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희의 마음으로 미술 읽기] 갤러리 현대, 8월 28일 부터
자연 그 자체는 기하학적 구조의 최고봉
저의 작품은 하나의 음표에서 시작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많은 작품들이 말 그대로 하나의 점이 나선에서 시작하지요(...) 레너드 번스타인은 음악은 다음 음표에 관한 것이라고 했었죠. 제 작업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어요. 다음에 올 음은 무엇일까?(...) 마치 대화가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를 이어나가면서 각각의 점들과 선들이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지요. - 존배
인생의 여정은 목표점을 정하더라도 억만 겁의 갈림길에 의해 또 다른 미지의 길로 들어선다. 미술 작품도 마찬가지다. 주제를 정하고 출발하지만 빈 공간에서 연출되는 조형의 세계는 빈틈없는 셈법으로 완성하지 못한다. 작가 개인의 살아온 경험과 기억 속에서 우연한 영감이 만나 탄생하게 된다. 긴 여정 70여 년 동안 작업을 해온 조각가 존배 (b.1937).
'대한민국 미술축제' 기간 '프리즈 서울'에 맞춰 28일부터 갤러리 현대에서 11년 만에 국내 전시가 시작되었다. 묵직한 바흐의 선율이 들리는 듯한 갤러리에서 얇은 철사 조각의 숲을 거닐어 볼 시간이다.
존배는 1937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12세인 1949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구호 활동을 위해 가족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홀로 남겨진 그는 인종 차별의 벽을 넘기 위해 각종 운동과 색소폰, 클라리넷을 연주하면서 미술에 대한 남다른 소질을 발휘하며 지냈다. 그의 성장 과정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러시아 민요를 들으며 잠들 만큼 늘 음악이 흐르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자연스럽게 그에게 감성의 자양분이 된 것은 음악이었다. 그의 작품 '선율이 있는 철사 조각'의 원천이 되었다. 무용에도 관심이 있어 뉴욕 시티 발레와 마사 그레이엄의 모던 댄스, 볼쇼이 발레단을 체험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아티스트로 바흐를 꼽는다.
존 배는 15세인 1952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긴 시간 70여 년의 작가 인생이 이어진다. 그는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산업디자인과 조각을 4년 동안 장학금을 받으며 전공하고, 28세에 프랫 인스티튜트 최연소 교수로 임명되어 40년 가까운 동안 교직과 행정, 학교의 미술과 조각 프로그램을 이끌었다. 또한 다학제적 연결로 자신의 사고관을 끊임없이 확장하고 실험하여 1979년부터는 조각부 의장을 맡아 현상학과 생체공학 과목을 신설했다. 음악과 미술, 수학과 과학, 동양철학의 세계까지 포괄한 건 독창적 사고 체계를 위한 것이었다.
조형예술인 조각은 물질적이고 정적이며 때로는 율동감으로 리듬을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생명력을 불어넣기도 하고 공간을 흡수하는 힘도 가진다.
존배의 그리드 조각은 빈 공간 속에서 점이나 선으로부터 출발한다. 자연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그는 거미줄이나 얽혀진 산호 형상을 오브제로 삼는다. 유기적인 곡선으로 비정형 ‘공간 속 드로잉’을 자유롭게 조각한다. 유영하는 생명체나 유기체로 보이는 뭉친 선의 집합체가 곡면을 이룬다. 딱딱한 철제 재료가 날렵하게 느껴지도록 비상하듯 유연하게 운동성을 나타낸다. 작은 철사 한 땀 한 땀을 일일이 손으로 용접하였다. 불이 닿은 철은 무거운 속성에서 공간과 만나며 환경과 상호 연결되어 힘이 있는 공간으로 완성된다.
존배는 만났다가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는 불교의 윤회 사상에 매료되기도 했다. 조형언어의 기본인 ‘선(Line)’을 최소의 단위에서 시작해 복잡한 유기적인 구조로 구축해 나가는 것도 같은 범주가 아닐까? 그의 모든 작품은 점, 선에서 시작되어 운율을 가지며 면으로 이어나간다.
섬세한 구조를 창조하기 위해 ‘선’은 실험적이면서도 수학적인 완벽성을 추구해 나가면서 공간에서 유희를 드러낸다. 보통 한 개의 작품을 시작하면 재료 선택부터 완성까지 홀로 직접 제작하기 때문에 2~3년의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오로지 철사라는 한 가지 재료를 자르고 용접하기를 반복하여 딱딱한 철사가 불이 닿아 그을음으로 검게 변하기도 하고 액체로 변하기도 한다. 조각 재료의 일차적인 특성만으로 형태를 구성하기보다는 재료의 독립된 형태나 반복을 통하여 무작위적인 혼돈 속에 드러내는 정밀함. 이것은 질서에 대응해고 진화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작품의 드로잉을 거치지 않고 용접 자체를 3차원적 공간 드로잉으로 작업을 완성했다. 과정의 끝없는 의식과 무의식적 결정에 의해 ‘길 잃기’를 즐긴다. 의도치 않는 결과물을 얻기도 한다. 순간적인 선택과 우연에 의해 철사입체 드로잉이 되는 것이다.
세계적인 조각가 존배는 '자연 그 자체는 기하학적 구조의 최고봉’이라고 말한다. 동양적 명상의 정서를 기반으로 음악과 무용의 율동감, 수학적, 건축적 완벽성을 절묘하게 혼합하여 매력을 뽐낸다. 이것이 딱딱한 철사의 물성에 음악이라는 옷을 입고 잔잔한 선율로 속삭이는 존배의 철사 조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