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경채, 류훈 부자의 2인전 《공(空)-존》이 서울 학고재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는 7월 9일(수)부터 8월 9일(토)까지 한 달간 진행된다. 막바지에 접어든 이번 전시에서 두 세대의 시선이 한 지점에서 만나는 순간을 마주한다.
《류경채·류훈 공(空) - 존》전시 포스터 /출처: 학고재갤러리
이번 전시에는 류경채의 후기 추상회화 15여 점과 류훈의 조각 작품 24점이 함께 출품되었다. 기하학적 형태가 돋보이는 류경채의 회화와 묵직한 금속으로 빚은 류훈의 조각이 한 공간에서 만나며, 두 작가가 만들어낸 평면의 여백과 입체의 무게가 교차한다. 그 사이로 팽팽한 긴장이 감돌며 두 매체는 균형을 찾아간다.
전시 제목 ‘공(空)-존’은 이러한 공간적 경험과 맞닿아 있다. ‘공’은 생성의 가능성이 움트는 시작점이고, ‘존’은 그 여백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흔적이다. 두 작가는 서로 다른 시대와 매체를 통해 질서와 균열 사이에서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관람객은 두 매체 사이를 천천히 오가며 시대를 넘어 이어진 사유의 흐름을 체험한다.
류경채, (좌) 축전(祝典) '91-4, 1991, 캔버스에 유채, 134x134cm (우) 축전(祝典) '91-2, 1991, 캔버스에 유채, 134x134cm, 학고재갤러리 /사진: 허유나
류경채(1920-1995)는 구상에서 추상으로 이행하는 한국 현대회화의 전환기에 활동한 화가이자 교육자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을 마친 뒤 귀국하여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폐림지 근방>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다. 이후 이화여대, 서울대 등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후기에는 자연과 존재의 본질을 기하학적 회화로 풀어냈다. 전시에는 그중 대표작인 <염원>과 <날> 시리즈 작품이 포함되어 작가의 응축된 사유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류경채, (좌) 염원(念願) '92-6, 1992, 캔버스에 유채, 135x135cm (우) 염원(念願) '92-5, 1992, 캔버스에 유채, 135x135cm, 학고재갤러리 /사진: 허유나
류경채의 1992년작 <염원>은 화면의 한가운데에 놓인 원형 구성이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끈다. 이 원은 한 겹씩 번져 나가는 색면과 맞물리며, 마치 숨을 쉬듯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탄생과 소멸, 순환의 이미지는 단순한 도상적 상징을 넘어 화면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호흡하도록 이끈다.
류경채, (좌) 날 '82-4, 1982, 캔버스에 유채, 162x130cm (우) '82-4, 1982, 캔버스에 유채, 162x130cm, 학고재갤러리 /사진: 허유나
함께 전시된 <날> 시리즈는 하루하루의 시간과 기억을 색면으로 쌓아 올린 기록이다. 사선과 직선, 크고 작은 면들이 한 화면 안에서 미묘하게 맞물리는데, 그 구조 안에는 시간의 흐름 속에 단정한 질서로 존재하는 기억들이 있다. 이러한 면들은 서로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한 긴장을 만들어내며, 기억에 켜켜이 쌓인 일상의 시간성을 드러낸다.
류경채의 후기 회화는 표면적으로는 서구 기하학적 추상화의 형식을 따르지만, 그 리듬과 여백의 감각은 명백히 동양적이다. 그의 작품은 절제된 구성 속에서 서정성과 내면의 사유를 동시에 이끄는 독자적인 회화 언어를 완성했다.
류훈, 형상, 1993, 브론즈, 52x16x52cm, 학고재갤러리 /사진: 허유나
반면 류훈(1954-2014)은 청동, 철, 스테인리스 등의 묵직한 물질을 다루며 입체적인 조형을 전개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친 그는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대표작인 <공존> 시리즈가 이번 전시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진다. 류훈은 류경채의 회화에서 드러나는 구성과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철학적 사유에 주목하면서도 이를 조각으로 확장해 실험적인 시도를 이어갔다. 철과 청동으로 이루어진 조각은 표면이 매끄럽지 않고, 비대칭적인 구조를 가졌다. 조각을 관통하는 구멍과 곳곳에 파인 틈은 무게감 속에서도 불안정한 호흡을 만들어내며, 작품 전체에 긴장을 불어넣는다.
(좌) 류훈, 공존, 2012, 브론즈, 47x10x47cm (중) 공존, 2011, 브론즈, 80x15x50cm (우) 공존, 2012, 브론즈, 68x10x36cm, 학고재갤러리 /사진: 허유나
류훈은 생전 작가 노트에서 “완전한 독립도 없고, 절대적인 의존도 없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존재하며, 긴장 속에서 균형을 이루고, 차이 속에서 조화를 찾는다”고 적었다. 작가는 ‘공’에 대한 사유를 넘어 독립과 의존이 얽힌 존재들이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 여백 속에서 존재들이 불확실함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순간을 조각으로 풀어냈다.
<공존> 연작은 전시장 안에서 불규칙적인 간격으로 배치되어 작품 사이의 공기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미묘한 거리감은 작품의 유기적인 형태와도 맞물려 더욱 동적인 흐름을 만든다. 여백 속에서 형태와 공간은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시선과 사유 또한 그 흐름을 따라 확장된다.
전시전경, (좌) 류훈, '공존' 연작, (중) 류경채, '날'연작, (우) 류훈, '공존' 연작 /사진: 허유나
전시의 후반부에는 류훈의 <공존> 시리즈와 류경채의 <날 ‘81-4> 작품이 나란히 놓였다. 류경채가 탐색한 자연의 서정과 류훈의 입체적인 실험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한 공간 안에서 조용히 긴장을 형성한다. 두 작가는 혈연으로 이어져 있지만 살아간 시대와 경험, 각자의 조형 언어는 다르다. 류경채는 절제된 색면의 회화, 류훈은 열린 구조의 조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깊은 사유와 본질에 대한 질문은 한 지점에서 맞닿아 있다.
(좌) 류훈, 공존, 2012, 브론즈, 36x10x68cm (우) 류경채,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78-3, 1978, 캔버스에 유채, 162x130cm, 학고재갤러리 /사진: 허유나
류훈의 조각은 보는 각도에 따라 형태의 구조와 틈이 달리 보이고, 류경채의 회화와 함께 놓일 때 공간 전체에 여백과 밀도가 교차한다. 감상자는 평면의 화면과 입체 조각 사이를 오가며, 두 세대의 사유가 이어지고 확장하는 과정을 체험하게 된다.
이 전시는 단순한 부자전(富者展)을 넘어 ’변형된 계승‘을 보여준다. 세대와 시간의 간극을 넘어, 철학적 사유가 예술을 통해 어떻게 계승되며 변주되는지를 드러낸다. 작품 사이에 깃든 미묘한 긴장감과 불완전함 속에서, 관객은 묵묵히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우리는 공존하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성장해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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