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 프로젝트 ‘실로 엮어 나가는 사회의 이면 ’
국제갤러리 함경아 개인전 K1, '유령 그리고 지도 그리기/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01V1' , 사진: 김해리
국제갤러리 함경아 개인전, '유령 그리고 지도 그리기' 설치 모습, 사진: 국제갤러리 홈페이지
캔버스를 다채롭게 장식하는 아름다운 조형들은 물감이 아닌 자수를 놓아 만든 것으로 작품에 가까이 다가서면 섬세하게 짜인 실들이 추상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함경아(b.1966) 작가는 <자수 프로젝트>라 불리는 시리즈 작업을 2008년부터 해왔다. 작가는 와 〈당신이 볼 수 없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다섯 개의 도시를 위한 샹들리에)〉 등의 노동집약적인 자수 작업을 통하여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 조망하는 실천적 예술을 펼쳐왔다. 국제갤러리에서 8월 30일부터 11월 3일까지 함경아 개인전 《유령 그리고 지도》를 K1, K3, 한옥 세 개의 전시장에서 선보인다.
이번에 전시되는 자수 프로젝트는 2008년부터 최근까지의 작업들이다. 작가는 2008년 어느 날 집 앞으로 날아든 북한의 선전 체제 전단지 '삐라'를 우연히 보고, 작가 또한 북한에 있는 익명의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기로 결심하면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자신이 디자인한 이미지나 텍스트를 넣은 자수 도안을 중개인에게 전달하고 중개인이 북한에 있는 자수 공예가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북한의 노동자들과 소통을 꾀했다. 북한에서 돌아온 수놓인 자수 천들은 작가의 손에 닿아 다시 캔버스에 디자인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작품은 한국과 북한의 ‘분단’이라는 사회적 현실,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담겨 재조립된다.
국제갤러리 함경아 개인전, '유령 그리고 지도 그리기' 설치 모습, 사진: 국제갤러리 홈페이지
국제갤러리 함경아 개인전, '유령 그리고 지도 그리기' 설치모습, 사진: 김해리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 존재하고 있는 것". 북한 또한 우리에게 보이나 갈 수 없는 곳으로 양 갈래의 상반되며 다층적인 의미들을 가진다. 이러한 의미는 작품이 지닌 맥락과 조형적 요소가 맞물려 전달된다. 작가가 붙인 《유령 그리고 지도》 라는 전시의 제목 역시 ‘유령’은 분명 실재하지 않으나 실재하는 것과 같이 느껴지는 두려운 존재이다. 작가는 보이지 않는 유령의 발자국을 따라가며 그 존재들을 찾아 나선다. 그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이야기들은 하나의 '지도'를 형성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 속에 자리한 감춰진 것들이다. 작가가 마주한 세상 속 경험들이 예술작품으로서 새롭게 태어나고, 작품을 보는 관람자들에게 담론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이는 또다른 ‘지도’를 그리는 행위이다.
함경아의 자수 프로젝트는 '실'로 수놓은 작품이다. 작품의 재료인 ‘실’은 ‘연결’, ‘만남’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북한의 자수공예가와 남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한 '조우'라는 측면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함경아 작가의 작업은 정치적 맥락에서볼 때, 직접적인 예술의 사회 참여를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품의 제작 과정과 작품이 지니는 의미 안에서 숨겨진 이면과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작가 자신만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닌 북한으로 넘어가서 만나게 되는 익명의 존재, 그리고 미술관 속 관람자를 통해 의미화된다. 보이지 않기에 환영과도 같으나 분명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작가는 개인과 공동체가 느끼는 감정들을 작품 속에 담아낸다.
작품의 조형적 측면을 보자. 캔버스에 수놓인 자수들은 추상 형태이기 때문에 작품을 보는 관람자는 작품의 외관 안에 담긴 북한과의 정치적 맥락을 읽을 수 없다. 북한의 자수공예가들은 추상미술을 접할 수가 없으며 정치적 선전을 담지 않기에 검열에서도 벗어날 수 있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북한의 자수 공예가들에게 도안을 전달하여 다시 받기까지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불확실함을 견뎌야 했다.
자신의 자수 작업 과정에 대해 “1만 걸음이 필요하다면, 그 중 9천9백9십9걸음은 결정된 것 하나 없고,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이 전혀 불가한 상태로 걷는 것”이라 말했다. 제삼자를 거쳐 익명의 누군가에게 보내는 과정 속에서 작업물들은 검열에 걸릴 수도, 손상될 수도 있으며 남북의 정세에 따라 영향을 받기도 했다. 작품의 완성이 한없이 미루어지기도 하고 작품의 제작 역시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 불투명한 '실체가 없는' 경로로 진행되었다.
국제갤러리 함경아 개인전 K3, '유령 그리고 지도 그리기/너는 사진으로 왔니 아니면 기차 타고 왔니 2408SS013T' , 사진: 김해리
이번 국제갤러리의 K3 전시장에서 만나는 2024년 신작은 이전 작업들과 달리 마치 컴퓨터 그래픽을 연상시키는 화면으로 직조된 그리드를 수놓은 형태이다. <너는 사진으로 왔니 아니면 기차 타고 왔니?>라는 제목은 존 버거(John Berger)의 『제7의 인간』(2021)에서 인용한 문구이다. 책은 유럽의 이민노동자들과 관련한 사회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
이전 작품들은 작가가 자수를 통해 물리적 현실을 넘어 만질 수 없는 대상에게 촉각적인 방식으로서 소통을 하고자 했다. 이번에 전시하는 신작은 팬데믹을 겪으며 느낀 회의감으로 근본적인 소통의 방식에 대한 의문을 표하고 있다. 점차 더 디지털화되어 가는 세상의 모습을 그래픽 화면과 유사한 방식의 자수 작업으로 표현했다. 함경아 작가는 계속하여 자신의 조형 언어로 변화하는 우리 사회의 숨겨진 이면들에 대해 예술작품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전시는 11월 초까지 진행되니 캔버스에 다채로이 짜인 실들의 향연을 마주하며 작품에 담긴 작가의 메시지들을 찾아가 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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