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안 그 소녀의 눈동자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3편 Beijing-01)

by SALT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Beijing


내가 거주하던 아파트에서 내려다 보이는 베이징 거리 모습 2006년 5월 초여름 일요일 이른 아침의 모습이다.


당시는 2008년에 실시될 예정이었던 베이징올림픽 준비로 수많은 공사가 베이징 시내 곳곳에서 진행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휴일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사진에서 보이는 베이징 모습은 번잡하던 평상시의 모습과는 다르게 적막하게까지 느껴진다.


내가 근무하던 법인은 사진 위쪽 방향으로 5km쯤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한 겨울이나 한 여름이나 매일 아침 이 사진 속 창 밖으로 보이는 바로 저 길을 따라 1시간 정도 걸어서 출근했다. 몇 년간 그렇게 저 길을 걸어 다니면서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과 마주쳤고, 많은 것들을 봤고 또 많은 것들을 느끼기도 했는데, 이제는 두 번 다시 접할 수가 없는 아련한 과거가 되어버렸다.


저 길을 걷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데, 저 길은 조금이라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지....



1. 엘리베이터 안 그 소녀의 눈동자


베이징에 거주하면서 경험했던 잊지 못할 기억들이 많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소녀의 시선이 있었다.


추웠던 베이징의 한 겨울 어느 주말이었는데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왕징(望京)의 대학교 후배 아파트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아파트 단지 앞까지 마중을 나온 그 후배와 함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니, 그 안에는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소 이상한 모습을 한 일종의 '엘리베이터걸'처럼 보이는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그런데 마땅한 표현을 찾을 수가 없어 엘리베이터걸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한국에서 봤던 것 같은 그러한 멋진 복장의 날씬하고 아리따운 엘리베이터걸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화장은커녕 제대로 씻지도 못한 것 같은 외모에, 입고 있는 복장은 6·25 전쟁영화에서 봤던 중공군이 한겨울에 입던 국방색 긴 군용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외투가 체격에 비해 너무 커서 입고 있다는 표현보다는 마치 이불을 덮고 있는 것 같다는 표현이 보다 더 정확할 것 같았다. 또 두터운 그 군용 외투의 밑자락은 그녀의 무릎을 넘어서 거의 신발 부근에까지 내려와 있어서 결국 목 아래부터 발끝까지 군용 외투가 몸 전체를 덮고 있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머리에는 귀까지 덮는 두터운 방한용 군용 모자를 쓰고 있어 결과적으로 얼굴 눈 주변만 빼고는 온통 이불로 칭칭 둘러싼 것 같은 아주 해괴하고 이상한 모습이었다. 내 평생 엘리베이터를 수천 번도 더 타봤겠지만, 이런 모습의 엘리베이터걸을 본 것은 처음이었고 사실 후배 설명을 듣기 전에는 그녀가 엘리베이터걸이라는 것 자체인지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엘리베이터에는 올라탔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내내 너무도 이상한 모양새의 그 여자가 좀 불편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었는데, 그녀가 나를 계속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려서 그녀를 바라보니, 역시 그녀는 눈도 깜짝이지 않고 날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나 강하게 응시하는지 거의 눈싸움하자고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는데,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니 다소 불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불쾌했다.


결국 그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던 후배에게 그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말로 "도대체 얘는 왜 이렇게 버릇없이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냐?"라고 불만을 토로했는데 후배로부터 전혀 의외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즉, 엘리베이터에 타는 주민들의 얼굴들을 열심히 쳐다보고 외워서 그 사람이 몇 층에서 내렸는지를 기억한 후, 다음에 그 사람이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면 자신이 기억했던 그 주민의 얼굴과 층수를 연결시켜 해당 층의 버튼을 대신해서 눌러주는 것이 그녀의 일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녀는 20살도 안 돼 보이는 어린 소녀였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미안한 생각에 눈물이 울컥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단순한 일을 하고 한 달에 얼마나 돈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나이 또래면 한참 놀고 싶고, 먹고 싶고, 멋 부리고, 꾸미고 싶을 나이인데, 그런 모든 것 하나도 못하고 그 추운 겨울 그것도 휴일에 다 해진 군용 모자와 군용 외투 뒤집어 입고 추위를 버텨가며 하루 종일 엘리베이터에 갇혀 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여건에서도 자기 일을 열심히 한다고 오가는 주민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익히고 기억하려는 그녀의 그런 현실이 너무나 마음 아팠다.


중국도 2005년 경이면 이미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돈 많은 부자들이 여기저기 등장하기 시작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 부자들의 자녀들은 온갖 혜택과 대접을 받아가며 자신들의 부모가 누리기 시작한 중국의 부(富)를 즐기며 살고 있었을 텐데, 시골에서 올라온 필경 베이징 호구(戶口)조차도 없는 농민공(農民工)을 부모로 둔 그 소녀는 거기서 그렇게 홀로 쓸쓸히 2005년의 한겨울 너무나도 아까운 자신의 젊음과 청춘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과거 60~70년대 한국의 경제성장기처럼 중국에서도 역시 임금이 싸고 일자리가 없는 농촌의 주민들은 부득이 농촌을 떠나 대도시로 와서 돈벌이를 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서울로 이사 온 후에 이전 신고만 하면 바로 서울 사람이 되는 한국의 경우와는 다르게 중국에서는 시골에서 베이징과 같은 대도시로 이사 와서 실제로 베이징에서 수십 년간 거주해도 결코 베이징 시민이 될 수 없었다.


당시 중국에는 출신 및 거주지역을 의미하는 호구(戶口)란 제도가 있었는데, 베이징 주민이 되려면 바로 이 호구부터 베이징으로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거주 환경이 훨씬 좋고, 일자리도 많으며 복지 혜택도 큰 베이징과 같은 대도시에서 살기 위해 농촌에서 몰려오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보니 베이징 시는 그 많은 사람들 모두에게 호구를 다 발급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실제 베이징에서 수십 년간이나 거주하고 있음에도 마치 투명 인간처럼 베이징 호구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수 생기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호구 없는 상태로 베이징 같은 대도시에 와서 살고 있는 농촌 출신 근로자들을 농민공(農民工)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실제로는 대도시에서 살지만 법적으로는 여전히 그 대도시 주민이 아니기 때문에,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같은 대도시 정부가 제공하는 다양한 취업, 의료, 교육 등의 복지 혜택은 전혀 누릴 수가 없었다.


우리 개념으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불합리한 제도지만, 중국은 호구제도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2017년 기준 약 3억 명으로 추산되는 그 많은 농민공 인구를 그들이 거주하기 희망하는 몇 개 대도시에서 모두 다 흡수할 수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라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있다.


베이징, 상하이 인구가 각각 2200만, 2400만이고 광저우, 선전의 인구도 각각 1300만 1200만이다. 도시의 인구가 이미 천만을 훌쩍 넘어 심지어 이천만을 상회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농촌에서 유입되는 인구를 받아들일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농촌사람들은 보다 양질의 일자리를 찾아서 여전히 대도시로 몰리고 있으며, 20살도 안돼 보이는 바로 그 엘리베이터걸도 그렇게 베이징으로 와서 살고 있는 농촌 출신 농민공의 자녀일 가능성이 높다.


(농민공 자녀 관련 사회적 이슈)

https://m.khan.co.kr/world/china/article/201712271639001


(농민공들의 모습)

https://m.blog.naver.com/jazzmania74/50190118718




사실 모택동의 공산혁명 이후 중국은 너무 오랜 기간 거의 모든 인구가 그 소녀처럼 가난에 허덕이며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한 가난을 너무도 마음 아파했던 등소평(鄧小平)이라는 한 지도자가 "중요한 것은 이념이 아니라, 국민을 잘살게 하는 것이다(不管白猫黑猫会捉老鼠就是好猫)"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중국 인민이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정치를 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중국에 개혁개방 정책을 도입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중국인 거의 모두 너무나 가난한 실정이다 보니, 한꺼번에 모두를 잘 살게 할 방법을 찾기는 어려웠고 결국 우선 돈 벌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돈을 벌게 하고 이후에 그렇게 축적된 부를 이제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분배하자는 선부론(先富論)이 그 정책 추진과 함께 동시에 추진됐다.


그리고 등소평이 도입한 이러한 개혁개방 및 선부론 정책은 결과적으로 중국에 막대한 부(富)를 가져다주는 데 성공을 했고, 전 세계 GDP에서 중국이 차지하던 비중이 1978년 불과 1.8%에서 40여 년이 지난 2017년에는 독일, 일본을 넘어 15.2%까지 급증하게 되었다. 결국 전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중국의 GDP가 세계 2위까지 부상해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에 버금가는 G2로 부상한 것이었다.


이처럼 이제 누가 봐도 중국에 부가 축적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등소평이 계획하고 추구했던 그다음 단계인 부의 분배와 확산은 G2로 부상한 현재 시점에서도 아직까지는 뚜렷한 결과가 없다. 아니 오히려 빈부차가 좀 더 심화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 것 같다.


그런데 만일 개혁개방과 함께 주창했던 등소평의 선부론이 일부에게 먼저 부를 가져다주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현재와 같이 그 축적된 부의 분배를 이루어 내는 것에 실패한다면 중국의 공산 혁명과, 개혁개방 정책은 실로 엄청난 모순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택동은 평등한 사회 구현한다고 공산혁명을 일으켰으며, 등소평도 모두가 잘 사는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서 개혁개방 정책도입하고 또 과도기적 개념인 선부론도 주장했다.


그런데 그 모든 혁명과, 정책과, 이론이 결과적으로 국가와 소수 국민의 부를 축적하는 결과만 만들어내서 국민들 간의 빈부차는 오히려 과거보다 더 심각해진다면 모택동, 등소평 두 사람 모두 그들이 추구했고 거듭해서 강조했던 근본적인 목표는 전혀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불평등의 관점에서 중국은 공산화 혁명 이전의 사회와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되는 셈이다.


중국의 부가 나날이 축적되어 미국 다음 세계 2위가 되고, 달에 우주선까지 착륙시킬 만큼 기술이 발전된다 해도, 3억 명에 달한다는 농민공과 같은 국민이 겪어야 하는 소외감과 빈부차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런 발전은 도대체 누굴 위한 것이겠는가? 결국 공산화 혁명 이전 과거의 중국처럼 소수의 중국인만을 위한 것뿐일 것이다.


농민공들의 어린 자녀가 즐기고 꾸미는 것은 고사하고, 그 매서운 베이징의 추위를 피해 이불 같은 군복을 뒤집어쓰고 주민들의 얼굴을 외우느라 눈이 빠지도록 하루 종일 오가는 사람의 얼굴을 응시해야만 하는 삶을 지속 살아야만 한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위대한 공산혁명과 개혁개방 정책 모두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근본적인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중국인도 아니고 그 소녀가 처한 현실에 책임져야 할 부분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비슷한 세상, 비슷한 시기를 살고 있는 같은 인간으로서, 그 어린 소녀에게 왠지 죄 진 것 같고 미안한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미안할 정도면 모택동과 등소평은 물론 중국의 모든 지도층들은 나보다는 훨씬 더 미안해하고 훨씬 더 큰 책임을 느껴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물론 한국이 당면한 문제도 너무 많고, 국력이 강해질수록 점점 더 중화민족주의에 빠져 주변국을 겁박하고, 횡포를 부리는 중국이 달갑지 만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중국인, 한국인이라는 구분을 떠나 그 어린 소녀의 현실과 아픔을 가까이서 직접 보고 느꼈던 동시대를 사는 같은 인간으로서, 이 땅에서 그 소녀와 같은 아픈 삶을 사는 어린 소녀들이 줄어들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이부자리 같은 외투 밖으로 눈만 내민 무표정한 모습의 그 소녀도 14년 여가 지난 이제는 30대 초반의 여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간 중국의 경제가 많이 성장했으니 그녀도 이제는 멋진 옷도 입고, 멋도 부리고, 인생을 좀 더 즐기며, 따뜻한 차 한잔과 함께 겨울을 보낼 수 있는 그런 집에서 살고 있기를 기대해 본다.


뚫어질 듯 나를 응시하던 그 소녀의 시선이 이 세상에 대한 원망만이 아니었기를 지금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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