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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열 홍염장 1

[시대의 장인을 만나다 ①]

by 데일리아트
내가 만드는 '홍염'은 조선시대의 것과 같아
원하는 홍색을 만들기 위해서 수십 번의 염색 과정 거쳐

물질 문명을 최고의 가치라고 하지만 문화의 가치는 더 높아가는 시대이다. 문화의 가치를 금액으로 환산하기는 어렵다. 석탑이나 고려청자, 김홍도, 정선의 작품을 얼마의 돈으로 평가하겠는가. 경매 시장에서 고가의 금액으로 거래된다 해도 몇 년 지나면 그 가치는 또 오른다. 눈에 보이는 재화로 인간이 쌓아올린 유형의 문화재를 평가한다는 게 오류라는 증거다. 이런 문화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모든 문화재는 사람의 손끝에서 나왔다. 이분들의 가치는 그들이 만든 작품보다도 더 판단하기 어렵다. 지금도 이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과거의 아름답고 귀한 문화를 꿋꿋이 지켜가는 사람들이다. 나라에서는 이들을 '무형문화재(현 문화재보호법에 의하면 국가무형유산)'라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이들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주고 '슈발리에(Chevalier,기사)'라고 부르며 최고의 가치와 영예를 부여한다. 데일리아트는 이 시대의 무형문화재 '명장'을 만나본다. 이들은 '시대'를 견고하게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우리 문화의 진폭을 넓고 깊게 확장하는 분들이다.

1293_2712_048.jpg 공방에서의 김경열 장인



1293_2748_346.jpg 명장의 집 앞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서 있다.



1293_2747_30.jpg 헌법재판소 옆의 명장의 전통홍염공방

조선시대에 임금을 상징하는 색깔은 붉은색이었다. 붉은색중 가장 절대적인 붉은색을 '대홍'이라 했다. 대홍으로 지어진 옷이 곤룡포인데 왕은 곤룡포를 입고 익선관을 쓰고 어좌에 앉아 정사를 살폈다. 왕을 표현하는 절대적인 붉은색은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 붉은 염색의 장인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다. 이 색을 그대로 재현하는 장인, 무형문화재 제49호 김경열 홍염장을 만났다. 인터뷰는 장인의 공방에서 두 차례에 걸쳐 진행했다.


- 홍염이란 무엇인가요?

1293_2749_540.jpg 홍화, 김경열 명장은 단양에서 홍화를 직접 재배한다.



1293_2714_142.jpg 말린 홍화


1293_2716_220.jpg 홍화 가루

홍염은 홍색이 나오는 염재를 만들어 천을 물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국화과의 꽃인 홍화는 '잇꽃'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활용해서 염색을 합니다. 그런데 과거의 붉은 염색을 하던 기술이 전승되지 않았습니다. 부족하지만 저는 젊었을 때부터 이것을 연구해서 조선시대 장인들이 만들었던 '홍색'을 재현했습니다. 홍색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왕실에서 사용하던 홍색은 '대홍'이라 했습니다. 왕과 왕비, 그리고 국사, 왕의 스승이라 불렸던 고승의 가사에서만 볼 수 있는 아주 귀한 '왕의 색깔'이죠. 왕이 궁궐에서 입는 곤룡포의 색깔, 그 홍색을 똑같이 염색하는 것을 홍염이라고 합니다.


- 홍염을 만드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홍염을 하기 위해서는 '홍화'라는 꽃이 필요합니다. 홍화는 색이 붉은 기운이 감돌지만 꽃잎이 노랗게 보입니다. 노랗게 보이지만 꽃잎 속에 붉은 기를 머금고 있습니다. 6월 말에서 7월 경에 홍화를 따서 바짝 말려 장독에다 넣어 보관합니다. 꽃을 딸 때는 무조건 많이 재배하고 따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해에 홍화가 필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까요. 좋은 홍색을 채취하기 위해서는 홍화를 많이 재배해야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질 좋은 홍화를 얻기 위해 각 도에서 홍화를 진상 받기도 했습니다.


홍화를 말려 절구에 찧은 뒤 쌀뜨물에 헹구고 장독 안에서 발효시키기도 합니다. 저장할 때는 납작한 홍떡으로 만들어 장독에 저장했습니다. 건조된 홍화는 자루에 담고 물에 넣어 노란 색소를 먼저 제거한 뒤, 콩대나 홍화대를 태운 잿물을 이용해 홍색소만을 추출합니다. 여기에 오미자초를 섞으면 알칼리성인 잿물과 산성인 오미자초가 만나 발색이 일어나서 염색에 사용할 수 있는 액체 물감, 즉 염액이 됩니다. 그런데 원하는 홍색을 얻기 위해서는 많게는 수십 번도 더 반복해서 천에 물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1293_2750_728.jpg 천에 물들이는 과정

- 그럼 선생님이 만든 홍염이 전통적인 조선시대의 홍염과 같다고 확신할 수가 있나요?


예전 고궁 발물관의 서준 학예사가 미국에서 가져온 왕가의 서책과 표장의 색깔과 비교한 적이 있고, 옛 문헌과 서책에서 보이는 홍염의 색과 제가 만든 홍염의 색깔을 비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똑같더라고요. 내가 만드는 것이 조선시대의 것과 같은 이유는 저의 홍염을 만드는 제작 과정이 조선시대의 방법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문화재청의 자격 시험 합격 이후 문헌 속의 홍염을 재현하고자 10년을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무형문화재가 된 것이죠. 현대 물감으로는 전통적인 과정에서 추출되는 절대적 홍색을 발색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예전 문헌을 다 뒤져 『규합총서』에 나오는 문헌을 해독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이해해서 그 방법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홍염은 조선시대 왕이 쓰던 홍염의 색깔과 같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 '홍염장'이라 불리는 사람은 저 혼자밖에 없습니다. 홍염을 만드는 것은 오랫동안 경험에서 나오는 손끝의 감각도 필요하고, 홍화를 재배하고 다루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나는 80년도부터 관심을 갖고 이것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완성된 홍염을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고 까다로워서 처음에는 내가 발색한 것을 믿어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 어떻게 홍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셨나요? 어릴 적 이야기부터 해주시죠. 선생님의 집안이 김홍도의 스승인 김응환의 자손이라고 들었습니다.


예, 맞습니다. 도화서 화원 김응환이 저의 친가 쪽 족보를 훑고 올라가면 조상이 됩니다. 왕실의 의궤 편찬 작업에 많이 참여한 화가 김득신도 우리 집안 어른입니다. 개성 김씨, 흔하지 않은 성입니다. 그 밑에 건종, 수종 등 다 도화서 화원이셨습니다. 그러니 친가에 이미 예술적 기량이 흐르고 있었고 그것을 제가 이어받은 것 같습니다.

1293_2752_1413.jpg 명주실

외가 쪽으로는 외할아버지가 명주실 공방을 하셨고 외삼촌이 이를 물려받았습니다. 나는 1959년생인데 중학교 3학년 때인 1974년에 입문했습니다. 저의 고향은 경기도 오산인데 양주와 파주에 어릴 적부터 올라와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양주에서 과수원을 했는데 사람이 너무 좋아 거절을 못 하는 성격이다 보니 빚 보증을 잘못해서 가세가 기울었습니다.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집안에서도 뚜렷한 해결책이 없어 저를 세운상가가 있는 종로구 예지동 외삼촌의 자수실 공방에 보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퇴계로에 계셨고 외삼촌은 염색실을 만드는 일을 해서 그 밑에서 도제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외갓집은 조선 후기부터 이런 일을 했지만, 왕실에 납품하는 홍염을 한 것은 아니고 염색 공방에서 자수실 등을 납품해 팔았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손으로 정연, 표백, 합사, 연사 등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공부에 대한 미련이 있었습니다. 중3 담임선생이 학교를 그만두자 늘 나에게 공부하라고 전화를 주셔서 공평동 뒤에 있던 상아탑학원을 다니며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야간학교인 광운전자공업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나는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고. 그때 만난 선생님들을 지금도 연락합니다.


- 처음부터 홍염을 하셨나요? 일을 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82년 군 제대하고 나서 삼촌이 하는 공방을 나와 면목동에서 가내공업으로 명주실을 만드는 공방을 열었습니다. 그 실을 자수하는 사람들에게 납품했습니다. 납품하는 과정에서 이화여대 자수학과 김인숙 교수를 만났고 궁궐에서 수를 놓던 수방상궁(순종 시절)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그분들이 살아있을 때입니다. 왕실의 전통이 조금이라도 이어진 시기인데 모두 가난하게 살아서 김인숙 교수는 그분들을 안타까워했고 전통의 단절을 아쉽게 생각했습니다.

1293_2718_851.jpg 김경열 장인의 젊은 시절. 두 스승(김영숙,김인숙)의 몸에 닿을까 봐 몸을 움츠리고 있다.

그 무렵 평생의 스승인 숙명여대 김영숙 선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복식학자이며 문화재 전문위원입니다. 그때는 전통 문화를 계승하는 사람들이 없었고 내 나이 20대 중반이었는데 그분들을 어려워하면서도 함께 작업하며 일을 배웠습니다. 내 인생에서 그분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들을 모시고 작품 <준이종정도>를 복원했습니다. 우리 집사람도 같이 작업을 했습니다. 그때 문화재 위원 한상수 자수장 등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특히 김영숙 선생님에게 고증을 받아가며 염색 작업을 했습니다. 맨 처음 복원한 작품이 숙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결혼할 때 입는 '활옷'인데 그 후에 많은 유물 복원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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