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 운하와 중남미의 인도인 (2-2)

■ 그 출장자의 서글픈 기억들 (8편 중남미-10)

by SALT

88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출장으로 방문했던 그 시절 중남미 도시들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파나마시티, 파나마

Panama City, PANAMA



10. 운하와 중남미의 인도인 (2-2)


전편 "운하와 중남미의 인도인 (2-1)"에서 이어짐....




전 세계에 살고 있는 중국 화교들의 해외 이주 역사도 매우 오래됐지만 인도인 또한 중국인 못지않게 해외 이주 역사가 꽤 깊다. 중국인만큼이나 인구가 많았던 인도인들이 해외로 퍼지게 된 계기는 중국인처럼 무역 또는 노동자로 이주하게 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인도인의 해외 이주 역사는 중국 경우와 좀 다른 특수한 상황도 있었는데, 바로 인도를 식민 지배했던 영국의 해외 식민지 관리 정책이 인도인들을 전 세계 곳곳으로 퍼지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즉, 영국은 1차 대전에 약 175만 명, 2차 대전에 약 250만 명의 인도 군인을 전 세계 곳곳의 전쟁터에 투입할 정도로 막대한 인구를 가지고 있던 인도의 군사력과 노동력을 매우 중요한 인적 자원으로 활용했던 것인데 바로 이런 과정에서 아프리카, 동남아, 중남미 등 전 세계 영국 식민지 중심으로 인도인이 곳곳에 흩어져서 거주하게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홍콩에도 인도인이 꽤 있는데 이들 중에는 과거 영국이 홍콩을 통치하던 시절에 영국군의 일원으로서 홍콩에 주둔했던 인도인들의 후손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영국 식민지배 시절 홍콩의 인도군 모습)

https://gwulo.com/atom/18406

(유럽 전투에 영국 식민지로서 참가한 인도군)

https://n.news.naver.com/entertain/article/109/0003587133

(영국군의 인도인 부대)

https://en.m.wikipedia.org/wiki/British_Indian_Army


한편 파나마 운하의 건설에도 적지 않은 인도인 노동자들이 참여를 했었다. 원래 이들 대부분은 영국 지배를 받던 인근 카리브해 섬에 있던 인도인들이었지만 파나마 운하 건설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자 파나마로 오게 되었고, 이후 운하가 완공된 이후에도 일부는 파나마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리고 콜론이란 무역 기지 설립 계획이 발표되자 파나마에 남아있던 인도인들은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이후 콜론의 본격적 가동과 함께 콜론 무역상으로 화려한 변신을 해서 콜론에서 자리를 잡는 것에 성공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콜론의 무역 상권 대부분은 인도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중남미에 있는 파나마 콜론에 출장을 가서 상담을 하기는 했지만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거래선은 엉뚱하게도 대부분 인도인들이었다.


(파나마 및 인근 카리브해 인도인 이민 역사)

1. https://en.m.wikipedia.org/wiki/Indians_in_Panama

2. https://en.wikipedia.org/wiki/Indo-Caribbeans




Casa Bee란 콜론 거래선도 사장이 역시 인도인이었는데 이 회사는 당시 우리와 거래하던 무역 업체 외에도 시내에 고급 호텔도 소유하고 있을 만큼 여러 사업을 하고 있었다. 이 회사 사장에게 파나마에 출장 간다고 연락하니 이왕이면 자신이 운영하는 호텔에 투숙하라고 해서 그 호텔로 예약을 했다.


그런데 호텔에 도착해 Check-In 하면서 카드로 계산하지 않고 현찰로 계산하겠다고 했더니, 프런트 데스크 종업원이 Deposit(보증금)을 요구했는데, Deposit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해, "왜 돈을 먼저 달라하느냐? 나갈 때 계산하는 것 아니냐?"라고 몇 차례 언급했다. 그랬더니 그 종업원이 나중에는 버럭 짜증까지 내기도 했다.


투숙객이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도주할 것에 대비해서 미리 일정 금액을 담보로 받아 두는 것이 Deposit의 개념인데,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호텔에서 자 본 적이 없는 말단 신입 사원이 그런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 망신당한 경우였던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답답하다고 해도 종업원이 손님에게 그렇게 대놓고 버럭 짜증을 냈던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전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시절 중남미에 나름 팽만했던 'Chino'라 불리던 동양인들에 대한 비하 의식도 어느 정도는 작용했을 것이다.


한편 그 당시는 출장을 다녀온 이후의 경비 정산이 실제로 발생했던 비용 영수증을 증빙으로 정산되었던 것이 아니라, '하루당(日當) 얼마' 이런 식으로 금액을 정해놓고, 출장을 다녀오면 영수증 관련 없이, 하루 일당 X 날짜 이런 식으로 정산해 주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때로는 현찰이 많이 남게 되면 호텔 같은 곳에서도 카드를 사용하지 않고, 현찰로 계산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별로 쓸 곳도 없는 중남미 각 국가별 현찰을 굳이 한국까지 다시 가지고 올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정액 정산하는 제도가 적용되던 시절이다 보니 출장 한번 다녀오면 꽤 큰 금전적 이득을 보는 경우도 많았다. 출장 기간에 매우 저렴한 호텔 등을 이용해서 비용 지출을 최대한 줄이면 약 보름 정도의 출장 경우 정산할 때 수십만 원 이상의 목돈이 남게 되는 경우들적지 않았던 것이었다. 90년대 당시의 물가를 감안하면 정도의 돈은 꽤 큰돈이었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해외 출장 다녀오면 같은 부서원들에게는 항상 술 한잔씩 사기도 했던 것이 그 당시의 관행이었다.




'Casa Bee'라는 거래선의 인도인 사장 이름은 지금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데 바로 Mayani였다. 지금까지도 이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이 분에 대해서는 잊을 수 없는 특이한 기억이 두 건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한국에 출장 온 그를 김포 공항에서 만나 회사로 데려오는 것과 관련된 일이었다. 당시 해외 수출부서 신입 사원들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해외 거래선이 한국에 오면 회사에서 배정해 주는 차를 타고 공항에 가서 그 거래선을 회사로 모셔오는 일이었다.


선배사원들이 누가 언제 오니 배차해서 데려 오라 하면, 흰 종이에 거래선 이름을 적어 김포공항에 가서 (그때는 인천 공항이 없었다) 얼굴도 전혀 모르는 그 사람이 나올 때까지 그 종이를 마냥 들고 서 있다가 마침내 그 사람이 종이 위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보고 내게로 오면, 차량에 태워서 함께 회사로 가는 것이었다.


그날도 선배가 파나마에서 오는 거래선을 데려오라 해서 흰 종이에 우리 회사 이름을 영어로 적어 공항에 가서 들고 서 있었다. 통상 거래선 이름을 적어서 들고 가는데, 왜 그날은 우리 회사 이름만 적힌 종이를 들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데 아마도 급하게 서둘러서 가느라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이 사소한 것 같은 실수가 불과 몇 시간 뒤에는 매우 큰 사고로 연결되는 불씨로 작용하게 될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 종이를 들고 입국장에 한참 서 있다 보니, 어떤 외국인이 내게로 왔다. 그는 우리 회사 이름을 말하며 미팅이 있어서 한국에 왔고, 미스터 김(Mr. KIM)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회사 이름도 정확히 일치하고 내게 그 일을 시킨 선배사원 역시 김 씨였던 터라 바로 그 사람을 데리고 회사로 돌아와 상담실로 안내하고 선배에게는 거래선이 도착했다고 전화 연락을 했다.


한편 회사로 오는 도중에 차 안에서 그 거래선이 우리 회사 제품과 전혀 관계없는 항공기 얘기를 자꾸 해서 당시 정말 많은 것을 모르던 신입사원이었지만 그래도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었다. 하지만 아마도 우리 회사가 항공기 관련 사업도 일부 관여하나 보다 이렇게만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잠시 후 선배가 상담실로 오더니 갑자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 분은 누구시냐?, 공항에서 데려왔다는 거래선은 어디 있느냐?"라고 내게 묻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더 놀라서 그 거래선에게 "당신 누구냐? 누구를 만나러 왔느냐?"라고 다시 한번 물었다. 그 외국인의 답은 자신은 "OOO 회사의 Mr. KIM 만나러 왔다"라고 공항에서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잘 들어보니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인지한 순간 나는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회사의 이름은 내가 다니던 회사 이름과 정확히 일치했는데 회사 이름 뒷부분이 달랐던 것이다. 즉 내가 다니는 회사가 아니라 같은 이름을 가진 회사지만 항공기와 관련된 사업을 하는 그룹 내의 다른 관계사를 말하는 것이었고, 그 회사에 있는 또 다른 김 씨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이미 늦었지만 사실 생각을 보면 한국에 김 씨가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또 우리 그룹에 속하는 그 많은 계열사들의 이름이 거의 모두 같은 회사 이름으로 시작한다는 것 또한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선배가, 그다음으로는 내가 놀랐지만, 이제는 엉뚱한 사람을 따라온 그 불쌍한(?) 외국인 거래선이 놀랄 차례였다. 자신이 엉뚱한 곳으로 끌려왔다는 사실을 인지한 그는 너무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항공기 타고 멀리 외국에까지 와서 엄한 사람 만나서 엄한 회사 상담실로까지 끌려 왔으니....


급하게 다른 동료에게 부탁해, 그 외국인은 원래 만나기로 돼있던 관계사로 차 태워 보내고, 나는 다시 김포공항으로 이동했다. 당시만 해도 국제선 공항은 김포에 있어서 서울 시내에서 그다지 멀지도 않았고, 차도 안 막히는 시간이라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빨리 도착했다 해도 이미 항공기가 도착한 지 2시간도 넘는 시간에야 겨우 다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는데 다행히도 공항 입국장에서 멍하니 기다리고 있던 그 거래선을 만날 수가 있었다. 거래선이 바로 Mayani 사장이었던 것이다.


Mayani 사장은 2시간도 넘게 공항에서 기다렸음에도 연신 미안하다고 하는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이 아무런 화도 내지 않고 묵묵히 차를 타고 회사로 왔다. 화난 표정도 아니고, 당연히 즐거운 표정도 역시 아니며, 그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정시에 호텔에 데리러 갔음에도, 자신이 약속시간 오해했던 것은 인정하지 못하고, 늦게 왔다고 난리 법석을 떠는 요즘 말로 소위 '갑질'하는 거래선도 몇 차례 겪었던 터라 그러한 초대형 사고에도 그저 무덤덤한 모습으로 조용히 따라오는 그 거래선이 너무나도 감사했다.


어쨌든 이 황당한 사건으로 인해 나는 반성문까지 작성해야 했고, 신입사원 시절 내내 이 사건은 꼬리표처럼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니는 우스개 거리로써 남아 있게 되는 시련을 겪어야 하기도 했다.




Mayani 사장에 대한 두 번째 기억은, 몇 년 후에 중남미로 가는 항공기에서 우연히 그를 다시 만났을 때였다. 전술한 것처럼 그는 대형 무역 업체에 호텔도 소유하고 있을 만큼 돈이 많은 갑부였다. 하지만 일등석도 아니고 비즈니스석도 아닌 의외로 나와 같은 이코노미석에 앉아 잠을 자고 있는 그를 우연히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좌석에 앉아 있는 그의 자세가 정말 너무 특이했다. 이코노미 일반석 그 좁은 좌석 공간에서 두 다리를 옆 좌석 테이블에 올려놓고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뼈가 매우 유연한 어린이나, 체조선수 같은 사람만이 가능할 것 같은 그러한 자세였는데, 당시 나이 50이 훌쩍 넘었고 배도 산처럼 나온 중년의 그 사장이 어떻게 그리 좁은 공간에서 그런 자세를 취하고, 게다가 그토록 편하게 잠까지도 자고 있을 수 있는지 정말 신기했다.


인도인이라 혹 요가를 배워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특이한 모습이었고, 한편으로는 Mayani 사장 같은 갑부가 10시간이 넘는 태평양 횡단 장거리 노선에서 나와 차이가 없는 이코노미석을 이용한다는 사실도 의외였다. 인도인들 대다수가 대체로 그렇게 검소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만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의외였다.


한편 당시 그의 옆 좌석에는 사람이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항공기에서 그렇게 좌석 앞의 테이블에 발을 올려놓고 있는 모습은 사실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아마도 요즘에는 그런 분은 없을 것 같다.




파나마라는 국가에 대한 기억은 아니지만, 파나마에서 나름 좀 특별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태어나서 처음 북한 사람을 직접 보게 된 것이었다. 북한 사람 본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냐고 할 수도 있겠고, 또 실제로 나중에 중국 베이징에 근무하면서는 해당화 같은 북한 식당에 종종 식사하러 가서 북한 사람들을 직접 보게 될 기회도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해외여행 자체가 매우 드물었던 1990년대 당시에는 북한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이 결코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북한인은 항상 얼굴은 늑대였고 또 따발총이라고 불리는 총을 들고 군복 입고 나오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런 기억 속에서 사람(?)처럼 생긴 북한인을 처음으로 마주치게 되었는데, 무서운 늑대처럼만 묘사됐던 북한인과 갑자기 마주치게 되니 나도 모르게 너무도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사실 나의 아버님도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이시니 아버님 역시 북한인이었고 나 또한 북한인의 후손이었는데도 그렇게 놀랐던 것이었다.


파나마 공항에서 항공기에 탑승하기 위해 동료와 이동하는 길이었는데, 우리끼리 쓰는 한국말 외에 어디선가 또 다른 한국말이 들렸다. 당시는 해외, 특히 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중남미에는 한국인 관광객은 당연히 거의 없었고, 출장자도 매우 드물던 시절이어서 반갑고 신기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쪽에서도 우리의 한국말이 들렸는지 우리 쪽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서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런데 뭔가가 좀 이상했다. 그들의 가슴에 배지 같은 것이 보였고 TV나 신문에서 많이 봤던 어떤 사람 사진이 그 위에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바로 북한 김정일 모습이었던 것이다 결국 북한 사람들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파나마 공항에서 만난 것이었는데, 그들이 무슨 해코지를 하려고 했던 것도 전혀 아니었음에도 그저 단순히 시선만 마주치고도 우리는 그렇게 크게 놀라고 당황했다.


재미있는 점은 그 북한 사람들도 우리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우리보다도 더 놀라는 것처럼 눈이 동그래져서 우리를 보며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아마 그들 역시 생전 처음으로 남한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니 꽤나 당황했던 것 같았는데, 매우 놀라고 얼떨떨해하는 그들의 얼굴 표정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물론 그들만큼이나 놀랐던 우리들의 모습도 역시 그들에게는 똑같은 모습으로 보였겠지만 말이다....


1988 서울 올림픽 때까지만 해도 남북한의 경제력 격차가 지금처럼 크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북한 사람도 나름대로 뭔가 파나마에 일이 있어서 출장 나온 사람이었을 것 같은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같은 민족끼리 그처럼 먼 지구 반대편 이역만리 타향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서로 반가워하지는 못할망정 인사는커녕 쌍방 모두 기겁을 하고 놀라야만 했으니....


안타깝지만 1990년대 남북한의 현실은 그랬는데, 그 이후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2021년 최근의 남북한 현실도 시절과 별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더 악화된 것 같아 보이니 답답하고 씁쓸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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