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오원 장승업에 생애와 인물 됨됨이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고 이번 글에서는 장승업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살펴보며 그의 예술세계를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소개하는 대표작은 필자의 주관적인 선정이므로 감상자에 따라 대표작은 다를 수 있습니다.(필자 주)
앞의 글에서도 맨 처음 언급했듯이 오원 장승업은 거의 모든 화과에 뛰어난 기량을 선보인 화가다. 현재 전해지는 작품 중 산수·인물 · 꽃과 새 · 동물화 · 기명절지 등 모든 서화 영역에서 아주 훌륭한 작품들이 있어 그의 뛰어난 기량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수많은 화가 중 이렇게 다양한 방면에서 특출난 기량을 보여준 화가는 공재 윤두서 · 겸재 정선 · 단원 김홍도 · 현재 심사정 정도만 언급할 수 있을 만큼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위 화가들은 자의든 타의든 어릴 적부터 서화를 배우고 수련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었다. 그러나 신분이 미천하여 떠돌이 머슴살이를 하던 장승업은 어릴 적 붓을 쥘 기회조차 마련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장승업의 천재성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장승업, 미산이곡(眉山梨谷), 1891년 이전, 종이에 담채, 126.5×63㎝. 간송미술관 소장
산수화
간송미술관 소장 <미산이곡>은 짙은 먹으로 그린 산과 고목, 갈색 하늘, 푸른색의 민가, 담청색의 물빛까지 다양한 색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습윤한 물기가 묻어나 아마도 비 온 뒤의 풍경이 아닐까 한다. 화면 중앙의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를 중심으로, 좌우로 갈라지는데 왼쪽에는 서너 채의 기와집이 있고 뒤로는 미산의 큰 봉우리가 있다. 옆으로는 고목들로 둘러싸여 아늑해 보이는데 집안 내부에 시원하게 뚫린 창으로 인물들이 보인다. 좌측은 소를 타는 목동과 들밥을 머리에 이고 있는 아낙이 있다. 아낙은 어쩌면 작은 배 사공의 끼니를 위해 물가로 다가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미산(眉山)은 원래 중국 쓰촨성의 산이기에 보이는 물은 바다가 아니고 계곡일 터이다. 중국 배경의 그림이지만 기와집의 형태, 목동, 광주리를 머리에 인 아낙 등은 영락없는 어느 조선의 모습이라 중국풍이 많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노란 저고리에 옥색 치마의 여인은 물가로 가면서도 고개를 돌려 목동을 돌아보고 있으니 아마도 귀한 아들이 들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자칫 정지되어 보이는 풍경에 이 모자가 그림의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무엇보다도 산이 어두워지는 해 질 녘 조선의 어느 시골에서든 볼 수 있는 풍경으로, 감상자로 하여금 고향과 가족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아마도 장승업의 산수화 중 가장 서정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우측 여백의 제시는 이 작품을 선물 받은 ‘복거산장’의 조카가 적은 것으로 글을 쓴 시기에 신묘년 즉, 1891년 여름이다.이때는 장승업 나이 49세로 가장 필력이 좋을 때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장승업, 명마를 기르는 행복, 종이에 담채, 124×33.6㎝.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장승업, 명마를 기르는 행복, 부분
인물화
장승업은 멋진 인물화를 많이 남겼다. 앞글에서 소개한 <풍진삼협도>를 비롯하여 <왕희지휘호도>, <선인채지도> 등 명작들이 많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쌍마인물도>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명마를 기르는 행복>이란 작품을 대표작으로 꼽고 싶다.
화면 중앙에 어떤 인물이 두 마리의 말 사이에 서 있는데 머리 위로 날카로운 가시 같은 가지가 뻗어 있는 나무가 진한 먹으로 그려져 있다, 나무는 여러 모양으로 뒤틀려 있지만 결국 그 아래에 인물로 시선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역할에 충실하다. 다갈색과 엷은 밤색의 말 얼굴과 엉덩이에는 흰색 반점이 섞여 있어 장승업의 색채 배합의 뛰어난 기량을 확인 할 수 있다. 말의 얼굴을 보면 코가 위로 뚫려있어 이런 말이 진짜 존재한다면 비가 올 때 코로 빗물이 들어갈 판이다. 이런 말의 코는 콧구멍이 거의 보이지 않는 인물의 코와 대비된다. 또 동그랗게 크게 뜬 말의 눈과 게슴츠레한 사람의 눈, 탄력 있고 늘씬한 말과 비대하고 둔해 보이는 사람 등을 대비시켜 그림의 생동감을 높이고 있다. 상단 여백에는 평양 출신 서화가 호정(湖亭) 노원상(盧元相, 1871~1926)의 찬문이 적혀있다.
“오원 선생의 진짜 작품은 세간에 드물다. 안목이 있는 사람들은 서로 전하여 진품을 썩히지 않기를 바란다.”
능청스러운 인물 표정에서 장승업의 독특한 해학과 위트가 잘 드러난 작품으로 묘사, 색채, 구도 등 뭐 하나 나무랄 것이 없는 좋은 작품이라 생각된다.
기명절지(器皿折枝)
기명절지는 고동기나 도자기에 꽃가지 · 과일 · 채소 등을 곁들인 일종의 정물 그림으로 조선 후기부터 조선 말기까지 크게 유행했던 그림의 형식이다. 특히 조선 말기에는 거의 대부분 화가들이 한두 점씩은 기명절지화를 남기고 있어 매우 각광받던 분야임을 알 수 있다. 장승업의 기명절지 대표 그림으로는 <수선화와 그릇>을 꼽고 싶다.
장승업, 수선화와 그릇, 비단에 담채, 110.9×4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 맨 위에는 향로처럼 보이는 청동기 한점이 있는데 이것은 솥의 일종인 정(鼎)이다. 정은 그 자체로 신비한 힘이 있어 귀신도 쫓을 수 있다고 여겨서 기명절지화에 자주 등장한다. 그 아래에는 벼루가 있는데 이상하게도 뒤집어져 그려놓았다. 그 아래 수선화와 돌배 형태의 열매가 있고 맨 하단에는 난초가 배치되어 있다. 보통 정물화는 단조로움을 얼마나 잘 극복하는가가 관건인데 장승업은 사물의 배치를 반원형으로 배치하여 운동감을 만들었다. 또한 벼루를 뒤집어 그려 뻔한 그림이 아닌 재미있는 그림이 되었다. 이런 엉뚱함이 장승업표 해학이라 할 수 있다. 우측에는 구룡산인(九龍山人) 김용진(金容鎭, 1878~1968)이 제시를 적었다.
“오원의 필치는 매우 뛰어나 사람들이 우러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선운과 아치는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대 장승업을 직접 접했던 오세창은 역작 『근역서화징』에서 오원의 기명절지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날랜 운필로 번개같이 그리되, 묵색이 빛나고 채색이 은근하며 화면에 신운이 떠올랐다” 기물에서 보이는 즉흥적인 필선, 파묵과 담채의 조화로움, 해학과 생동감 등 오세창의 안목이 틀림없음이 확인된다.
영모화(翎毛畵)
장승업은 모든 화과를 전부 잘 그렸지만 그중 가장 뛰어난 한 분야를 꼽으라면 단연 영모화를 꼽을 수 있다. 영모화는 새와 동물을 소재로 그린 그림으로 동물화라고도 한다. 원래는 새 그림만을 지칭했으나 근세에 들어 영모를 새 깃털과 동물 털로 확대 해석하여 화조화와 동물화를 포함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장승업의 영모도는 단독보다는 병풍형식으로 많이 남아 있다. 서울대박물관에 영모화 8폭 병풍이 두 점, 10폭이 한 점 있고 국립중앙박물관과 경기도박물관에도 10폭 한 점씩 남아 있는데 모두 뛰어난 작품들이다. 아래 <호취도>도 장끼와 까투리를 소재로 그려진 <쌍치도(雙雉圖)>와 쌍폭(雙幅)을 이룬 것을 보면 아마 어느 병풍에서 따로 떨어진 작품이 아닐까 추측된다.
장승업, 호취도(豪鷲圖), 19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135.5×55.0cm, 호암미술관 소장
좌측의 고목이 서 있고 위, 아래로 가지가 뻗어 있다. 위쪽 가지는 ‘ㄹ’ 모양으로 심하게 뒤틀려 있고 아래 가지는 상대적으로 자연스럽게 곧게 뻗어 있다. 각 가지에 매가 한 마리씩 앉아 있는데 뒤틀린 가지의 매는 먹이를 노리는 듯 목을 아래로 길게 빼 몸을 뒤틀고 있고 곧은 가지의 매는 사냥을 끝낸 다음인지 자연스럽게 앉아 살짝 고개만 돌리고 있다. 이렇게 가지와 매는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도 상하를 대비시켜 긴장감을 불어넣고 있다. 몰골법으로 그려진 매와 고목의 표현에서 빠른 붓의 속도감이 느껴진다. 원래 매는 사람의 세 가지 불행, 물, 불, 바람을 막아주는 벽사의 의미로, 부적으로도 많이 그려졌다. 당시 일본과 서구열강의 침략에 바람 앞에 등불인 조선의 현실에서 나라의 액을 물리치길 바라는 바람을 담았을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는 매의 용맹함과 결기를 빠른 붓질로 잘 표현하여 ‘기운생동(氣韻生動)’이란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적절한 대비와 구도도 안정감이 돋보여 장승업의 영모화 중에서 단연 수작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4가지 분야에서 장승업의 대표작을 살펴보았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이 대표작들은 저의 주관적인 평가이니 이 작품 외 뛰어난 많은 작품도 있음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우리가 여전히 장승업 그림을 기억하고 있다면, 거리를 떠돌던 천한 소년에서 당대 최고의 화가가 된 장승업도 저 하늘에서 기뻐하지 않겠는가.
[한국 근대사를 빛낸 천재 서화가 - 장승업 ②] 조선시대 서화계의 마지막 불꽃(2)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