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를 처음 찾은 사람들은 도시의 쾌적한 공기와 함께 일상 속 느긋함을 곧바로 느끼게 된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부터 길을 걷는 사람들까지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에 비해 훨씬 느린 템포로 움직인다.
영화 '러브레터' 포스터. 사진 출처 : 네이버포스트
그런 삿포로의 느긋한 매력 속에 가슴 아린 사랑을 그린 영화 <러브레터>를 떠올릴 수도 있고, 오타루 운하의 정취나 오르골의 선율이 귓가를 스칠 수도 있다. 그러나 삿포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특별한 공간이 있다. 바로 오타루 예술촌에 위치한 스테인드글라스 미술관이다.
오타루예술촌 내의 스테인드글라스 미술관
이 미술관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제작된 영국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소장하고 있다. 본래 교회의 창을 장식하던 작품들이었으나, 시대가 변하면서 많은 교회가 해체되었고, 다행히도 이 귀중한 예술품들은 파괴되지 않고 여러 곳을 거쳐 오타루로 들어왔다.
미술관이 자리한 건물은 과거 다카하시 창고였던 곳으로, 현재는 삿포로 여행객에게 유럽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이국적인 장소로 인기를 얻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빛의 양과 시간, 계절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선사하는 예술이다. 아침 햇살과 오후 햇살, 여름의 강렬한 빛과 겨울의 차분한 빛이 미묘하게 다르다. 이는 중세 유럽의 고딕 성당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던 스테인드글라스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노트르담대성당 북쪽수량 장미창.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이 미술관의 작품들도 관람객을 압도하며 빛과 색의 향연을 펼친다. 단순히 인간의 손으로 만든 물질이 아니라, 신과 자연이 합작해 완성된 경이로운 예술로 평가받는 이유다.
미술관 내부
미술관 내부
미술관에 소장된 스테인드글라스에는 빅토리아 여왕 통치 시절의 영국 전성기와 에드워디안 시대, 제1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지는 영국의 역사가 응축되어 있다.
'신과 영국의 영광', 1919, 영국. 제1차 세계대전의 전승 기념과 희생자 추도를 위해서 제작되었다. 잉글랜드의 수호 성인인 성 조지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왕관을 받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으며, 양 옆으로는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의 수호 성인이 그려져 있다.
'최후의 만찬', 1901, 영국
'씨 뿌리는 사람', 19세기말 ~20세기 초, 영국. 성경 구절을 우화로 풀어낸 작품. 아무렇게나 뿌려진 씨앗은 새에게 먹히거나 돌투성이 황무지에서 시들어 버린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좋은 토양과 같다. 순수한 마음으로 신과 마주하면 많은 것들이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각 작품의 그림과 문자 속에는 그 시절 사람들의 삶과 신앙, 그리고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유럽의 역사적 유산을 삿포로 한복판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미술관은 그야말로 시공간 여행을 떠난 듯하다. 미술관은 오타루 운하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 접근성도 뛰어나다.
미술관 옆 오타루 운하
기자가 방문한 날에도 많은 관광객이 운하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지만, 바로 옆에 영국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옮겨 놓은 이국적인 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화려한 유리 장식과 신비로운 빛의 조화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고요한 아름다움은 오타루의 매력을 한층 더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삿포로는 느긋하게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도시다. 이곳 특유의 느림 속에서 빛의 황홀경까지 만끽할 수 있는 스테인드글라스 미술관을 놓치지 말자. 유럽의 역사와 예술이 담긴 이곳은 삿포로 여행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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