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택했던 베이징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3편 Beijing-02)

by SALT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Beijing



2. 내가 선택했던 베이징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당시에는 학생들이 진학하게 될 중고등학교는 같은 학군에 있는 거주지 인근 학교 중에 추첨을 통해 무작위로 정해졌었다. 동부이촌동에 살고 있던 나는 집에서 불과 100미터 정도 거리에 신용산중학교라는 학교가 있어 그 학교로 배정받기를 기대했었다.


그런데 결과는 비록 같은 학군이기는 했지만 우리 집에서는 가장 먼 곳에 있는 학교 중 하나인 보광동의 오산중학교로 배정받았다. 그때는 그쪽으로 가는 버스 노선도 없어, 결국 나는 중학교 3년 내내 그 당시에는 판잣집들만이 가득했던 서빙고 비포장 도로길 먼지를 뒤집어써가며 걸어서 학교에 다녀야 했다. 4km 가까운 거리를 매일 1시간 정도 걸어서 등하교했던 셈이다.


고등학교 역시 집 근처나 가까운 강북에 정말 많은 학교가 있었음에도, 이번에도 가장 멀리 있는 학교 중 하나인 한강 너머 대방동 성남고등학교로 배정받았다. 대방동은 생전에 단 한 번도 근처에 조차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도 역시 집에서 학교까지 바로 가는 버스노선이 없어 매일 학교와는 반대 방향인 용산까지 걸어 나가서 거기에서 버스 타고 한강 건너 등교하곤 했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7km 정도 거리라 도저히 걸어 다닐 수는 없었고 용산에서 버스를 타는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한편 '오산'중학교, '성남'고등학교 모두 공교롭게도 학교 이름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도시가 경기도에 있어, 대학 때 미팅하면서 자기 소개할 때 상대방이 오해하는 경우도 많아 '서울에 있는 학교'라고 부연 설명을 해야 하기도 했었다.


대학교도 원하던 대학에는 가지 못했다. 내가 대학 시험을 치르던 시절에는 각 대학에서 주관하는 본고사 시험 전에, 대학 입학 지원자라면 누구나 응시해야 하는 예비고사라는 시험이 있었다.


그런데 우수 학생 확보를 위해서는 서로 경쟁 관계에 있던 대학들은 이 예비고사 성적이 좋은 수험생에게는 본고사를 치르지 않고도 예비고사 성적만으로 입학시키는 '특차'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당시 내 예비고사 점수는 서울 S대 가장 인기 없는 학과에 특차로도 입학할 수 있는 정도의 낮지 않은 점수였다. 비록 가장 인기 없는 학과지만 어쨌든 S대에 특차 입학이 가능할 정도의 점수였으니, S대 이외의 유명대학 비인기학과 특차 입학은 당연히 가능했었다.


하지만 나는 원하는 대학의 원하는 학과를 가고 싶었고, 또 본고사 시험에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특차를 지원하지 않고 내가 오래전부터 목표하고 있었던 모대학 인기학과에 자신 있게 응시했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한 낙방이었다.


낙방할 것이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던 실정이라 실망과 낙담이 정말 컸는데, 그날 태어나고 처음으로 그간 말로만 들어왔던 하늘이 갑자기 노래지는 현상도 처음으로 경험해 봤다. 하지만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일부 친구들처럼 재수를 해서 다음 해에 또다시 대학 시험에 응시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며칠 끙끙 앓고는 미련 없이 깨끗이 포기하고 후기 대학에 입학했다.


당시는 대학들은 전기, 후기로 나누어져 있어서 전기 대학 응시에서 떨어지면 다시 후기 대학에 응시할 수가 있었는데 외대, 성대, 한대 등이 그 시절 대표적인 후기 대학이었다.




회사에서도 비슷했다. 그룹공채로 원하는 그룹에 입사하게 되기는 했지만, 연수를 마치고 회사가 정해질 때 희망했던 계열사가 아니라 다른 계열사로 입사해야 했다. 연수성적도 워낙 안 좋았던 데다가 내가 배정받은 계열사 사업이 당시 워낙 급속히 성장하던 터라 신입사원들에 대한 수요가 유독 많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어학이 전공이었던 나는 예상했던 대로 회사 수출부로 배치받았는데 이번에도 역시 불어가 전공인 내가 희망했던 유럽 지역 담당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당시 전혀 구사할 수 없었던 스페인어가 주로 사용되는 중남미 지역 담당 부서로 배치받았다.


또 입사 후 10여 년이 지나 해외연수 과정에 선발되었을 때 난 일본에 가기를 희망했는데 회사에서는 프랑스로 가기를 원했고, 결국 난 회사의 권유에 따라 프랑스로 갔다.


프랑스에서 연수를 받고 온 이후 번째 해외 주재 근무는 당연히 연수까지 다녀온 프랑스로 가게 될 것을 예상하고 기대했는데, 결과는 다른 사람이 프랑스로 발령 나고 나는 단 한 번도 가보거나 담당해 본 적이 없는 생소한 캐나다로 발령받았다.


결국 뒤돌아보면, 내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서는 거의 평생 내가 원했던 것은 주어지지 않았고 언제나 차선이거나 또는 대안으로 주어지는 것들만을 택해 살아야 하는 그런 인생을 살아왔던 셈이었다.


그런데 마침내 예외가 생겼다. 캐나다에서 귀임 후 2년여간 본사에서 근무하는 동안 다음 주재 근무는 반드시 중국에서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기회를 계속 찾고 있었는데 드디어 그것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결국 인생의 중대사가 결정되는 순간에 내가 원했던 것이 처음 그대로 주어진 것이었으니 그만큼 중국은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중국에 발령받은 2005년 당시는 중국어가 요즘처럼 그렇게 인기 있는 외국어는 아니었고 중국어 구사가 가능한 인력도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중국 주재원 근무자는 원칙적으로 중국어가 가능한 인력을 대상으로 발령 냈기 때문에, 회사 내 몇 안 되는 그 중국어 가능 인력들끼리 서로 번갈아 가며 주재를 나가고는 했었다. 한마디로 중국은 소위 중국통으로 불리던 인력들이 주재 나가던 지역이고, 나처럼 중남미나 유럽, 북미 지역을 담당했던 인력이 주재원으로 파견되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역으로 중국통으로 불리는 인력들이 중남미나 유럽, 북미 등 중국어권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주재 나가는 경우 역시 거의 없었다. 그만큼 중국 주재 근무는 여타 지역과는 나름 분리되어 운영되고 있었던 셈인데, 중국 통도 전혀 아니고 중국어도 못하던 내가 우여곡절을 거쳐 중국 주재 인력으로 나가게 된 것이었다.


당시 내가 이처럼 간절하게 중국에서의 근무를 희망했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중국 경제와 중국 제품이 글로벌 시장에서 급격하게 부상하고 있다는 것을 2000년대 초 북미 캐나다 법인에서 근무하면서 이미 충분히 느껴서 향후에는 중국시장 경험이 직장생활에 꽤 중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당시 예상대로 중국 경제는 이후 급성장했고 이제는 미국 다음 또는 미국과 대등한 G2라 불리며 중국은 한국의 가장 중요한 무역 파트너가 되어버렸다.


둘째로는 좀 개인적인 일인데, 사실 중국 여성과의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005년이면 이미 내 나이 40이 넘은 적지 않은 나이였다. 하지만 그래도 내 욕심에는 좋은 여인을 만나서 자녀도 낳고 가정을 꾸렸으면 했는데, 한국에서는 나이 차이가 는 여인을 만나기가 어려웠고 대안으로 우리와 비슷하게 생겨서 외모에서 별 차이가 없는 중국 여인과의 결혼을 생각했던 것이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중국 여인이 좀 더 부유한 국가인 한국에 와서 살기 위해 한국인과의 국제 결혼을 희망하는 경우가 꽤 많았던 시절이었다. 물론 이제 중국도 경제적으로 급성장해 단지 물질적 이유만으로 나이 많은 한국인과 결혼하려는 중국 여인을 만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주재원으로 선발돼도 어학 자격을 따지 못하면 주재 발령이 취소되는 것이 회사 규정이라 40이 넘은 나이에 3개월간에 걸친 회사의 중국어 어학연수과정에 입소하여 정말 힘들게 중국어를 배운 후 간신히 턱걸이로 시험을 통과하고 드디어 중국이라는 땅에 발을 밟았다. 출입국 기록을 확인해 보니, 베이징 도착 시점은 2005년 9월 6일 아직은 한참 무더운 늦여름이었다.


그런데 꿈과 희망을 품고 베이징 공항에 도착할 그 당시의 감회를 글로 옮겨 적으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유독 이상하게도 베이징 쇼우두(首都) 공항에 도착할 기억은 전혀 떠오르지 않다. 그보다도 훨씬 전인 2000년에 캐나다 법인 부임할 때의 Toronto 공항 도착이나, 더욱 오래 전인 1995년 Paris 공항 도착 기억은 생생히 남아 있는데, 가장 최근 일임에도 유독 2005년 베이징 공항 첫 도착 기억만은 전혀 떠 올릴 수 없었던 것이었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 아마도 베이징 공항에는 너무나도 자주 도착했었기 때문에, 그 첫 번째 도착 기억이 이후의 기억들과 섞여버려서 그런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Paris나 Toronto에서의 거주기간은 길어야 3년 미만으로 비교적 짧았던 반면, 베이징, 광저우, 타이베이, 홍콩 등의 중화권(中華圈) 지역에는 모두 합쳐서 무려 10년 가까이나 근무했으니, 회사의 중국본부가 있던 베이징에는 출장이나 회의 등으로 적어도 그 10년간 최소 50번 이상은 왔다 갔다 했을 것이고, 그 많은 공항 도착 기억들이 서로 뒤섞여 버려 첫 번째 기억이 다른 것과 구분이 안 되게 된 것 같았다.


사진) 베이징 공항 모습. 2005년 당시 도착했던 2 공항의 사진은 분실했고, 위 사진은 이후 완공된 3 공항의 2010년 사진. 완공한 지 얼마 안돼 이용객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베이징에서의 생활을 시작해 보니, 정말 오로지 중국에서만 볼 수 있을 것 같은 말로만 들었던 놀랄 만한 것들이 많았다.


출근길 거리를 가득 메운 엄청난 인파, 그만큼 많은 자전거 행렬, 거대한 자금성 성벽, 초대형 짝퉁 시장, 도처에 있는 안마소, 요란한 중국어, 먼지 가득한 거리, 정말로 어지러운 교통질서 등등,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고 사실 좋았던 것은 중국의 모든 물품 및 서비스 가격이 한국과 비교해서 너무 저렴했다는 것이었다.


서울의 유명 호텔만큼 고급인 베이징 호텔 숙박료가 서울의 반의 반도 안 되었고, 발 안마를 한두 시간씩 받아도 요금은 1~2만 원 수준이었다. 미인들이 가득한 술집에서의 술값도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렴했다. 주택도 당시는 중국 부동산 가격이 본격적으로 급등하기 전으로 대다수의 외국인들은 비교적 적은 비용을 지불하고도 일반 중국인이 거주하는 환경이 열악한 지역에서는 완전히 분리된 최고급 주택 단지에 거주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그 시절은 외국인이 중국에서 살기에는 너무 많은 면에서 편하고 좋았던 그런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절은 이제 모두 다 흘러간 과거 얘기가 되어 버렸다. 중국 경제가 지난 20여 년간 너무도 빠르게 성장을 지속하면서 중국의 부동산 가격은 그 사이 30~40배 이상 오른 곳도 많다고 할 정도로 급등해버려 이제는 서울보다도 비싼 곳도 많아졌고, 임금이나 인건비 역시 크게 인상되어 과거 저렴한 인건비를 보고 중국에 진출했던 기업들은 이미 대다수 철수했으며, 호텔 요금 등 대도시 물가도 이제 결코 서울보다 저렴하지가 않다.


한편 경제성장과 함께 얻어진 국부 덕분에 중국의 군사력도 급성장했는데, 이러한 경제력, 군사력의 동반 상승은 결국 중국인의 자신감과 자존심까지 제고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세계 초강대국 미국과 자신들을 비교하는 지경에까지 왔다.


결국 이제는 과거와는 정반대로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과 같은 외국인이 소국 국민이라고 중국인으로부터 조롱받고 무시당하는 경우가 허다한 상황이 되었다 한다.


2000년대 중반 베이징에서 저물가를 즐기고 부자나라에서 온 외국인으로 대접도 받으며 살았던 나 같은 한국인에게는 정말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변화였다.




사실 중국은 청(淸) 나라 말기이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는 서구 열강뿐 아니라 심지어 일본으로부터도 온갖 능욕을 당해서 전 국토 여기저기를 치욕스러운 조차지(租借地)로 외세에 내줘야만 했던 어두운 시절이 있었다.


당시 중국의 조차지에 와서 살았던 백인과 일본인은 중국의 낮은 물가와 인건비를 즐기며 자신들은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던 한편 중국인은 미개하고 더럽다며 멸시하고 조롱했다.


문명국을 자처하는 영국 같은 유럽 국가는 돈을 벌기 위해 심지어 마약인 아편까지 중국인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리고 엄청난 양을 판매하는 더럽고 추한 범죄를 저질렀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청나라가 마약을 압수했다는 그런 이유로 중국을 침략해 아편전쟁이라 불리는 전쟁을 하기도 했었다.


힘없는 중국 정부는 그렇게 침략을 당하면 결국 그 국가와 조약을 체결해 사태를 봉합해야 했는데, 다양한 국가들과의 수많은 조약들이 체결될 때마다 중국의 전 국토는 조차지나 할양지라는 명목으로 점점 더 많이 외세에 빼앗겨 갔다.


만신창이 같았던 그런 청조(淸朝)가 무너지고, 장개석과의 치열한 전쟁을 거쳐 결국 모택동이 집권하게 되면서 중국은 공산화되었다.


이후 중국은 6.25 전쟁 중에 한반도에서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을 격퇴시키는 등 더 이상 결코 외세 지배는 받지 않을 만큼 군사적으로는 강해졌다. 하지만 경제적 측면에서는 참담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화려했던 혁명의 구호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모두가 잘 사는 평등사회가 구축된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다 같이 못 사는 평등사회가 이루어졌고 그러한 상태가 모택동 집권기 내내 지속되어 공산혁명 이후 수십 년간 중국인들은 전 세계 최빈국 국민 중 하나로 과거와 전혀 다름없는 아니 오히려 과거보다 더 심한 가난 속에서 그들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데 체념 속에서 숙명처럼 그러한 삶을 받아들이고 살던 바로 그 시절 등소평(鄧小平)이라는 인물이 등장해 모택동 치하의 공산주의 국가 중국에서는 상상도 하기가 어려웠던 자본주의적 요소가 반영된 개혁개방 정책을 도입하고 이를 추진했다. 그리고 그 결과 30년 전의 중국인들은 꿈도 꾸지 못했을 엄청난 경제적 발전과 부(富)를 만들어냈고, 이제는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G2로까지 중국이 부상하게 되었다.


그만큼 등소평이라는 인물이 이루어낸 업적은 대단했던 것 같다. 만일 등소평이 없었다면 중국은 현재까지 교조주의적 공산주의 이념만 신봉되고, 국민은 모두 가난한 빈곤 속의 평등한 삶을 여전히 살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또한 국가가 돈이 없으니 국방력 강화에 쓸 자금도 충분치 않아 군사력 역시 결코 지금처럼 강화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결국 중국의 변화는 모두 모택동 사후 집권한 등소평이라는 인물이 도입했던 개혁개방 정책에 그 뿌리가 있는 셈인데, 결과적으로 보면 신은 중국에게 등소평이라는 너무나 선물을 주었고, 그는 이제 떠났지만 현재의 중국인은 그가 구축한 국가의 부(富)를 향유하는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중국은 그렇게 전 세계 최빈국 신세에서 경제 대국 또 군사 대국으로 변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14년 전, 그러니까 2005년 여름 내가 베이징에 막 도착하던 그 시기만 해도 아직은 중국이 확실한 경제성장을 이루기 전으로 당시의 베이징 모습은 오늘날과 많이 달라서 한국의 70~80년대 같은 느낌을 주는 분위기가 진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베이징에 부임해서 그러한 복고적 분위기 속 공간에서 살다 보니 마치 시간을 거슬러 내가 대학 시절을 보냈던 서울의 80년대 그 시절로 되돌아온 것 같은 아련한 과거의 향수를 느끼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 베이징 주재 생활은 이런 추억과 향수 속의 생활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이제 서울보다 더 번화해 보이는 요즘의 베이징에서는 결코 그러한 향수를 느낄 수가 없게 되었으니 많이 서운하고 안타깝다.


하긴 베이징만 변했겠는가, 서울의 모습 또한 내가 어릴 때 봤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많이 변했다. 그렇게 세월과 함께 모든 것이 변해갈 수밖에 없는 것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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