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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오면 애리조나의 친구가 생각난다

사진가의 펜으로 보는 세상

by 데일리아트
잊지 못할 유학 시절 친구
삶의 고단함이란 좋았던 시간들과 이별해야 하는 것
1340_2841_354.jpeg 이용순, 종의 기원을 읽다, 2022

그 시절 나는 도무지 대화에 낄 수가 없었다. 혼자 수업 듣고 밥 먹고 모든 것을 혼자 다 해야 하는 '아웃사이더'였다. 짧은 영어 실력과 학과에서 동양인은 나 혼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있던 학교에서는 한국인 학생이 많아서 수업 시간에도 한국어로 웅성거릴 정도였다. 오히려 내가 그곳에 녹아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침없이 학교를 옮긴 것인데 여기는 반대의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거구인 그는 자상한 성격이었다. 나와 대화할 때는 다른 사람과 대할 때와 달랐다. 말의 속도를 느리게 했고 가급적 쉬운 단어를 선택하려고 했다. 우리는 수업을 함께 들으면서 빠르게 가까워졌다. 게다가 그는 학교에서 누구나 공인하는, 이미 모든 면에서 반열에 오른 우수한 학생이었다. 잊을 수 없는 친구. 그와의 인연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몇 번의 수업에서 마주치고 그와 친구가 되었다, 궁금했지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 그는 왜 내게 그렇게 친절했을까. 주위에는 친구들이 많아 굳이 나를 가까이할 필요가 없었을 터인데 말이다. 우린 매주 금요일 항상 다운타운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함께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지속적으로 말을 시켰다. 마치 그가 내 영어 교육을 담당하는 선생인 양 그렇게 집요하게... 그러나 서로 거부감이 없었다. 사진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었던 우리는 시카고를 이야기했고, 사진을, 예술을, 미국을, 한국을, 역사를, 그리고 삶의 모든 것을 얘기했다. 매주 금요일마다. 그는 내 작품이 학교에서 가장 좋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말을 받아 너의 작품이 단연 최고라고 했는데, 나는 진심이었지만 그는 나를 추켜세우기 위해 그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1989년 같은 학과를 졸업해 졸업 동기가 되었다. 그는 자신은 풍경 사진 전공이니까 애리조나대학원을 다니겠다며 서부 행을 택했다. 나는 이미 뉴욕에 대학원 입학 허가를 받았기에 동부로 가게 되어 거리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뉴욕에서 그가 사는 애리조나의 템페(Tempe) 까지는 4,000Km나 된다. 그러나 각자의 길로 떠난 후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매주 금요일 만났던 것처럼 일정한 시간에 전화를 했다. 학부 다닐 때처럼 매주 금요일마다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첫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5시간을 날아서 비행기가 마침내 피닉스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찾아 나가자 문이 열리면서 뜨거운 바람이 훅 하고 들어왔다. 뜨거움의 중심에 그가 서 있었다. 나는 큰 아이스박스에 많은 양의 LA갈비를 준비해 갔다. 그의 친구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열 명 정도가 되었다. 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화가도 있고, 조각가도 있고... 그들은 파티에 오면서 손에 뭔가를 들고 왔다. 누구는 과일을, 누구는 맥주를, 또 누구는 샐러드를 가져오는 등 이런 것이 그들의 문화인가 보다 생각했다. 이후로도 방학이면 애리조나를 찾아가고 으레 그들은 내가 갈비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나는 이들에게 미국 소고기로 한우의 맛을 보여준 것이었을까.


애리조나에 머무는 동안 나는 24시간을 그와 함께했다. 그의 집에서 대략 2주 정도를 보내며 여행을 하기도 하고 미술관도 갔다. 맛있는 레스토랑, 특히 멕시코 레스토랑을 자주 가곤 했다. 미국인들은 식당에 가면 더치페이가 기본이었는데, 이 친구는 이상하게 내가 돈 내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가끔 이 친구가 뉴욕에 오면, 나는 기필코 우리 집에 묵게 하고 맛있는 식당을 다니면서 소심하게 복수 아닌 복수를 했다.

친구는 애리조나에 작은 화랑을 담당하고 있어서 나는 두 번의 개인전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완전한 우정의 산물이었다. 이 또한 나의 복수가 있었다. 나는 그의 작품을 공수해 와서 서울과 대구에서 개인전을 열어 주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학교의 배려로 취업 비자를 받아 2년을 더 뉴욕에 체류했다. 이 친구는 졸업 후 시카고 모교에서 시간강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풍경 사진가로서 애리조나에 머무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태양이 내리쬐는 여름, 마지막으로 애리조나를 방문했다. 그에게 미국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한다고 말하려고 간 것이다.


나는 핫셀블라드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었다. 그는 나무로 만든 커다란 디어도프 카메라를 삼각대 위에 설치했다. 카메라는 뜨거운 여름 애리조나의 태양 아래에 놓인 큰 선인장을 각각의 다른 방법으로 담아내었다. 피사체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 눈물은 더운 공기를 타고 내 심장으로 흘렀다. 우리는 셔터를 누르는 것으로 이별 의식을 치르는 중이었다. 언제나 여름이 오면 나는 그때를 잊지 못한다. 태양 빛 작열하던 곳의 선인장과 애리조나의 태양과 친구. 결코 잊지 못할 내 친구 던 레딕(Don Leddick).


삶의 고단함이란 내가 원하는 좋았던 시간들과 이별해야 하고, 또 그 공간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그리움이라는 고통이 심장에 머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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