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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24. 2024

어느 작가와의 만남

[사진가의 펜으로 보는 세상]

하얀 아침
하얀 아침, 1985

 오랜만의 해외여행 길이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탑승권을 받고 비행기가 보이는 곳에서 대기를 하는 시간이면 그 설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오늘은 내가 알지 못하는 작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나는 사전에 이 작가에 대하여 스터디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건 게으름이 아니라 낯선 작가의 작품을 내가 가진 직관으로만 관찰하고 해석해 내고 싶어서였다. 누군가가 핑계처럼 쏟아낸 이상한 철학 같은 글귀들을 도통 믿지 못하는 나의 생각도 한 몫 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타인에 의존하지 않고 나를 믿고 밀어붙일 참이었다.


대략 6시간을 날아 하노이에 도착했고 낯선 골목을 누비던 택시가 멈춰 선 곳은 그가 운영하는 미술관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작가의 이름으로 된 미술관을 가지는 것이 사실상 힘들다고 하니 그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은 그는 이곳에서 이미 국민 화가라고 불리는 아주 유명한 인물이다. 6층으로 된 건물에 이백에서 삼백 점 정도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나는 작가의 엄청난 스펙트럼을 보았다. 이것은 좋은 용어로는 다양함이고 나쁜 용어로는 '이건 뭐지?' 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그 공간에 침투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작가를 한국에 소개하려는 입장에서 나와 맞지 않는 작품이야 거르면 그만이기에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대신에 나는 몇 시간을 꼼꼼하게 가능성이 높은 작품 위주로 들여다보았다. 전시 기획은 서울의 한 갤러리가 주관하고 그 외에 한두 군데 정도의 화랑에서 동시에 오픈하는 것으로 기획했다. 당연히 이 여행에 화랑의 관계자가 동행하였다. 전시는 내년 봄 두 달로 예정하고 그 이전에 몇몇의 아트 페어에 작품을 소개하기로 했다. 작품 몇 점을 가져 오고자 했고 작가도 동의했다.


모든 합의를 첫날에 끝내고 우리 일행은 두 번째 날에 다시 식사를 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런데 작가가 예상하지 않은 제의를 해 온 것이다. 우리가 가져가는 작품 중 하나를 구입하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다시 회의 끝에 이는 상식에 반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좋은 결론을 위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는데 다시 두 번째 요구를 들고 나왔다. 나머지 두 개의 작품도 판매를 조건으로 일정 금액을 지불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온전한 갤러리와 작가와의 관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꾸 변경되는 조건은 이내 신뢰감을 무너트렸다. 우리는 모든 조건을 거부하고 아트 페어 출품을 포기했다.


문제는 본 게임인 전시회였다. 자신이 없었다. 이미 무너진 신뢰로 인하여 일을 더 이상 추진할 수 없었다. 작가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누군가가 현금을 가져와서 작품을 구입했다고 자랑하며 돈 봉투를 보여주고, 이틀 후 대통령을 만나러 대통령궁에 간다는 전혀 연관이 없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이 대목에서 마침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작가의 한국 전시는 없는 것으로 마음먹었다. 작가의 순수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신뢰가 무너진 상태에서는 어떤 것도 불가함을 알기에 더욱 그랬다.


그 일 이후로 나는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주어진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작가, 갤러리 그리고 전시 기획자에 관한 것이다. 미술 시장에서 이들은 공생 관계이다. 갤러리와 작가의 관계는 정확히 동행의 관계이다. 서로 존중의 대상이다. 수직의 관계가 아닌 수평의 관계이다. 이들의 관계는 비가 올 때 함께 우산을 쓰고 앞으로 나아가는 관계이며, 무거운 짐을 나누어 지고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관계이다.


허탈한 여행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언제나 플러스는 아니기에 이 또한 나의 경험으로 축적하는 것에 만족하려 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이것이 도움이 되어서 내게 돌아오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하노이를 가로지르며 하늘로 치고 올랐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이해가 어려운 그림들을 다시 되뇌이고 있었다. 2024년 3월.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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