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의 한자 발음 중에는 한국어의 한자 발음과 꽤 다른 것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학교'란단어는 중국어에서나 한국어에서 모두 '學校(学校)'라는 한자가 사용되는데, 이 한자를 한국어로 읽으면 '학교'로 발음되지만, 중국어로는 전혀 다른 '쉬에시아오(xuexiao)'로읽힌다.
단어에 사용되는 한자 자체부터 서로 다른 경우도 있는데, '자전거'와 같은 단어는 한국어에서는 '自轉車'라는 한자를 사용하지만중국어에서 사용되는 한자는 '自行車'로 중간의 한자가 한국어와 다르다. '회사'라는 단어도 한국어에서는 '會社'란 한자가 사용되지만, 중국어에서는 '公司'라는 전혀 다른 한자가 사용된다.
반면 '남대문(南大門)'은 중국어로도 같은 한자를 사용하며 발음도 '난다먼(nandamen)'으로 두 언어 간 차이가 크지 않다. 물건을 파는 '시장(市場)'도 마찬가지인데 한국어와 중국어 모두 동일한 한자를 사용하며, 중국어 발음도 역시 '시창(shichang)'으로 한국어 발음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 '공원(公園)'이나 '정부(政府)' 같은 단어도 한국과 중국 간 사용하는 한자가 동일하며 발음도 '공위엔(gongyuan)'과'정푸(zhengfu)로 유사하다.
2005년 베이징에 막 도착해 중국 생활을 시작하던 초기에 법인 직원들과 대화 중 어떤 특정한 중국어 단어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깜짝깜짝 놀라곤 했던 단어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공산당'이라는 단어였다.
중국어 '공산당'이라는 단어에 사용되는 한자는 한국어에서 사용되는 '共産黨(共产党)'이라는 한자와 동일하다. 또한 발음 역시도 '공찬당(gòngchǎndǎng)'으로 한국어 발음 '공산당'과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다 보니 중국인 직원들이 말하는 다른 중국어는 잘 못 알아들어도 이 '공산당'이라는 단어는 너무도 쉽게 귀에 와닿곤 했었다.
공산주의 국가 중국에서의 생활이 길어지면서 나중에는 꽤 많이 무뎌진 것이 현실이었지만, 사실 어린 시절부터 오랜 시간을 듣고 배워온 '공산주의', '공산당', '인민', '해방군' 등과 같은 단어에 대해서는 애당초부터 꽤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던것 같았다.
실제로 동족이 동족을 죽여야만 했던 비극적인 6.25 전쟁 기간 남한과 북한은 상호 간 수십만이 죽고 죽이는 치열한 전쟁을 치르어야 하지 않았던가? 오래 전도 아니고 불과 70여 년 전에말이다....
그 6.25 전쟁 기간 서울이 함락되고 낙동강 전선으로까지 후퇴하는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한국은 유엔군의 지원 덕분에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 부근에까지 진군하여 전쟁의 승리와 분단된 국토의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에 자유 진영 국가와 공산 국가가 된 중국 사이에 완충지대를 갖기 원했던 중국 공산당이 북한 공산당 정권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전쟁에 개입했다. 그리고 인해전술이라 불리는 전술을 구사할 만큼 막대한 규모의 중공군 즉 인민해방군을 한반도에 파병하여 한국군과 유엔군을다시 남으로 밀어냈다.
수치가 자료마다 좀 상이하긴 하지만 당시 한반도에 진입한 중공군 병력이 무려 250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자료도 있다. 그 시절 중공군 총병력이 약 500만 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하니 중국 전체 병력의 반 정도가 한반도라는 좁은 땅으로 밀고 들어온 셈이었다.
그리고 그 병력 중 모택동의 친 아들 모안영(毛岸英) 포함 작게 추산하면 약 15만 명, 많게는 약 90만 명의 중공군이 6.25 전쟁 중 한반도에서 전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군도 역시 약 14만 명이나 되는 인명이 전사한 것으로 집계된다.
더 뼈 아픈 사실은 6.25 전쟁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민간인의 피해가 유난히도 극심했던 전쟁이었다는 점이다. 남북한 합쳐 약 500만 명의 한국인 사상자가 있었다 하니, 당시 남북한 인구 3000만 명 기준 6명 중 1명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입었던 셈이었다.
그런데 사실 1950년대 그 당시만 해도 중국 대륙의 일부 지역에는 공산당과 싸우던 국민당군의 지지세력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또 대만해협 너머에 있는 대만 국민당군과의 전투력 차이도 그렇게 크지는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 전체 병력의 반을 동쪽 국경 너머 한반도로 진군시키는 대단히 심각한 결정을 중국의 공산당은 했었던 것이었다. 결국 6.25 전쟁은 한국으로서도 국운이 걸렸던 전쟁이었지만 중국의 공산당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운명을 거는 모험을 감행했던 전쟁이었던 셈이다.
당시 미국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의 개입을 막기 위해 중국 영토에 2차 대전 당시 일본에 투하했던 것과 같은 핵폭탄을 투하하는 것까지 검토했었다 한다. 만일에 맥아더의 이러한 계획이 실현됐다면 중국 본토는 공산당이 무너지고 당시만 해도 호시탐탐 대륙 재탈환을 끊임없이 추진하던 국민당이 또다시 중국 본토를 통치하는 국가가 되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국인은 과거 수천 년간 너무도 자주 그래 왔던 것처럼 또다시 우리 영토 안에서 중국인과 전쟁을 해야 했다. 하지만 수백만에 달하는 중공군의 인해 전술로 한국군은 유엔군과 함께 38선 이남 지역으로까지 후퇴해야 했고, 그 후퇴 과정에서 한국군 사단 병력 전체가 괴멸되는 것과 같은 치욕의 역사를 다시 되풀이해야 하기도 했었다.
반면 이와 정반대로 한국군 제6사단은 미군과 함께 전개한 전투에서 중공군 3개 사단을 괴멸시켜서 무려 2만여 명의 중공군들이 호수에 수장되거나 포로가 되는 엄청난 승전을 기록하기도 했다. 바로 '파로호(破虜湖) 전투'라고 불리는 전투인데, 당시 이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이 이 호수의 이름을 "오랑캐를 격파했다"는 의미의 파로호(破虜湖)로 개명했고 그 지명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그런데 언론 기사를 보면 중국은 얼마 전부터 한국 정부에 대해 이 호수의 이름을 변경해 달라고 노골적으로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수교 이후에도 한국과 중국 간의 관계는 그 형평성이 유지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서 한국은 중국과 수교할 때 중국이 수교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대로 대만과 단교를 해야 했었다. 하지만 중국은 북한과 전혀 단교하지 않았고 지금도 북한을 여전히 '혈맹'이라고 부르며, 한국과 북한을 상대로 등거리 외교를 해서 자신들의 국익을 챙기고 있다.
아울러 한반도 지명도 한국의 국명이 '조선'에서 '한국'으로 바뀐 지 이미 꽤 됐음에도 여전히 과거 부르던 지명 그대로 '조선반도(朝鮮半島)'라 부르며, 동해(東海)는 일본 측의 주장대로 '일본해(日本海)'라고 표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영토 안에 있는 호수에 대해서는 그 이름을 바꾸라는 황당한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부서의 조선족 직원 중 발음이나 억양 등 모든 면에서 한국인과 전혀 구분되지 않을 만큼 한국어를 매우 능숙하게 구사하는 직원이 있었다. 그녀는 원래 중국의 남부에 있는 '둥관(東莞)'이란 도시의 계열사 공장에 근무하던 직원인데 우리 부서가 신설되면서 베이징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평소 그녀의 희망이 반영되어 전입되어 온 직원이었다.
한국어가 너무나 유창해서 특별히 배운 것이냐고 물어보니, 그렇지는 않고 둥관의 계열사에 근무할 때 공장 기숙사에서 숙박했는데, 퇴근 후에 공장 안에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해서 기숙사에서 매일 한국 드라마만 봤더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한국어 억양이 한국인과 비슷하게 되었다고 했다.
애당초 한국어가 가능한 우리 동포 조선족인 데다가, 한국 드라마에 빠져 매일 표준 한국어 방송을 보다 보니 말투가 드라마 속 말투처럼 표준 한국어로 바뀐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한국어 말투가 이처럼 너무 완벽하다 보니, 그녀와 대화할 때는 간혹 내가 한국에서 한국인과 대화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던 것 같았다. 같은 동포로 외모로는 구분이 안 되는 데다가, 말투까지도 한국인과 구분이 안되었으니 당연히 그런 착각을 할 수밖에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착각에서 깨어나 그녀가 결코 한국인이 아니고 또 내가 현재 공산 국가 중국 베이징에서 중국인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번개 맞은 것처럼 깨우치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대화 중 그녀가 "나는 공산당원이다"라고 말할 때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녀의 그런 말은 사실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중국은 엄연히 공산주의 국가이고 공산당 1당 독재 하의 국가이다. 그런 중국에는 총인구의 약 6%, 즉 남북한 전체 인구보다 많은 9천여만 명의 공산당원이 있다고 한다. 그 9천여만 명이나 되는 공산당원 중에는 물론 우리 회사에 취직한 공산당원도 있을 것이고, 그녀 역시 그러한 9천여만 명의 중국 공산당원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좀 특이한 점은 중국에서 유난히 조선족의 공산당원 비율은 상대적으로 높은 것 같았다. 우리 부서에 있던 9명 조선족 직원 중 3명이 공산당원이었으니 그 비율이 33%로 중국 전체 인구 중 공산당원 비중이 약 6% 수준이었던 것에 비하면 꽤 높은 수치였다.
사실 중국의 조선족은 55개 소주 민족 중 하나이지만 다른 소수 민족과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교육 수준도 타 소수 민족은 말할 것도 없고 한족보다도 평균적으로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의 공산화 과정에도여타 소수 민족과 다르게 한족과 함께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중국의 공산화를 최전선에서 직접 주도한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 정예군이었던 팔로군(八路軍)에서 포병 부대 지휘관으로 활약했던 '김무정(金武亭)'이 그런 인물이고, 2018년 영결식에 시진핑까지 직접 찾아가서 조문을 했던 '조남기(趙南起)' 역시 팔로군 간부 출신이다. 하지만 가슴 아픈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사람 모두가 6.25 전쟁 기간에는 북한의 군인으로서 참전하여 우리 한국군 살상에 적극 참여했던 인물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남북한 모두 합쳐 약 5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6.25 전쟁이 발발했던 것이 불과 70여 년 전 일이다. 그리고 그 잔혹한 전쟁을 겪었던 사람들중 다수는아직도 엄연히 이 땅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나는 중국 베이징에서 근무하면서 평범한 중국인도 아니고 바로 그 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결국엔 그 많은 한국인 살상에 적극 기여했고, 또 민족의 통일도 막아 버린 그 중국 공산당 소속 공산당원들과 같은 회사의 사무실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주 앉아 웃으며 농담도 하면서, 같이 일하고, 같이 식사하고, 같이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과거는 과거일 뿐 그런 모습이 이제는 당연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불과 70여 년 전 일이었던 그 참혹한 6.25 전쟁을 생각하면 그런 나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이러니한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역시 적지 않게 들기도 했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러한 상황은 한국과 중국 간에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미국은 2차 대전 당시 원자폭탄이라는 비인간적인 대량살상 무기를 역사상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으로 일본을 대상으로 사용했다, 그것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라는 민간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던 도시에 두 번씩이나....
그 결과 그 도시에 거주하고있었던 민간인 포함 무려 30만 명에 달하는 인명이 폭탄 투하 즉시 또는 이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당시 히로시마의 인구가 약 34만 명, 나가사키의 인구가 약 24만 명이었다 하니, 두 도시 인구의 반 이상이 그 핵폭탄 투하 한 발로 생사가 바뀐 셈이다.
하지만 "국제관계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는 말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 대전 종전 이후에는 미국과 일본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동맹국중 하나가 되었다. 중국과 러시아라는 공동의 적이 존재하는 것이 그런 관계를 유지하게 된 요인일 것인데, 종전 이후 양국 간 관계도 결국 이 국제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된 셈이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공산당과 한국이 6.25 전쟁으로 얽히게 된 관계도 그저 지나간 과거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옆자리에 앉아 있는 직장 동료가 어느 날 갑자기 "나는 공산당원이야!"라는 말을 한다면 그 말를 듣고 나처럼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사람들도 여전히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