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백택, 고대 중국에서 탄생하여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도 백택을 알고 있었을까? 물론이다. 백택은 고려시대 기록부터 확인되며, 조선 멸망 직전까지 등장하고 있다. 동물계의 현자 백택,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에서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한다.
의장기로 사용된 고려시대 백택
우리나라 백택 관련 기록 가운데 가장 이른 사례는 『고려사(高麗史)』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 역시 중국처럼 백택기(白澤旗)를 의례에 사용했다. 고려시대 왕실 의장제도인 ‘노부(鹵簿)’에 관한 기록에는 백택기가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채기(彩旗)는 10개로, 좌우에 나누어 세우고 인장교(引將校)가 2명이며, 백택기는 2개로, 좌우에 나누어 세우며 협군사(夾軍士)가 24명이다...(중략)...백택대기(白澤大旗) 2개는 좌우에 나누어 두는데 인장교가 2명, 협군사가 40명이다...(중략)...백택기가 1개, 삼각수기(三角獸旗)가 1개, 주잡기(周匝旗)가 1개, 천록기(天鹿旗)가 1개, 채기가 5개인데, 인장교가 1명, 협군사가 18명으로, 오른쪽에 선다.
『숙종인현왕후가례도감의궤』 반차도의 백택기 조선 1631년, 국립중앙박물관
이외에도 『고려사』 곳곳에는 백택기에 관한 내용이 다수 확인되며 태자 행차 시 백택기를 배치한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백택이 고려시대쯤에는 우리나라로 전해졌으며, 왕실 의장기로 사용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문학작품 속 한국의 백택
백택은 문학작품에도 확인된다. 대표적인 인물은 고려 말기 학자이자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인 이색(李穡, 1328-1396)이다. 이색의 시문집인 『목은집(牧隱集)』은 고려 최고의 문장가 이색의 작품 세계가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정치, 경제, 문화적인 측면까지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바로, 이 『목은집』에 백택이 언급되어 있다. 이는 「자영이수(自詠二首)」, 즉 스스로 지은 이수시(二首詩) 중 일부이다.
장한 뜻은 죽음을 가벼이 여겼는데, 늙어서는 생명을 보전하려 하네. 부정을 물리치려 백택을 그리고, 늙음을 물리치려 청정반(靑精飯)을 먹노니...(중략)
여기서 말하는 청정반이란 도교문화 속 ‘청정석(靑精石)’으로 지은 밥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먹으면 신선처럼 불로불사의 능력을 얻게 된다고 한다. 주목할 부분은 바로 앞 문장으로 부정을 물리치려는 ‘벽사(辟邪)’ 목적으로 백택을 그린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백택도(白澤圖)는 앞서 살펴본 『백택정괴도(白澤精怪圖)』 혹은 백택을 그린 액막이 부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같은 『목은집』에 실린 작품 중 「구나행(驅儺行)」에는 새해 섣달그믐날에 액운을 물리치는 여러 풍습이 확인되는데 신라의 퇴마사 ‘처용(處容)’과 중국 전국시대의 장수 ‘오정역사(五丁力士)’, 그리고 백택 춤을 춘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자춘희도의 사자춤, 송대 11세기, 북경고궁박물원 1936년 촬영된 북청사자놀음, 국립민속박물관
백택은 조선시대 문학작품에도 등장한다. 조선전기 문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사가집(四佳集)』 「시류(詩類)」에는 태평성대(太平聖代)가 도래할 때 출현한다는 여러 서수와 그 특징을 열거하면서 백택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한 백택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명칭과는 차이가 있다.
천지조화가 만물을 잘 양육하니, 만물의 변화가 정히 아득하여라. 짐승의 겨레는 더욱 중다하거니, 짐승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 기린(麒麟)은 기이한 모습을 바쳐왔고, 해치(獬豸)도 상서를 바칠 줄 알았도다. 사택(獅澤)의 신기함은 어디에 비기랴, 추우(騶虞)의 덕은 이미 드러났도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천지조화가 만물을 양육한다는 건 성군(聖君)이 어진 정치를 행함으로써 도래하는 태평성대를 의미한다. 서거정의 시에서는 태평성대에 출현하는 기린과 해치, 추우와 함께 백택은 사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렇다면 사택은 무엇일까?
『대명회전』백택 흉배, 중국 명대 1509년경 백택 흉배 수본, 조선후기, 국립고궁박물관
아직 이에 대해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사자(獅子)와 백택 두 마리 동물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고, 백택의 이명(異名)이 사택일 수도 있다. 전통적인 백택 도상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사자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만약 백택의 이명이 정말 사택이라면 앞서 살펴본 『목은집』 「구나행」의 백택춤 또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자놀음, 즉 사자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조선 왕실의 백택
조선말기 문인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운양집(雲養集)』에는 삼나무가 빽빽한 숲이 마치 백택이 사는 곳 같다고 말하고 있다. 푸른 나무가 솟아있고, 이른 아침 안개로 가득 찬 숲속 풍경을 백택이 머무는 신령스러운 장소에 빗댄 것이다. 이처럼 백택은 우리나라에서도 성스럽고 신비한 동물, 벽사의 매개체로 인식되었다.
『순종효황제어장주감의궤』 백택기, 1926년, 장서각 왕실용 백택기, 조선후기, 국립고궁박물관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백택 이미지는 어떨까? 이는 조선 왕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고려처럼 조선 역시 백택기를 의장기로 사용했다. 현재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와 여러 조선 왕실 『의궤(儀軌)』에는 의장기로 사용된 백택기가 확인되며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실물 백택기가 남아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백택 이미지는 온몸이 비늘로 덮여 있고, 주둥이가 긴 사자 혹은 호랑이의 모습을 지니고 있어 중국에서 전해진 전통적인 백택 도상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원군 초상의 백택 흉배, 1936년, 국립고궁박물관
조선 왕실은 백택을 흉배(胸背) 문양으로도 사용했다. 조선시대 흉배 제도가 처음 논의된 기록은 『단종실록(端宗實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단종(端宗, 재위 1452-1455) 2년인 1454년 기사에는 각 품계에 따른 흉배 문양을 열거하는데 백택은 제군(諸君), 즉 왕자를 상징하는 흉배 문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의화군 복식의 백택 흉배, 대한제국 19-20세기경, 국립고궁박물관
동일한 내용은 1786년 편찬된 『전율통보(典律通補)』에도 보이며,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의 5남인 정원군(定遠君, 1580-1620) 초상과 의친왕(義親往, 재위 1900-1910)이 의화군(義和君) 시절에 촬영한 사진에도 백택 흉배가 부착된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조선 왕실의 백택은 신령스러운 서수의 성격이 강조되어 대군을 표방하는 흉배 문양으로 사용되었고 훗날, 어진 정치를 하는 성군으로 성장하길 희망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마치며
까마득한 전국시대에 탄생한 현자 백택.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만큼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랜 시간 동안 이미지는 변했을지라도 바뀌지 않은 점이 있다. 바로, 삿된 것으로부터 우릴 보호하는 수호의 존재, 평화로운 세상을 상징하는 태평성대의 표상이라는 점이다. 혼란스러운 요즘 사회, 백택이 도래하는 태평성대를 기다려 본다.
[미술 속 동물 이야기③] 동물계의 현자(賢者), 백택(白澤) 3 < 김용덕의 미술 속 동물 이야기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