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옥천에 있는 정지용 동상 /출처: 옥천군청
정지용 시 「유리창」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정지용의 시 「유리창」은 시인이 첫딸을 잃은 후에 쓴 시로 알려져 있다. 시의 말미에도 나오듯이 사랑하는 딸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첫딸 '구원'은 정지용이 스물일곱 살 때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정확한 나이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어린 나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서너 살 또는 대여섯 살 정도로 추정된다. 첫딸을 잃은 일은 정지용에게 커다란 상처로 남았다. 막내딸이 태어났을 때 죽은 아이가 돌아왔다며 이름을 ‘구원’이라고 지어주었을 정도로 첫째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첫딸과의 사별은 정지용의 시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대표작 「유리창」과 「발열」 등을 통해 시인은 그 아픔을 시로 승화시켰다. 부모에게 자식이 숨이 쉬어지지 않는 고통을 겪는 걸 지켜보는 일보다 더 가혹한 일은 없을 것 같다. 그것은 같은 고통을 경험해 보지 못한 부모로서는 함부로 위로조차 할 수 없는 아픔일 것이다. 정지용 시인은 그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의 크기만큼 아름다운 예술을 탄생시켰다.
「유리창」은 아들과 딸을 키우는 부모가 된 후에 더 심금을 울리며 강하게 와닿았다. 몇 해 전, 독서토론 회원들과 시집으로 토론을 하다가 가장 애송하는 시를 한 편씩 낭송하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주저 없이 「유리창」을 낭독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예술 작품이 있을까. 읽을 때마다 새롭고 읽을 때마다 더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삶과 죽음, 아버지의 아이에 대한 사랑, 현실과 현실 너머로 의식의 세계를 확장시키면서 영혼을 고양시키는 시의 언어들이 「유리창」에 있다.
첫 행부터 가슴을 울린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밤에 유리창을 들여다본 사람은 안다. 흐릿한 무언가가 말을 건네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을. 유리에 어른거리는 차고 슬픈 것은 더 이상 집안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의 영혼이다.
멍하니 서서 입김으로 유리창을 흐리게 해 보니, 아이의 영혼이 새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입김을 불 때마다 새는 익숙해진 듯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마치 아버지의 부름에 화답해 주는 듯이. 마치 시인과 아이가 입김 불기 놀이를 하는 듯하다. 이 장면은 아이가 숨이 쉬어지지 않는 고통을 당할 때의 모습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아버지는 어둠을 지워 보려고 계속해서 입김을 불어 본다. 그러나 잠시 밀려 나간 밤이 되돌아와 새로이 밀려 나가는 밤과 부딪칠 뿐이다. 아버지는 어둠을 밀어내고 아이의 영혼을 마주 보고 싶은 듯하다. 그 간절한 희구에 화답하듯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빛난다. 아니, 밤하늘 한곳에 분명하게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밤하늘에서 빛나고 있는 아이를 마주할 수 있기에,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우면서도 황홀한 일이 된다. 새가 된 아이의 영혼이 입김을 불 때마다 날개를 파닥거려 주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이와 헤어진 것이 아니다, 유리창을 통해서 밤마다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한. 시 「유리창」은 아버지와 딸이 나누는 영혼의 대화 같다. 아이는 날갯짓을 하며 아버지에게 어떤 얘기를 들려주었을까.
영화 '안녕 헤이즐' 포스터 /출처: 네이버 카페
영화 '안녕 헤이즐' 스틸 컷
십수 년 뒤 영화를 보다 「유리창」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소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가 원작인 영화 <안녕, 헤이즐>이다. 소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에서 헤이즐은 처음 숨을 쉴 수 없었을 때 ‘가슴이 불에 타는 것 같고 불길이 갈비뼈 안쪽을 핥으며 온몸을 태우려고 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새가 된 아이는 분명 그 고통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헤이즐보다 헤이즐의 부모에게 더 감정이 이입되는 걸 느꼈다. 모든 부모의 마음이 같기 때문일 것이다. <안녕, 헤이즐>의 줄거리로 들어가 보자.
주인공 헤이즐은 폐로 암이 전이된 말기 암 환자다. 그녀는 평소에 코로 산소를 공급해주는 기구를 얼굴에 매단 채 생활하는데, 어느 날 폐가 악화되어 집중치료실에 입원하게 된다. 고통을 줄여주는 약을 엄청나게 투여받고도 괴로워하는 딸의 침대 옆에서 어머니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 말뿐이다. “견뎌낼 수 있단다, 아가. 무서워하지 마.”
하지만 어머니는 “더는 못 견디겠어”라고 말하며 남편의 가슴으로 쓰러진다. 헤이즐의 혼수상태 의식은 그런 엄마의 오열을 바라보고 있다. 아이의 죽음을 겪는 고통은 부모에게 실제로 살이 타는 것과 같은 고통을 겪게 한다.
헤이즐은 죽어가던 남자 친구 어거스터스에게 달려가다가 저녁을 먹고 가라는 부모님과 충돌하게 된다. 어머니와 말다툼 하던 헤이즐은 자신이 죽는 순간이 오면 엄마도 자유로워지게 될 거라고 악담을 퍼붓는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헤이즐이 죽는 순간이 와도 ‘항상 너의 엄마일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헤이즐에겐 그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내가 죽고 나면 엄마는 모든 걸 놓아 버린 채 벽만 바라볼 거예요.” 어머니는 그렇지 않을 거라며 자신이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때가 왔을 때 환자 가족들을 도우며 견뎌내려고 말이야.” 헤이즐은 이게 최고의 뉴스라며 어머니를 끌어안는다.
영화 '안녕, 헤이즐' 스틸 컷
<안녕, 헤이즐>은 죽음을 앞둔 아이가 부모에게 바라는 것은 ‘자신이 떠난 후에도 부모가 자기의 삶을 살아가며 무너지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장면을 보며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정지용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참사로 딸을 잃은 아버지로 놀라운 체험담을 들은 일이 있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고 있었던 아버지는 몇 달 후 방바닥에 누워 몸부림치며 하느님을 원망하는 마음과 사투를 벌였다. 목숨보다 소중한 딸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고통으로 인해 신을 저버리기 직전 그는 놀라운 체험을 했다고 한다. 딸이 하느님 품에서 안전하게 지내고 있으며, 머지않아 다시 보게 되리라는 신의 음성을 들은 것이었다. 그 후부터 아버지는 “항상 딸과 함께 지내고 있다”라고 고백했다. 그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밝았고 샘처럼 솟아나는 기쁨으로 가득했다.
그 아버지의 이야기를 접한 뒤 나는 「유리창」의 시인이 왜 ‘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라고 노래했는지 조금은 가늠이 되었다.
이 표현에서 강조되는 것은 ‘외로운’보다 ‘황홀한’이다. 유리창으로 언 날개를 파닥거리는 새의 형상을 보는 일이 아버지에게 황홀한 일이 되는 까닭은 그 순간 아이와 분명히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정지용의「유리창」은 어떻게 나의 인생 시(詩)가 된 것일까. 「유리창」은 인생에 아무리 극심한 고통이 덮쳐올지라도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내게 안겨준 시이다. 정지용은 아름다운 시를 짓는 과정을 통해 딸과의 가슴 찢어지는 이별의 고통이 치유되는 경험을 했을 것 같다. 아이의 영혼이 유리창으로 입김을 불어 화답해 주는 것을 분명히 느꼈을 터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승의 아버지와 저승의 아이가 연결되게 하는 기적을 가능케 한 것일까.
「유리창」을 읽다 보면 내게도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인 딸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내겐 서너 살 무렵의 딸에게 나를 향한 무한한 사랑을 느낀 경험이 있다. 삼십 대 초반의 어느 주말 동생 가족에게 사고가 생겨 어머니 댁에 온 가족이 모였다.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딸이 사촌들과 베란다에서 놀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장난감을 정리하다 나도 모르게 창 너머를 우두커니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을 때였다. 어린 딸이 내게 다가와 한없이 염려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봐 주고 있었다. 그 얼굴은 내게 ‘아빠, 무슨 일로 그렇게 힘들어요? 내가 위로해 드릴게요’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성모 마리아의 얼굴을 어린 딸에게서 엿본 순간이었다.
그 딸이 어느덧 자라 결혼을 하여 호주에서 살고 있다. 언젠가는 아버지와 딸에게도 작별의 순간이 올 것이다. 먼 훗날 딸이 먼저 떠난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외로운 황홀한 심사’가 된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게 없겠다. 그렇게 되는 길은 지금, 이 순간 온전히 뜨겁게 사랑하는 길밖에 없을 것 같다. 「유리창」을 보건대 정지용은 분명 아이와 함께 있었을 때 아낌없이 사랑한 아버지였을 것 같다. 오늘 밤에도 호주의 딸에게서 영상 전화가 아내에게 올 것이다. 아내 폰으로 딸의 목소리가 들리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 화면 속으로 들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내줘야겠다.
[손병일의 문학과 영화 넘나들기 ①] 예술은 죽음을 넘어서는가? -「유리창」과 〈안녕 헤이즐〉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