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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묵향에 우정이 물들고 인생이 익어간다-연서회 1

[同好同樂 ③]

by 데일리아트
50년 동안 글씨 쓰며 고락 함께한 사람들, 숭실대 서예 동아리 연서회
1474_3297_2938.jpg 연서회 창립 50주년 기념 전시회 출품을 위해 회원들의 구슬땀이 밴 연습실이다.


1474_3299_311.jpg 연서회 창립을 기념하여 학교에서 준 앨범에 선배들의 발자취를 보관하고 있다.

풋풋한 대학 시절에 만나 머리 희끗한 초로에 이르도록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같은 취미로 모인 사람들이다. 서예. 우리나라에서는 글쓰는 것을 예술로 인식했다. '예술 예(藝)'를 써서 '글씨 쓰는 것을' 서예(書藝)라고 했다. 일본에서는 글씨 쓰는 것을 도(道)를 닦는 것으로 여겨 서도(書道)라고 한다. 서예든 서도든 오래 하다 보니 글씨가 예술이 되었고(書藝), 더 오래 쓰다보니 '글씨로 같은 길을 가는(書道)' 인생의 동행이 되었다. 숭실대학교 서예 동아리 연서회(硏書會) 사람들이다.


연서회는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는다. 글씨를 쓰며 한평생 친구가 되어온 사람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할까?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연서회 출신이면서 이들을 지도하고 있는 원명환 선생의 서실, 경기도 부천의 석오서실에서 멤버들을 만났다. 이들은 이 달, 9월 4일부터 열리는 연서회 제50주년 기념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인터뷰는 유세현(83학번,50주년 전시 사무국장), 김은형(86학번,총무), 원명환(86학번,연서회 지도교수),고길철(86학번,지도위원) 회원과 함께했다.

1474_3296_274.jpg (좌측부터) 유세현(83학번, 50주년 전시 사무국장), 김은형(86학번, 총무), 원명환(86학번, 연서회 지도교수), 고길철(86학번, 지도위원)

- 연서회의 소개를 부탁드린다.


연서회는 1974년 서예에 관심 있는 숭실대학교 학생들이 시작했다. 그때는 학교 이름이 숭전대학교였다. 나중에 숭실대학교와 대전대학교로 나뉘었지만. 재학생 중 서예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모였다. 그중에 지도할 사람을 찾다 보니 학생의 아버지 중에서 글씨를 잘 쓰시는 분이 계셔서 그분께 지도해 달라고 요청해서 시작했다. 1기로 현재까지 활동 하는 분들도 계신다. 안희찬 선배(72학번, 72세 금청구청 서예 강사), 이재민 선배(74학번, 70세 미협 초대작가), 강윤석(74학번, 70세 요양원장) 선배님이시다.


그 이후에 전문 강사를 모시고 하다가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숭실대 철학과 안병욱 교수님을 지도강사로 모시면서 연서회가 더욱 단단한 학교 동아리가 되었다.

1474_3283_830.jpg 1974년 창립 멤버들, 첫 전시회 후 기념촬영


1474_3285_917.jpg 연서회 지도교수인 철학과 안병욱교수가 전시회 방명록을 쓰고 있다.

연서회가 학교 동아리로 정식 발족한 이후에 끊임없이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 당시에는 학생 조직으로 서울서예연합회, 전국서예연합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서예의 황금기였다. 서울서예연합회 산하 각 지부마다 지역 모임이 있었다. 서울에는 13개 대학이 모였다. 건국대, 명지대, 고려대, 숙대 등이다.


봄에는 전국의 서예연합회 소속 학생들이 모여 몇백 명씩 등산대회를 하고, 12월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전국에서 학교별로 우수한 작품을 가려 전시회를 했다. 89년도까지 이런 큰 연합 조직이 있었다.

1474_3286_949.jpg 1984년 창립 10주년 기념 전시회 강신명 총장의 격려사

- 연서회에 나오는 학생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나? 국문과, 철학과 학생들만 나오지 않았나?


동아리에 온 학생들은 공대생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지금까지 공대 졸업생들이 활동을 열심히 한다. 인문 사회계열도 많았지만... 글씨를 못 쓰는 사람은 잘 쓰기 위해서 나왔고, 글씨를 잘 쓰는 사람들은 더 잘 쓰기 위해 써클에 가입했다.

1474_3288_1046.jpg 컴퓨터가 없던 80년대 초, 직접 등사기를 돌려 동아리 입회 원서를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이라서 글씨는 본인의 인격을 나타낸다는 인식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서예가 참 매력적이었다. 한문도 배웠던 시대 아닌가? 서예를 베우면서 한문 공부도 하고 글씨를 잘 쓰게 되니 일석이조였던 것 같다. 숭실대학교가 기독교 대학이지만 종교적인 색채는 없었다. 그 당시에 교수님들도 많이 오셨다. 지도교수인 안병욱 교수는 물론이고, 86년 1학기까지만해도 강신우 총장까지 오셔서 둘러보고 가셨다. 어윤배 총장도 연서회 전시회 때 오셔서 테이프 커팅을 했다. 연서회가 얼마나 인기가 많았냐면 86년에 신입회원을 받아보니 입회원서를 쓴 학생이 백 명이 넘었다. 전 학년 총회를 하면 백 명 이상이 모였다. 숭실대학교에서 연서회는 다른 동아리보다 훨씬 인원이 많았고 서클룸도 컸다. 학교에서 만도린, 합창단, 음악 감상, 연서회가 대표적 동아리였다.

1474_3292_1626.jpg 필사적인 신입회원 모셔오기 작전. 왼쪽 교련복 모습이 그 시절의 분위기를 말해준다.

- 학창 시절의 재미있는 일을 몇 가지 소개해 달라


당시는 군부가 교내까지 학생 시위를 진압할 때였다. 전시회를 앞두면 학생들은 초조해진다. 작품은 내야 하는데 학사 일정을 맞추다 보면 시간은 없고, 최루탄을 맞으며 시위하다가 서클룸에 들어와 작품을 내기 위해 글을 썼다. 등화관제 때는 모포를 뜯어 창을 가리고 전시회 연습을 했다. 전경이 서클룸에 들어와 글씨 쓰는 것을 보고 그냥 나간 적도 있다. 연서회 서클룸이 학생회관 304호인데 현관문이 닫혀 소방 호스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 밤늦게까지 연습하기도 했다. 12시면 학교 정문을 닫고 10시면 학생회관을 닫던 시기이다. 학교의 데모용 대자보나 웬만한 글씨, 교수님들도 학술대회 같은 행사의 글씨를 많이 부탁했는데 연서회에서 다 써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데모의 선두에 서지는 않아도 사회 참여를 한 것으로 봐야 한다. (웃음)


- 주로 글씨만 썼나?


우리의 가장 큰 자랑은 CC가 많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먹물로 글씨를 쓰다 보면 2, 3시간 동안 쓴다. 시간이 금세 지나간다. 그러다 보면 서로 호감이 가서 학번마다 한 커플 이상 나온다. 특히 81학번이 이상하게 86학번과 많이 사귀었다. 6쌍이나 나왔다. 복학생과 현역 어린 학생이 사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웃긴 것은 잘 사귀다가도 깨지면 둘 다 탈퇴한다.

1474_3290_120.jpg 81학번(강인준)과 86학번(김은형), 이들은 연서회가 맺어준 커플이다.
친구가 지금은 결혼한 우리 남편이 좋다고 했다. 난 이미 사귀고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서로 갈등도 있었다. 비밀 데이트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졸업할 때 되면서 개방되는 경우도 많았다. 엠티를 가서 기타를 치고 노는 모습에 반해서 81학번인 현재의 남편과 결혼했다.... 그 때, 참 잘 놀았다.

엠티(MT)는 주로 탁본을 하러 가는 거였다. 주로 남한산성이나 북한산, 도봉산 같은 곳을 다녔다. 안성에 가서 탁본도 하고 개울가에서 놀았던 기억이 많다. 그때는 시국이 불안정해서 툭하면 휴강이었다. 학교 생활은 오히려 연서회에 열중했다. 내리사랑이다. 선배들은 뭘 자꾸 사주고 후배들은 받아먹고 했다. 활동할 때 보니 때리기도하고 맞은 사람도 있다 하더라. 후배들이 자꾸 밥 사 달라 하니 졸업 앨범비를 받아가지고 그 돈으로 후배들 술 사주고 그랬다. 그래서 졸업앨범이 없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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