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닌 '법인' 찾아 삼만리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2편 Toronto-09)

by SALT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Toronto



9. '엄마' 아닌 '법인' 찾아 삼만리


요즘은 좀 분위기가 바뀐 것 같기도 한데, 예전 한때 그룹의 회장이라면 직원들에게는 눈도 쉽게 마주치기 어려울 만큼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의 대상이 회장이다 보니 회장과 관련된 여러 가지 에피소드도 각 기업마다 많았다. 바로 그러한 에피소드 중 하나인데, 모 그룹 회장이 미국에 출장 갔을 때 발생해 이후 오랜 기간 전설처럼 회자되었던 얘기가 있다.


사실 회사의 사장님이 출장 와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주재원 처지인데 사장님도 아니고 그룹 회사 전체를 모두 총괄하는 회장님이 미국에 왔으니 출장기간 중 가까이에서 모셔야 하는 주재원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긴장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긴장하다 보면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실수를 하게 되기도 하는데, 회장님을 태우고 운전하던 어느 미국 주재원이 목적지를 향해 가던 중 너무 긴장했던 탓에 깜빡 길을 잃어버린 경우가 생겼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주재원 입장에서는 그룹의 최고 책임자 면전에서 길을 잃어버렸다는 진실은 도저히 토로할 수가 없었고 제발 아는 길이 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심정으로 태연한 척 운전하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 그렇게 진땀을 흘리며 길을 헤매던 중 갑자기 뒷자리에 앉아있던 회장이 조용히 한마디 하더라는 것이다.


"너 길 잃어버렸지?...."


세월이 지나고 다시 들으면 다소 우스운 얘기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당시 말을 현장에서 직접 들은 그 주재원은 아마 눈앞이 캄캄하고 정말 울고만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 직장 생활을 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충분히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비록 회장님은 아니었지만 불행히도 나도 이와 같은 경험을 캐나다 법인부임하자마자 겪게 되었다.


2000년 당시는 요즘처럼 차마다 내비게이션이 붙어 있던 시절이 아니어서 지도를 보거나 기억을 동원해 길을 찾아서 운전해야 했는데, 이제 막 부임한 나는 당연히 항상 다니던 길 이외의 토론토 인근 지리에 대해서는 아직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본사에서 사업부장님이 출장 온다는 통보를 받았고, 내가 담당하는 제품과 관련이 되는 사업부장님이라 내가 그분을 모시러 공항에 가야 했다. 아직 길을 너무 몰라 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공항에서 법인으로 오가는 길은 이미 몇 차례 다녀 본 길이니 설마 무슨 일이 있겠냐는 생각으로 큰 걱정은 하지 않고 공항으로 향했다.


사업부장님 일행은 수행인력 두 명 포함 총 세 명이었는데, 공항에서 만나 내 차로 안내하니 특이하게도 사업부장님은 차 뒷자리에 앉지 않고 운전석 옆 즉 내 자리 옆의 조수석에 앉았고 수행인력 두 명이 언제나 그랬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상석 개념인 뒷자리에 앉았다. 사업부장님이 다소 독특한 분이라는 얘기를 평소 전해 듣기는 했는데, 실제 만나보니 역시 차 안에서 앉는 자리부터 꽤 독특했다.


사업부장급 임원이 왜 굳이 조수석에 앉을까 궁금했는데 그 이유를 깨우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수석에 앉자마자 내가 운전하는 내내 바로 옆에서 정말로 쉴 틈 없이 질문을 해왔던 것이다. 현지 실정에 대해 궁금한 것이 너무도 많았는데 그런 질문하려고 현지에서 근무하는 주재원 바로 자리에 앉았던 것이었다.


“요즘 우리 장사 어떠냐?”

“경쟁사는 어떠냐?”

“손익은 얼마냐?”

“토론토 평균기온은 얼마냐?”

“여기 교민은 몇 명이냐?”

“기름값은 얼마냐?”

“세금은 몇 퍼센트냐?”

“환율은 어떠냐?”


법인의 사업 현황은 말할 것도 없고, Canada라는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 거의 전 분야에 걸쳐서 수도 없이 다양한 질문을 연속해서 했는데, "저 여기 온 지 한 달 밖에 안됐고, 길도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서 어렵게 운전하고 있으니 제발 헷갈리니 않게 질문 좀 그만해 주세요"라고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당연히 사업부장님께 그러한 말은 감히 하지 못했고 끊임없이 머리를 굴려가며 잘 알지도 못하는 문제들의 답을 찾아내느라 그 질문들에 정신이 온통 팔려 있었다. 그런데 그러다 결국 대형 사고가 터졌다. 옆으로 뭔가 훅 지나간 것 같았는데 지나고 나서 생각을 해 보니 그것이 고속도로에서 법인으로 갈 때 항상 빠져나가던 출구였다. 법인 가는 길 출구를 지나쳐버린 것이었다.


출구를 놓치고 나니 이제는 생전 처음 보는 생소한 길들이 나타났는데, 그 출구를 지나서는 아직 한 번도 다녀 본 적이 없으니 법인으로 가는 길을 전혀 감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이제 어떻게 법인을 찾아가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길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실토할 생각은 나도 역시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만일 그랬다가는 전후 사정 설명 없이 그저 단순히 캐나다 어느 주재원은 자기가 주재하는 도시의 길조차도 몰라서 출장 온 사업부장님 모시고 운전하다 길을 잃는 머저리 같은 인간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계속 운전을 했고, 어떻게든 사업부장님이 눈치채기 전에 법인 가는 다른 길을 찾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길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현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옆자리의 사업부장님 질문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오히려 이제는 질문 난이도가 점점 더 전문적인 분야로까지 높아져 가고 있었다. 난이도가 높아진 만큼 여기저기 분산된 내 정신은 더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신기하게도 사업부장님은 단 한 번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고 그저 창 밖의 건물과 경치를 구경하면서 질문들을 던져서 내 얼굴은 전혀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때 내 얼굴을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길 잃고 당황해서 탈색되었다고 할 정도로 하얘진 얼굴색을 보고 놀라 어디 아프지 않냐고 말하며 차를 세우라고 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다음 출구가 나오자 일단 그곳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오긴 했는데,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 법인 가는 길을 찾으려 해도, 동서남북조차 구분이 안되고 생전 처음 보는 건물과 길만이 연속되니 도저히 법인 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멍청한 놈이라는 소문이 전 세계 지법인에 퍼지게 되더라도 모든 걸 포기하고 길을 잃었다고 실토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마침내 사업부장님도 뭔가 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연속되던 질문에서 벗어나서 처음으로 질문이 아닌 다른 한마디를 했다. "법인이 공항에서 이렇게 멀었나? 지난번에 왔을 때는 이리 멀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에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고,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실토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창 밖 저 멀리 내가 아는 법인 근처 10층 높이의 비교적 높은 RBC Royal 은행 건물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건물만 찾아가면 바로 그 옆에 우리의 법인이 있으니 이제는 당연히 법인을 찾아갈 수 있게 되었고, 그런 상황에서 길을 잃었다고 자진 신고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결국 나는 마지막까지 실토하지 않았고, 전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법인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법인 근처 RBC Royal Bank 건물 거리뷰)

https://goo.gl/maps/o9VN169aVB5k3hhs8


길을 잃고 한참 헤맸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업부장님은 당연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인지하지 못했고 법인에 도착해 업무 협의하고 저녁에 식사도 함께 잘하고 그다음 날 다음 목적지로 이상 없이 출국했다.


좀 늦었을 뿐이지 어차피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한 이상, 길 잃었다는 사실을 굳이 솔직하게 말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고 자위해 보기도 했는데, 솔직히 현지에 거주하는 주재원이 출장자들 태우고 가다 갑자기 길 잃었다고 하면 그 주재원 믿고 가던 출장자들은 얼마나 당황하고 불안하겠는가....




사업부장이 되기 전 젊은 시절 한때는 사업부의 개발실에서 철판 관련 업무를 했다는 사업부장님은 정말 특이한 질문도 많았고 궁금한 것도 많았지만, 관찰력도 역시 꽤 대단해서 차창 밖에 보이는 캐나다 건물의 철판지붕을 보고 "철판에 저런 하늘색을 입히고 유지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인데 저런 색이 노출된 채로 유지되는 것을 보면 캐나다의 도색 기술이 보통이 아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사진) 사업부장님이 꽤 특이하다고 언급했던 지붕이 있던 건물. Hurontario라는 거리에 있던 건물인데, 학교 또는 도서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리뷰 : https://goo.gl/maps/VBzdZ1huec9c61Wv7


스쳐가는 건물의 지붕 철판도 자신의 업무와 연관해서 보고 있는 것이었는데, 난 그 길을 여러 번 지나다녔지만 한 번도 그 건물 지붕이 어떤 재질 또는 색으로 되어 있었는지 전혀 관심도 없었고 인지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사업부장님의 그 말을 듣고 다시 관심 갖고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지붕 재질이 철판처럼 보였고 그 색이 하늘색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좀 연한 파란색이라 해야 할지 어쨌든 보기 드문 꽤 우아하고 아름다운 색이었다.


사업부장님은 그렇게 궁금한 것들이 많았고 질문도 그만큼 많이 하며 살아오셨으니 결과적으로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입수했을 것이고 따라서 그만큼 알게 되는 것 역시 많았던 것 같다.


그 후에도 직장 생활하면서 회의나 행사 시에 사업부장님을 여러 차례 다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분을 만날 때면 나는 오직 나만 아는 그날의 비밀을 생각나서 미소를 짓곤 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분이야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애당초 모르니 별다른 기억이 없었을 것이고, 내가 왜 회의 중 슬쩍슬쩍 미소를 짓는지 좀 이상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엄마 찾아 삼만리'라는 어릴 적 TV에서 봤던 만화 영화가 있었다. 1976년 일본에서 제작된 만화인데, '마르코'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소년이 아르헨티나로 일을 하러 엄마를 찾아 먼길을 가는 도중에 겪어야 했던 파란만장한 과정을 그린 영화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유명 만화들이 많지만 이 만화 영화도 어린 시절 매우 감동적으로 봤던 기억이 있다.


내가 캐나다에서 마르코처럼 '엄마'를 찾아 헤맨 것은 물론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법인'을 찾아서 전혀 모르는 미지의 길들을 헤매면서 품었던 그 간절한 심정만은 엄마를 찾아서 삼만리 길을 헤매야 했던 '마르코' 심정에 결코 못 미치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 찾아 삼만리)

https://www.youtube.com/watch?v=OLVw_9ABmu0


기억을 되돌아보면, 너무나도 당황했던, 지금도 입에 침이 마르는 것 같은 그런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회장님을 모시던 미국의 그 불쌍한 주재원처럼 그 실상이 발각되어서 "너 길 잃어버렸지?"라는 너무나도 끔찍한 말은 듣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완전 범죄로 넘어갔으니 그래도 나는 복 받은 주재원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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