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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속 나무 이야기 ⑫] 회화나무 그늘 아래,

by 데일리아트

강희언의 사인시음(士人詩吟)

선비 여섯이 노거수(老巨樹, 오래되고 큰 나무) 그늘 아래 옹기종기 모였습니다. 누군가는 두 무릎을 꿇고 종이에 붓을 놀리고, 또 다른 이는 책을 함께 넘기며 시 구절을 음미합니다. 한 사람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긴 듯 서 있고, 나머지들은 그저 멍하니 바람결을 따라 흘러갑니다. 뒷배경 없이 구성된 이 화면은 여유로운 늦여름 오후의 정취를 그대로 전합니다. 삿된 소음 하나 없이, 시를 짓고, 시를 나누고, 시를 통해 교유하는 선비들의 풍류가 고스란히 스며있습니다.

이 그림은 조선 후기 화가 강희언(姜熙彦, 1710~1784)이 남긴 작품으로, 제목은 ‘士人詩吟’입니다.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들이 시를 읊는다는 뜻인데, 그림 속 풍경은 화려한 누정이나 정자가 아니라 단 하나의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입니다. 곧게 뻗은 아름드리 줄기, 햇빛과 그늘이 만들어낸 입체적 음영, 껍질의 세로 균열, 노출된 굵은 뿌리와 줄기 정면의 썩은 구멍, 특히 잎의 묘사는 눈여겨볼 만한데요. 잎의 줄기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마주 달린 깃꼴겹잎의 형상이 세밀하게 표현돼 있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식물도감에서나 볼 법한 수준의 관찰력이 느껴집니다.

조경가의 눈으로 볼 때, 노거수로서의 면모를 정확히 묘사한 이 작품 속 나무는 바로 선비들이 사랑한 나무, 회화나무(槐花樹)입니다.

회화나무는 삼국시대 이전 중국에서 전래된 귀화식물입니다. 조선시대 선비와 유학자들이 특히 애호하였으며, 학자수(學者樹)라는 별명도 있습니다. 궁궐의 뜰 안, 성균관의 마당, 지방의 서원이나 향교 같은 교육 공간에서 이 나무는 단순한 조경 요소가 아닌 정신적 표상이었습니다. 이 나무가 있는 곳은 배움과 도의가 머무는 장소임을 암시했는데요. 실제로 고위 관직자들이 벼슬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오면 마을 어귀에 회화나무부터 심는 전통이 있었으니, 이는 그 집안이 학문을 중시하며 유풍(儒風)을 지닌 가문임을 알리는 무언의 상징이었습니다. 회화나무는 한자로는 학자수(學者樹)이고, 영어 이름도 ‘Scholar tree’인 것으로 볼 때 회화나무는 공부와도 인연이 깊어 보입니다. 아마도 옛사람들은 집안에 이 나무를 심고 학자가 나오기를, 동구 밖에 심고 그 동네에 큰 인물이 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최고 벼슬을 상징하는 나무로 자리매김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이 그림에서처럼, 회화나무는 단지 나무 그 자체로서의 기능을 넘어 공간을 규정짓는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별도의 정자 없이도, 고목의 그늘 아래라면 그곳이 곧 시회(詩會)의 장소요, 학문의 마당이며, 풍류의 무대가 되는 것이죠. 오늘날 도시 조경에서 우리는 자주 ‘기능’을 중심으로 식재 계획을 세우지만, 옛 선비들은 나무에 ‘뜻’을 심었습니다. 회화나무는 그중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스승이자 동반자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때문에 그림 속 회화나무의 존재감은 단순한 배경 이상의 상징성을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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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언 ‘사인시음(士人詩吟·18세기 중엽)’, 종이에 담채, 28.2×35.6㎝, 개인 소장.

회화나무는 중국인들도 상서로운 나무로 생각하여 매우 귀히 여겼다고 하는데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존속했던 기원전 고대국가 주나라 때 조정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우리나라의 삼정승에 해당하는 삼공(三公)이 마주 보고 앉아서 정사를 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아름드리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실제로 만날 수 있습니다. 또 과거에 급제하면 공부하던 집의 마당에 회화나무를 심었다고 하며, 특별히 공이 많은 학자나 관리한테 임금이 상으로 내리기로 했던 나무이기도 했는데요.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만년을 보내는 고향 땅에 회화나무를 심어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는 선비가 사는 곳’임을 만천하에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특히 회화나무 꽃이 필 무렵 과거시험을 치르니 합격을 기원하는 나무로서 출세수(出世樹), 행복을 준다고 하여 행복수(幸福樹)라 했고, 이러한 것은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까닭에 양반수(兩班樹)란 별칭도 가졌습니다. 또한 판관(判官)이 송사(訟事)를 진행할 때 회화나무를 깎은 홀을 들고 재판을 했다고 하는데, 그 연유는 회화나무의 정갈함으로 진실을 찾을 수 있도록 하고자 함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모든 좋은 것의 상징이자 길상목(吉祥木)이었던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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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회화나무(노란색으로 물든 나무가 회화나무이다)


노랑 꽃다발의 선비 나무 ‘회화나무’


예로부터 회화나무의 꽃이 안쪽에서부터 피면 집안에 풍년이 들고, 밖에서부터 피면 논과 들에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와 연계하여 회화나무를 심으면 부자가 된다는 말이 유행이었던 동네가 있었습니다. 듣기만 해도 솔깃한 얘기인데요, 서울에서도 가장 부유한 동네인 압구정동입니다. 이곳 가로수가 회화나무라는 것 때문이었지요. 출세와 행복을 의미함을 넘어 부(富)를 이루는 것으로까지 확장되었네요. 하지만 회화나무 가로수는 부자 동네, 가난한 동네 할 것 없이 골고루 볼 수 있습니다. 의미를 떠나 일단 마음에 두고 보니 그 다양함이 참 멋진 나무입니다.


회화나무는 전국 어디에서나 자라는 잎 지는 큰키나무로 둘레 두세 아름, 키가 수십 미터에 이릅니다. 옛사람들은 회화나무의 줄기가 구불구불 자라는 경우가 많으므로 삼씨와 함께 뿌려 묘목을 키웠다고 하는데요. 2~3년 반복하여 이렇게 삼과 경쟁을 시키면 회화나무도 곧은 묘목이 된다고 합니다. 잎이 아까시나무와 닮아서 헷갈리기 쉽고 식물학적으로도 같은 콩과 집안입니다. 다만 아까시나무는 잎끝이 둥그스름하지만, 회화나무는 점점 좁아져서 뾰족해지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어린 가지는 잎 색깔과 같은 녹색이 특징이며 나이를 먹으면서 갈색으로 변하고, 나무껍질은 세로로 깊게 갈라집니다. 꽃은 가지의 끝에 여러 개의 원뿔 모양 꽃대에 복합하여 달리며 여름에 연한 황백색의 꽃이 핍니다. 그리고 곧 염주를 몇 개씩 이은 것 같은 열매가 달리는데요. 콩과임을 나타내는 열매로 다른 나무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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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 종이를 만들 때 염료로 사용했던 황백색의 꽃. 한여름 8월에 노란 꽃이 다발로 피어나며 이 꽃이 지면 가을에 콩꼬투리 모양의 열매가 달린다. 마치 아이들이 좋아하는 비엔나소시지가 줄줄이 매달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콩깍지를 꺾으면 끈적끈적한 즙액이 나오는데 옛날에는 이 즙액을 접착제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의학에서는 나뭇가지를 괴지, 꽃을 괴화, 열매를 괴실이라 해서 모두 약으로 사용한다.


회화나무 심은 뜻은?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8월, 꽃이 만발한 봄을 피해 이맘때쯤 가지 끝에 황백색의 자잘한 꽃을 피우는 회화나무는 느티나무, 은행나무, 팽나무, 왕버들과 함께 우리나라 5대 거목 중 하나인데요, 가지가 많아 넓게 자라기 때문에 넷플릭스의 웹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나왔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게임을 하기에 그늘진 회화나무 아래만큼 좋은 곳은 없을 겁니다. 커다란 노거수를 품은 회화나무 그늘은 시민들이 걷다가 쉬어가는 힐링의 공간입니다.


회화나무는 꿈의 나무입니다. 그 까닭은 괴안몽(槐安夢) 때문인데요. 괴안몽은 중국 당나라 때 강남 양주 땅에 살고 있던 순우분(淳于棼)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집 남쪽 커다란 회화나무 아래서 잠이 들었는데 괴안국(槐安國)의 부마가 되어 남가군(南柯郡)을 다스리며 20년 동안 영화를 누리는 꿈을 꾸었다는 데서 유래합니다. 그래서 회화나무는 일장춘몽(一場春夢) 혹은 남가일몽(南柯一夢)과 같은 의미의 괴안몽을 낳은 나무입니다. 인생이 한바탕 꿈같은 것이라면 순우분처럼 회화나무 아래 낮잠을 자면서 멋진 미래의 꿈을 꿀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회화나무를 일컫는 괴(槐)를 파지하면 나무 목(木)과 귀신 귀(鬼)가 되는데, 회화나무를 귀신 쫓는 나무라고 하여 궁궐에서도 잡귀를 쫓기 위해 많이 심었다고 합니다. 특히 회화나무의 꽃과 열매를 아홉 번 달여서 염색한 한지를 괴황지(槐黃紙)라고 하는데 잡귀신이 감히 범접을 못하는 기운이 있어 부적 종이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부적의 바탕 종이로 쓸 만큼 신목으로도 많이 심은 나무여서 그런지 양반이 이사 갈 때 필히 가지고 가야 할 씨앗 두 개 중 하나였는데, 다른 하나는 쉬나무입니다. 선비가 공부할 때 불을 켜는 등잔불 기름으로 쉬나무 씨앗을 선호했기 때문입니다(다른 기름과는 달리 쉬나무 씨앗의 기름은 그을음이 없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회화나무만의 특별한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회화나무는 나무마다 스스로 우는 열매가 하나씩 있다고 합니다. 그 열매를 따서 먹으면 신선이 되어 매우 총명해진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까마귀가 미리 찾아내어 그 열매를 먼저 먹어 버린다는 것이죠. 그렇게 신통력을 얻은 까마귀는 흉사가 닥칠 집을 찾아가 그 앞에서 까악까악 운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까마귀 우는 것을 보면 재수 없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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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주 알을 꿰어놓은 듯한 콩꼬투리 모양의 회화나무 열매


역사의 현장을 지켜본 회화나무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을 들어서서 옥천교를 건너기 전 왼편으로 가다 보면 선인문 앞에서 줄기 가운데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회화나무 한 그루를 만나게 됩니다. 평범하게 자랐다면 넉넉하게 펼쳤어야 할 나뭇가지들이 대부분 부러져 빈약할 뿐만 아니라 오롯이 서지도 못하고 비틀어져 자란 모습이 애절합니다. 이 나무는 조선 영조 38년(1762) 윤 5월13일, 영조가 자신의 친 아들인 사도세자를 8일 동안 뒤주 속에 가두어 죽게 했을 때 고통의 비명을 고스란히 들었을 그 나무입니다. 너무 가슴이 아파 이렇게 까맣게 속이 썩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선인문은 궁궐의 사람들이 죽으면 시체가 드나드는 시구문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하는데요. 사도세자의 주검뿐 아니라 이름 모를 궁궐 사람들의 주검을 보면서 자라니 저렇게라도 가슴 아픔을 표현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긴 세월 동안 한 곳에서 그 시대의 삶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는 나무를 보며 허튼 욕심일랑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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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가 뒤틀리고 속이 텅 빈 창경궁의 회화나무. 뒤로는 선인문이 보인다. 선인문은 사도세자의 시신이 나갔던 문이다


이렇듯 길상목의 상징인 회화나무의 의미를 가슴에 담고,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 여섯 선비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면, 꿈과 희망의 상징인 회화나무 아래서 출세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읽혀 지지 않으시는지요. 그렇게 생각하며 그림을 다시 보면, 강희언의 ‘사인시음’은 단순한 풍속화가 아닙니다. 이 그림은 한 그루의 나무가 만들어내는 문화적 풍경, 나무 아래에서 피어나는 사람 사이의 교류, 그리고 자연 속에서 도를 닦던 조선의 선비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이 나무 앞에 섰을 때, 잠시 시 한 수 읊는 마음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옛 그림이 전해주는 가장 조용한 감화일 것입니다.


[옛 그림 속 나무 이야기 ⑫] 회화나무 그늘 아래, 시 한 수 띄우는 마음 < 옛 그림 속 나무이야기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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