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고영애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미술 작품보다 아름다운 현대미술관 60곳을 프레임에 담아 소개한다. 뉴욕현대미술관부터 게티센터, 바이에러미술관, 인젤홈브로이히미술관 등 현대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12개국 27개 도시에서 찾은 미술관들을 생생한 사진과 맛깔스런 건축 이야기로 안내한다.
비트라 디자인 박물관의 전경 (사진 고영애)
스위스 제2의 도시 바젤은 스위스, 독일, 프랑스의 경계에 위치한 국경도시이며 세 나라의 예술, 건축, 문화적 정서를 아우르는 가장 아방가르드한 예술과 건축의 도시다. 라인 강을 따라 형성된 바젤은 중세부터 종교와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다. 바젤은 세계 최초의 공공 미술관을 비롯하여 만화박물관, 종이박물관 등 약 30곳의 독특한 박물관이 산재해 있다.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바젤 대학교는 1460년 바젤 시민에 의해 설립되었고 이 도시의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유럽 굴지의 미술 시장으로 발전하면서 매년 6월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미술 시장인 바젤 아트 페어가 열린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보석・시계박람회와 바젤 아트 페어가 열릴 때에는 세계 각국의 수많은 컬렉터들이 이곳을 찾는다. 또한 중세의 고풍스러운 건축과 헤르조그 & 드 뫼롱, 마리오 보타, 렌조 피아노, 자하 하디드 등 기라성 같은 현대건축가들의 건축물을 한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곳으로 예술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도시다.
바젤에서 외각으로 30분 정도 달리면 세계 예술인들이 찾는 비트라 디자인 박물관이 나온다. 비트라는 스위스 가구회사이지만 공장은 독일 국경의 바일 암 라인(Weil am Rhein)에 있다. 이 공장 전체를 비트라 캠퍼스(Vitra Campus)라고 부르며, 그 안에 프리츠커 상 수상자 다수가 설계를 맡은 건물들이 비트라 캠퍼스를 채우고 있다.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한 비트라 디자인 박물관, 안도 다다오의 컨퍼런스 홀, 자하 하디드의 소방서, 알바로 시자의 비트라 공장이 먼저 들어섰다. 이후 2010년 헤르조그 & 드 뫼롱의 비트라 하우스와 2012년 세지마 카즈요와 류에 니시자와의 공장 건물 등이 새롭게 들어섰다.
산업가구디자인과 건축 분야에 있어 중요한 박물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비트라 디자인 박물관은 프랭크 게리가 유럽에서 설계한 최초의 건축물이다. 그는 전통적인 건축 형태로부터의 과감한 이탈을 끊임없이 시도하며 자유롭고 독특하고 유머러스한 건축물을 선보여 20세기의 모더니즘 건축을 해체한 건축가로 불린다. 현대건축은 예술과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프랭크 게리의 비트라 디자인 박물관은 건축이라기보다는 커다란 예술 조각품을 보는듯하다. 비트라 디자인 박물관의 파사드는 입체파 조각처럼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형태로 보였다. 내부의 전시 공간은 마치 뒤틀린 박스 형태와 흡사하였고 방마다 바닥과 천장의 높이도 각각 달랐다. 가구들을 공중에 매달아 놓은 독특한 전시 역시 신선했다. 가구디자인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주요한 제품들로 구성되어 있는 1800점 정도의 컬렉션도 볼거리다. 또한 이 뮤지엄은 가구의 전시뿐만 아니라 가구에 대한 연구와 출판, 워크숍을 후원하기도 한다.
비트라 디자인 박물관은 회색과 흰색 페인트의 자유분방한 콘크리트덩어리들이 하나가 되어 초록빛 잔디 위에 아름다운 조형물로써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였다. 자유로운 곡선과 공간의 역동성은 시각적 긴장감을 만들어 쾌감을 주었다. 건물 밖 잔디밭을 걸으니 주위에 체리나무가 군데군데 흩어져 있었다. 코 끝을 스치는 싱그럽고 달콤한 향에 이끌려 손에 닿은 체리를 한입에 물었다. 그 때의 새콤함이 지금도 입안 가득하다.
21세기의 현대건축이 주는 시각적 언어는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현대건축은 세계 미술계와 디자인계를 움직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명 미술관은 물론 명품 브랜드 회사나 공장조차도 세계적 건축가들 디자인으로 새롭게 지어지거나 확장 증축 붐을 이루고 있고, 그로 인해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옛 화력발전소를 개조한 영국의 테이트 모던과 과거의 과자 공장 건물을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뉴욕의 디아비콘의 개념을 넘어서 바젤 비트라 캠퍼스는 현재 사용되는 가구 공장과 미술관이 공존하는 독특한 디자인의 복합 문화 공간이다. 이러한 새로운 인프라 구축은 바젤을 세계적인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비트라 캠퍼스 안의 컨퍼런스 파빌리온과 공장 건물, 주유소, 소방서는 놓쳐서는 안 될 유명 건축들로 디자인 박물관 주변에 다 모여 있다.
비트라 컨퍼런스 파빌리온의 전경 (사진 고영애)
파빌리온에 기대어 관람자가 잠시 쉬고 있다 (사진 고영애)
비트라 컨퍼런스 파빌리온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비트라 컨퍼런스 파빌리온(Vitra Conference Pavilion)은 예상했던 대로 노출 콘크리트 마감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부드러운 스펀지를 연상시킬 정도로 외벽의 마감은 완벽했다. 건물 외벽의 매끄러운 마감에서 일본 건축가 특유의 섬세함과 완벽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 공간은 세미나가 열리는 곳으로 세미나 하우스로도 불린다. 컨퍼런스 파빌리온 방음벽의 한 면 크기는 일본 다다미의 사이즈다. 다다미 사이즈(보통 너비 석 자에 길이 여섯 자 정도의 직사각형 모양)가 인간에게 안정감을 주는 적절한 크기라고 한다. 일본의 정신세계를 공간 곳곳에 심어두었다. 동양 정신을 담은 비트라 세미나 하우스는 참선과 묵상을 하기에 적절한 장소였다. 묵상의 공간은 성스런 공간으로 확장되어 고요함이 엄습하였다.
이 정적은 진정제와 청량제가 되어 한순간 여행의 피로를 보듬어주었다. 이 건물을 지을 때 벚나무 세 그루를 베었다 한다. 안도는 그 나무를 기리는 의미로 입구 벽에 벚꽃잎 세 개를 새겨넣었다. 소소한 부분이지만 자연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배려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입구에 남겨둔 뒤틀린 고목 아래에 잠시 쉬며 파란 하늘을 마주했다. 일련의 자그마한 감동들이 주는 여행의 기쁨을 추억의 공간 속에 차곡차곡 쌓아두어 순간순간 꺼내보련다.
프로덕션 홀과 공장 건물을 연결하는 브릿지 (사진 고영애)
프로덕션 홀과 공장 건물
비트라 단지 내에서 가장 나중에 지어진 알바로 시자(Álvaro Siza)의 비트라 공장으로 향했다. 알바로 시자의 프로덕션 홀은 19세기의 거대한 공장 건축을 연상시키는 상하로 높이 조절이 가능한 붉은 벽돌 건축물과 브릿지 루프(bridge roof)의 아치 구조물이 인상적이다.
아치 구조물의 통로 앞에 위치한 아넥스 관은 비트라 공장 전체의 마스터플랜을 계획했던 니콜라스 그림쇼(Nicholas Grimshaw)의 알루미늄 공장 건물이다.
장 푸르베가 디자인한 주유소 (사진 고영애)
주유소
장 푸르베(Jean Prouve)의 주유소(Petrol station) 건물은 파리 거리형 아트 박스로 조립식 건축물이다. 현대 실용가구의 거장인 장 푸르베는 조립식 가구의 선구자답게 군더더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박스형 건물을 대로변의 파란 하늘 위에 사뿐히 올려놓았다. 특유의 컬러만 사용한 멋진 유리 건축물은 삽으로 떠서 아무 공간에다 옮겨놓아도 될 만큼 완벽한 마감 처리의 건축물이었다.
프랑스 출신의 가구디자이너인 장 푸르베는 기능성과 조형미는 물론 기술적으로도 완벽함을 추구했던 건축가이며 엔지니어다. 그의 가구는 단순한 생활 소품이라기보다는 예술과 실용을 겸비한 디자인으로 20세기 가구의 혁신을 가져왔다.
자하 하디드가 디자인한 비트라 소방서 (사진 고영애)
비트라 소방서
공장 안의 주도로 끝에는 영국의 해체주의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디자인한 비트라 소방서(Vitra fire station)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지어질 당시 많은 이슈가 되었다. 1993년 완공되자마자 소방관들의 항의로 결국 폐쇄하게 되고, 현재는 비트라 가구전시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소방서 디자인은 말레비치의 영향을 받았다. 물과 불의 이미지를 담은 비트라 소방서는 역동적 공간을 보여주었다. 내부의 천정은 높낮이를 다르게 하여 빛의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건물 바닥은 평편하지가 않고 굴곡을 두어 구름다리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효율성이나 기능성에서는 부족하지만 조형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었고, 그녀는 비트라 소방서로 인해 세계적인 스타 건축가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마침 유명 가구디자이너 찰스 레이임스의 전시가 ‘뮤지컬 타워’라는 주제로 열리고 있었다. 쇠공을 넣고 압력을 가하면 실로폰 소리를 내며 음악을 들려주는 설치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자연의 소리를 통해 음악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고 한편으로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도구라고 도슨트는 설명했다.
영국의 해체주의 건축가 자하 하디드는 건축계의 여제라고도 불리는 여성 스타 건축가다. 우리에게는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의 설계자로 알려졌다.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오픈 때 자하 하디드의 풍모에서 느꼈던 카리스마는 과연 여제다웠다. DDP의 우주선 같은 비정형적인 형태가 동대문의 지역 정체성과의 부조화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하였지만, DDP가 이러한 논란을 잠재우고 서울의 새로운 건축 명소로써 소프트웨어에 충실한 디자인 플라자의 역할을 잘 수행해주길 기대해본다.
고 영 애
오랫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미술관을 촬영하고 글을 써온 고영애 작가는 서울여대 국문학과와 홍익대 대학원 사진디자인과를 졸업했다. 한국미술관, 토탈미술관 등에서 초대 전시회를 열었고 호주 아트페어, 홍콩 아트페어, 한국화랑 아트페어 등에 초대받아 큰 호응을 얻었다. 한국미술관에서 발행하는 월간지에 글과 사진을 실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잡지에 건축 여행기를 썼다.
이 연재물은 그의 책 <내가 사랑한 세계 현대미술관 60>(헤이북스) 중에서 <데일리아트> 창간을 기념하여 특별히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미술 작품보다 아름다운 현대미술관을 골라서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한다. 그가 15년 넘도록 전 세계 각지에 있는 현대미술관들을 직접 찾아가 사진을 찍고 기록한 ‘현대미술관 건축 여행기’다.
고영애 글/사진, '내가 사랑한 세계 현대미술관 60', 헤이북스
[고영애의 건축기행] 스위스 비트라 디자인 박물관 Vitra Design Museum < 문화일반 < 문화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