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교실에 앉아 있다고 해서 제법 서늘해진 공기를 읽지 못하는 건 아니다. 삼삼오오 창문에 붙어 책장에는 없는 색깔을 구경한다. 4층에 위치한 교실의 유일한 장점은 창밖 풍경. 나무들 머리보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는 게, 어쩐지 우월해진 기분이다. 2교시 음악이네. 교실 건물과 동떨어진 음악실에 가는 건 분명 귀찮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신이 난다. 실로폰, 리코더, 멜로디언을 하나씩 든 우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채롭게 물든 나무 아래로 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알로록달로록 제각각인 낙엽을 서로에게 촤악 뿌리고, 꺄르륵거린다.
“이거 완전 눈 같다, 그치.”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눈 오면 좋겠다.”
“수능도 끝나니까, 우리 크리스마스에 파티하자!”
얘들아, 떨어지는 낙엽 잡으면 소원 이루어진대. 우리는 옹기종기 단풍나무 아래서 한참을 폴짝거리다가, 손에 단풍잎을 꼭 쥐고 교실로 돌아간다. 우리의 가을잎은 각자의 꿈이나 대학교가 적힌 종이 한 조각과 함께 책상에 붙었다.
석식을 먹고 나면 하늘이 단풍보다 조금 더 예쁜 색으로 물든다. 이 시간은 온도, 바람, 하늘 세 박자 모두 완벽하다. 꽃잎에서 추출한 물감으로 하늘에 수채화를 푼 것 같다. 우리는 운동장을 조금 걷다가 트랙 안쪽 잔디에 편히 앉아 버리는데, 이게 우리 세상의 피크닉이다. 살랑살랑, 부러울 게 하나 없는 풍경. 매일 보는 노을이 비정상적일 만큼 예뻐서, 우리가 너무 힘들어서 그런가 우스갯소리도 늘어놓는다. 바람이 엄청 차다. 진짜 곧 수능인가 봐. 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단풍빛 노을 아래서, 우리는 서로의 꿈을 누구보다 곧은 마음으로 소원한다.
꿈이었네.
고단했던 날이면 너무나도 생생하게 펼쳐지는 기억. 꿈일 뿐이라는 게 너무 쓸쓸해져서, 아이처럼 엉엉 울어 버리고 싶은 아침일 때가 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제대로 가고 있는 건 맞을까. 그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꿈 많고 단단하던, 온갖 용기로 무장했던 나. 그 여고생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어쩐지 아닐 것만 같아 자신감이 없어진다. 오늘 같은 날은 카페에서 무화과 파운드 케이크를 시켜 두고, 그 시절에게 말을 건네고 싶다. 있잖아, 네가 기대한 모습이랑 많이 다르지. 그래도 넌 상상도 못 할 만큼 사랑하는 것들이 생겼어. 새로운 꿈도 생겼어. 그러니 부탁인데, 네 용기를 빌려줘. 네 단풍잎보다 멋진 사람이 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