또 다른 수백 년 동안 그들은 그 땅에 거주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동남아시아에서도 화교가 핍박받았던 사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 그 땅에는 화교가 대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화교 상황은 많이 달랐다. 한국의 화교 역사는 비교적 짧아 1882년 발생한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사와 함께 온 중국 민간인 지원 인력이 그 시초로 알려져 있다. 즉 화교의 역사가 불과 140년도 안 되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렇게 역사가 짧음에도 과거 한국 정부의 배타적인 정책으로 인해 한국 화교들은 불과 몇 대를 잇지도 못하고 대부분 한국을 떠났다. 그렇게 한국을 떠난 화교들을 파리, 광저우에 이어서 타이베이에서도 만나게 된 것이다.


(화교가 뿌리내리지 못한 유일한 나라)

https://news.mt.co.kr/mtview.php?no=2019040315308298794

(한국 화교 연구)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nNewsNumb=201302100044




중국에서는 국적은 중국이지만 한국어가 가능한 우리 동포 조선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따라서 법인에서 한국어가 가능한 현지인이 필요할 때는 조선족을 채용한다. 그런데 중국과 적대관계에 있는 대만에는 기본적으로 중국 국적인 조선족이 거주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조선족 채용이 불가능하다.


대신 대만에는 한국 출신 화교분들이 일부 있어서 한국어가 필요한 자리에는 그러한 화교분을 채용하곤 했었다. 그런데 당시 대만에서 만난 한국 출신 화교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대부분 나이가 30대 후반 이상으로 젊은 화교는 거의 없었다. 한국과 중국의 외교 관계가 수립됐던 1992년 이후에는 한국의 화교들이 한국을 떠나야만 할 때에는 이제 더 이상 대만을 택하지 않고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고 있고 따라서 그만큼 기회가 더 많은 중국 본토를 택해서 떠났기 때문이었다.


2006~7년 대만 법인에는 4명의 화교가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직원이 아닌 거래선 중에도 화교가 한 분 있었는데, 대만 법인 부임 초기 이 화교분으로부터 한동안 엄청나게 시달리게 되는 일도 있었다.



거래선은 우리 회사가 생산하는 제품 중 한 품목에 대해 대만 영토에서 독점적으로 판매하던 대리상이었다. 하지만 당시 시장 트렌드는 중간에 있는 이러한 대리상들점차로 없어지고, 제조업체가 Retailer에게 직접 제품을 공급하는 그런 추세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한마디로 유통 단계가 좀 더 단순화되어 가는 추세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대리상이 법적으로 독점권을 갖고 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전임 법인장은 Retailer와 직거래를 시도했고 나 역시 시장 트렌드에 따라 대만 법인에 부임한 후에 그 정책을 이어서 그대로 추진했다.


하지만 대리상 입장에서 보면 그동안 제조업체와 Retailer 사이에서 물건을 받아넘기면서 안정적인 마진을 지속 남겨 왔는데, 갑자기 그것이 중단되니 매출, 이익 모두 줄어들게 되었고 또 그 업무에 관련되었던 직원까지도 해고해야 하는 곤란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결국 대리상 입장에서는 이런 정책은 반대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었고 실제로 전임 법인장 시절부터 여러 차례 직거래 시도를 중단해 줄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요청해 왔다.


그렇지만 이미 시작된 일이고, 법적으로도 하자가 없으며, 또 회사와 법인의 매출과 이익을 위해서도 직거래는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나는 그대로 밀어붙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대리상의 사장이 회사에 불시에 찾아왔다. 그리고 나를 만나자고 해서 법인 회의실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나보다 약 2~3살 정도 젊은 한국 출신 화교였는데, 이 날은 아주 작정을 하고 왔는지 그전에 만날 때의 점잖은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소리 지르며 거래 중단에 대해 거세게 항의해왔다.


그런데 만일에 그녀가 화교가 아니었다면 중국어로 그렇게 화를 냈을 것이고, 그랬다면 대충 못 알아듣는 척을 하거나 실제 못 알아듣는 말도 있었을 텐데, 그녀는 한국어로 화를 내고 있었고 또 그 한국어가 너무나도 완벽하다 보니 도통 못 알아듣는 척을 수가 없었다. 한국 사람이 말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으니 언어 핑계를 대며 두리뭉실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한국에서 성장해서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매우 잘 알다 보니 한국인을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 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일 이후에도 내가 뜻을 굽히지 않자, 이번에는 본사 관련 부서의 고위 임원에게 편지까지 보내 거래 중단의 부당성을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본사에서도 해외 법인 직거래 전환을 독려하던 상황이어서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강공이 먹혀들지 않으니 유화책으로 접근해 오기도 했는데, 또다시 그녀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측에서 두 명 그쪽에서 두 명 모두 4명이 함께 만났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명은 모두 한국 출신 화교였다. 법인에서 나와 같이 간 분이 화교 출신 영업 총감이었는데, 그녀와 함께 온 여성 직원도 그녀처럼 한국 출신 화교였던 것이었다.


결국 그렇게 대만에서 대만인 세 명과 한국인 한 명이 함께 식사를 하게 됐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자리에서 사용되던 언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어였다는 것이다. 내 중국어가 그들의 한국어 실력만큼 되지 못하니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대화가 진행된 것인데, 생각해 보면 대만인 세 명과 그것도 대만에서 한국어로만 대화하는 모습이 좀 특이하기도 했을 것 같다.


저녁 식사가 시작되니 역시 계속 술을 권했다. 술로 뭔가를 풀어보려는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 당시 한국에서는 술자리에서 일이 성사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한국 출신인 그녀는 그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녀들이 계속 권하는 술로 힘들기는 했다. 하지만 거래를 일방적으로 단절해 버린 상황에서 권하는 술까지 거부하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권하는 술은 다 받아 마셨다. 물론 마지막에 계산은 우리 측에서 했다, 괜히 그런 것으로 약점을 잡힐 이유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연이어 권하는 술 다 받아 마시니 결국에는 필름이 중간중간 끊어질 정도로까지 술에 잔뜩 취해 간신히 호텔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도 마지막에 헤어지면서 그녀가 했던 말, 즉 "거래 중단은 꼭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달라"라고 애절하게 말했던 것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는 나는 변함없이 Retailer와 직거래를 밀어붙였다. 그리고 그렇게 직거래를 시작하니 마진 구조도 좋아졌을 뿐 아니라, 시장 변화도 좀 더 빨리 파악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 변화에 대한 우리 측의 대응도 빨라지게 되매출과 이익 면에서 적지 않은 개선이 이루어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결국 그녀와의 거래는 그렇게 중단됐다. 그리고 그 이후는 그녀에게서 더 이상은 연락이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더 지나고 생각해보니 너무도 급하게 거래를 중단했던 것이 좀 많이 미안하기는 했다. 시간을 더 끌면 거래 중단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것 같아 부임 초기 서로 익숙해지기 전에 무리를 했던 것인데, 아무리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거래 중단 시한만 합의가 되었다면 그녀가 사업을 조금 더 차분히 정리할 시간은 주어야 했던 것이 옳았던 것 아닌가 싶다.


이후 1년 여가 지나 우연히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는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잊은 것처럼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별다른 적대감 없이 나를 대해주었다. 거래 중단으로 졸지에 사업 일부분을 잃어버렸으니 상처가 컸을 것이고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인 나의 대한 미움도 나름 꽤 을 텐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었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한국을 떠나야만 할 만큼 이미 많은 상처를 한국인들로부터 받았을 텐데, 한국을 떠나서 자신의 조국 대만에 와서도 또 다른 한국인인 나로부터 다시 한번 그녀는 상처를 받았던 셈이다.



법인에 직원으로 근무했던 화교분 4명은 영업 총감과 인사 과장, 혁신 담당, 서비스 센터 과장이었다. 나이는 모두 그 당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중반이었다.


사진) 대만 법인 사무실. 4명의 화교분들과 함께 근무했던 공간이다. (2007. 6월 및 2월 사진)


그런데 서비스 센터 과장과 혁신 담당은 서로가 부부였다. 하지만 다행히(?) 서비스 센터는 법인 건물에서 좀 떨어진 곳에 별도로 위치하고 있어 집에서 항상 마주 보던 사람을 사무실에서도 역시 또다시 마주 보고 일하는 일은 없었다. 어쨌든 다른 두 화교는 대만에 와서 순수 대만인과 결혼한 반면, 이 부부는 대만에 와서도 결국 한국 태생의 화교끼리 만나 결혼한 셈이었다.


한편 이 부부는 마침 내가 거주하고 있던 아파트 바로 앞의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이 그리 가깝다 보니 주중에는 남편과 같이 퇴근하면서 집 근처에서 한잔 하기도 했고, 주말이면 그 부부와 그들의 아이들까지 함께 데리고 한국 식당에 가서 식사도 같이 하곤 했었다.


당시에는 티엔무에 있는 제주관이라는 한국 식당이 맛으로 유명했는데, 주말에는 그들과 함께 이 제주관에 가서 한국 음식 먹으며, 한국말로, 오래전 우리들이 어렸던 시절 한국 얘기를 나누다 보면 마치 고향 친구들을 대만에서 만난 것 같은 착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나고 보니 그러한 착각을 하면서 보낼 수 있었던 시간이 타이베이에서의 생활 중에 작지 않은 즐거움이기도 했던 것 같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아열대 지방 타이베이의 주말 저녁들을 티엔무에서 그렇게 즐기곤 했는데, 이것이 벌써 13년 전의 오래된 추억이 됐고 이젠 그들과의 연락도 안타깝지만 끊어져 버렸다.


(티엔무 한국 식당 제주관 모습)

https://blog.naver.com/4julove/10189228863


내가 해외에서 만났던 대부분의 한국 출신 화교들은 한국의 과거에 대해서는 얘기를 해도 자신들과 개인적으로 관련된 한국에서의 기억이나 경험은 좀처럼 얘기를 안 했다. 어떤 이유에서 그런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었던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 만큼 차별과 배척이 난무했던 한국에서의 그 기억을 굳이 한국인 앞에서 다시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 아닌지 모르겠다.

이 부부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래도 조금은 더 소탈한 부인이 어느 날 딱 한 번은 자신과 개인적으로 관련되는 기억들에 대해 언급했던 적이 있었다. 예전 한국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시절에는 중국 식당을 운영하는 화교가 일반적인 한국인보다는 상대적으로 부자인 경우가 꽤 많았다. 따라서 당시에는 화교 여학생들이 좀 더 잘 꾸밀 수 있고 잘 먹을 수 있어서 그런지 한국 여학생들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예쁘게 보였던 경우 역시 많았다.


식사 중 그 생각이 나서 그 얘기를 했더니 부인이 불쑥하는 말이, "맞아요 나도 그때는 서울에서 인기가 매우 많았어요, 그때는 정말 그랬는데...."라고 맞장구를 쳤던 것이었다. 별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말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 화교가 워낙 한국에서의 개인적 기억은 얘기하지 않는 것을 경험해 왔던 터라, 그녀가 했던 이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남아있다.


그 부부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다니는 나이였는데 한국어는 단 한마디도 못했다. 나와 함께 있으면 장난 삼아 '아저씨' 정도는 한마디 할 것도 같은데 그렇게 여러 번 식사를 같이 해도 단 한 번도 한국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지를 못했다. 아마도 한국에서의 안 좋은 기억이 많이 남아 있는 부모가 의도적으로 자식들에게 한국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또 다른 화교 영업 총감은 엄밀히 말을 하면 완전한 화교는 아니었다. 어머님은 한국분이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부계를 중시하는 관례에 따라서 그는 한국에서는 화교로서 성장했던 것이고, 결국에는 자신의 고향이며 또한 어머님의 고향이기도 한 한국을 떠나 대만으로까지 와서 대만인으로 살게 되었다.


한국인과 중국인을 외모로 구분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 영업 총감은 어머님이 한국분이라서 그런지 정말 외모로만 보면 유독 한국 사람 같이 보였다. 한국의 시골 어딘가에 가면 꼭 만날 것 같은 그런 털털한 모습의 순수 한국인처럼 보였던 것이다.


사진) 영업 총감 모습. 좌측은 대만 남부 가오슝 출장 시에 찍은 사진이고(2008. 11월), 우측은 외부 행사 후 회사로 돌아오면서 찍은 사진이다 (2007. 6월).


대반 법인에 근무하면서 이분으로부터 너무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물론 법인의 영업 책임자 중 한 사람으로서 법인의 일이 당연히 자신의 일이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풀기 어려운 많은 일들이 이 분을 통해 해결되었다. 또 성격도 털털하고 사교적이어서 직원들 사이에서도 평이 좋았고 직원들도 잘 따랐다.


나이도 나와 비슷해 개인적으로도 친하게 지내기도 했는데, 퇴근하면 술을 곁들인 저녁 식사도 자주 함께 하곤 했었다. 한국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화교가 운영하는 좀 생소한 한국 식당 맛집도 있었는데 이분이 그런 곳 역시 많이 알고 있어서 덕분에 같이 가서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도 있었다.


그러한 식당 중에는 광어 조림을 하는 식당도 하나 있었다. 광어회는 먹어 봤어도 광어 조림은 그때 처음 먹어 봤는데 그 식당의 얼큰한 광어 조림 맛이 정말 너무 좋아 이후에는 자주 찾아갔었다. 보글보글 끓는 칼칼한 광어 조림 냄비를 불에 올려놓고서 대만의 유명한 58도짜리 금문 고량주와 함께 먹던 그 맛은 정말 일품이었고 지금도 그때 분위기와 맛이 너무도 그립다.


영업 총감 집에 가서 식사를 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 들었던 대만인 부인의 꽤 화통한 말도 기억난다. 영업 총감과 함께 집에 도착하니 식탁 위에는 다양한 한국 음식이 이미 모두 준비되어 있었고 부인은 우리를 보자마자 외출하려고 했다. 같이 식사하자고 제안했더니 그 부인이 나가면서 하는 말이 "나는 너희들이 편하게 하는 한국어 전혀 못 알아들어 괜히 불편할 테니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마음 편하게 너희들끼리 한국말로 하면서 재미있게 놀다 가라"라고 하는 것이었다. 남편만큼 부인도 화통했다.


매사에 워낙 열심이고 적극적이라 그런지 영업 총감은 내가 대만을 떠나서 홍콩으로 근무지를 옮긴 후에는 대만의 다른 회사 대표로 스카우트되어 갔다. 홍콩에 근무하던 시절에도 새로 일하게 된 회사일로 가끔 홍콩에 출장 오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꼭 같이 만나 식사도 하곤 했었다.


대만법인 근무 기간 신세도 참 많이 졌는데, 언젠가는 다시 만나 예전 타이베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광어 조림 한 냄비 불에 올려놓고서 금문고량주와 함께 한잔 같이 할 수 있는 날이 다시 오기를 애타게 기대해 본다.




대만에서 만났던 화교분들 모두 내게는 화교라는 구분되는 이름보다는 그저 같은 고향을 가진 너무도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또 어린 시절 비슷한 추억을 공유한 가깝고 편한 친구로서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그들과 함께 했던 대만 타이베이에서의 시간과 공간들이 참 많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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