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사람을 사랑한 화가

[너를 위한 미술사: 고암 이응노 이야기 ⑤]

by 데일리아트
역사의 질곡을 그림으로 승화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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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6·25전쟁', 1950년대, 한지에 수묵담채, 58.3cmⅩ73.2cm, 이응노미술관 소장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습니다. 이응노의 나이 마흔일곱이었습니다. 라디오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이름난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이 나와 "공산군이 쳐들어왔지만 후퇴시켰으니 안심하라"라고 방송을 하였습니다. 남산 근처에서 살던 이응노는 방송만 믿고 다음날 새벽에도 평소처럼 집 근처 공원에 운동을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보따리를 이고 지고 피난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라디오에서 나오는 말만 믿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서둘러 피난 짐을 싸서 가족들과 함께 남산을 넘었습니다. 고향 집으로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큰길 가에는 시신이 즐비하고 인민군 탱크가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6월 28일 새벽 한강대교가 갑자기 끊기는 바람에, 그곳으로 몰려든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리면서 떨어져 죽고 다쳤습니다. 이응노는 더 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끝내 한강을 넘지 못하고 인민군에게 넘어간 서울에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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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피난', 1950년대, 한지에 수묵담채, 26cmⅩ38.7cm,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우리 근대 미술에 한국전쟁을 직접적인 소재로 한 그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래서 실제로 자신이 겪은 피난을 드로잉한 이응노의 작품이 의미가 있다.

전쟁이 나고 서울을 빼앗긴 지 석 달이 지났습니다. 그해 9월 28일이 되어서 가까스로 서울을 되찾았지만 퇴각하던 인민군은 20대였던 이응노의 아들을 끌고 가버렸습니다. 그것이 아들과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십여 년이 지나 이응노가 유럽에서 명성을 얻어 활발히 활동할 때였습니다. 생사도 몰랐던 그 아들이 북한에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만나려 했다가 '동백림 사건'에 휘말려 아들은 만나지도 못하고 옥고까지 치러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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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재건 현장', 1954, 종이에 수묵담채, 46cmⅩ53cm , 개인소장

서울을 되찾았지만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생활은 더 힘들었습니다.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삶은 비참했습니다. 미술인들도 서울을 떠나 피난을 갔던 '도강파(渡江派)'와 인민군 아래 있었던 '잔류파(殘留派)'로 나뉘고, 조사위원회가 꾸려져 부역자(附逆者)들을 찾아냈습니다. 하지만 진짜 '부역자'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이미 인민군을 따라서 대부분 북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럼에도 이응노는 한동안 남의 집을 전전하며 다락방 같은 데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조사 받다가 작은 말실수만 해도 살아남기 힘든 무서운 시절이었습니다.

11월이 되자 중공군이 참전하고 전쟁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 이응노는 보따리를 들고 아내와 열두 살 먹은 처제를 데리고 고향 집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길에는 피난민들이 넘쳐 났습니다. 발이 퉁퉁 부을 때까지 걷다가 안양에서 피난 열차 지붕에 겨우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맞아가면서 달리는 열차 지붕 위에 죽을 힘을 다해 매달렸습니다. 몇몇은 밤새워 달리는 기차 지붕에서 추위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기차는 캄캄한 밤을 내달렸고 이응노는 이를 악물고 기차 지붕을 움겨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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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판자촌', 195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39cmⅩ53cm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지내다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살기 위한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이응노는 경찰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고 '시민권'을 받는 데도 1년 반이나 걸렸습니다.

당장 먹을 거리가 없었습니다. 배를 채우려고 집에 있는 것은 죄다 내다 팔았습니다. 조선시대 병풍, 몇 백 년 된 고가구 등 돈이 될 만한 건 모두 팔아치웠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그려서 모아둔 4~5백 권이나 되는 스케치북도 전쟁통에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림은커녕 살고 싶은 의지도 없었습니다. 어찌할 수 없이 그저 술만 마셨습니다.

그러다가 서라벌예대 동양화과 주임교수가 되었습니다. 교수나 학생들이나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특히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월사금을 면제해 달라고 학교에 청하였고 학생들을 돕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이응노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다른 학교 학생들까지 따라와 찻집에 들러 그림과 예술을 이야기하곤 하였습니다. 그럴 때면 돈을 꾸어다가 학생들에게 커피를 사야 했답니다.

전쟁이 끝나고 먹고살기도 힘들었지만 마음의 상처와 상실감때문에 더 힘들었습니다. 전쟁통에 자식도 잃고 빈털털이가 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고 오히려 나쁜 짓만 골라서 하는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을 원망하며 술로 아픔을 달래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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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꽃장수', 1950, 종이에 수묵담채, 45.5cmⅩ5.5cm. 동양 전통 재료를 사용하였지만 그의 그림은 새로운 길을 찾고 있었다.

밥 한 끼 배불리 먹기도 어려웠던 그 시절에도 예술 활동은 이어졌고 문화는 변화했습니다. 전쟁 중에 지방의 뜻 있는 사람들의 후원으로 개인전도 열었지만 화재로 인해 맡겨 놓은 그림을 모두 잃었습니다.

1950년대에는 우리 동양화단도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나는 유럽의 '앵포르멜(Informalism)'이나 미국의 '액션페인팅(action painting)과 같은 추상미술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김기창(金基昶, 1913~ 2001)이나 박래현(朴崍賢, 1920~1976) 같은 동양화가들도 추상 표현을 받아들였습니다. 어쩌면 전후 폐허와 같은 우리 현실에 이런 화풍이 맞아떨어진 듯합니다. 이를 계기로 한국 미술도 일본의 영향을 벗어나 유럽이나 미국과 직접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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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향원정', 195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123.5cmⅩ153cm

이응노는 동양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조에 도전하였습니다. 동료 화가들은 그가 나타나면 '뉴스타일'이라고 놀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일본화 느낌은 완전히 사라지고 사실적 표현에서 점차 추상에 가까워졌습니다. 그는 전통 서예의 초서(草書)를 바탕으로 추상 표현주의적인 작품을 하였습니다. 거침없는 붓질로 대상(對象, object)의 형태를 화면 안에서 다시 짜 맞추어 언뜻 보아서는 무엇을 그렸는지 알기 어려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이를 '반추상(半抽象)'이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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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취야(醉夜)' , 1956년경, 한지에 수묵담채, 40cmⅩ55cm, 개인소장

그림은 추상화되었습니다만 그는 자신의 눈길을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돌렸습니다. 이응노는 권력자보다는 함께 모여사는 이웃들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절망에 빠졌을 때마다 그들에게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느낌과 따뜻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웃을 그린 그의 그림들은 풍속화를 넘어서 어려움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높은 권력이 아니라 함께 사는 이웃에게서 용기를 얻고 아름다움과 희망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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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영차영차', 1950, 한지에 수묵담채, 39.2cmⅩ69.5cm, 개인소장

'영차영차'는 힘을 쓸 때 박자를 맞추기 위한 소리입니다. 이응노는 같은 제목으로 이 주제를 여러 번 그렸습니다. 그는 화실에 모델을 세워 놓고 앉아서 그리지 않았습니다. 밖으로 나가 일하고 생활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그들의 삶을 그렸습니다. 그는 세상의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누어 지고 가는 이웃들을 보고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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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수레 끄는 사람', 1955, 한지에 수묵담채, 18cmⅩ20cm, 이응노미술관 소장

1955년 작품 <수레 끄는 사람>은 초서(草書)와 같은 필법과 짙은 먹의 번짐으로 이 시기의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 화면 속 인물이 온 힘을 다하는 순간을 몇 번의 굵은 필치로 표현하였습니다. 인물은 고개를 들어 시선을 앞으로 향하고 허리는ㄱ자로 숙였습니다. 크고 무거운 수레를 끌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 보입니다.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있는 그림입니다. 언뜻 보면 한자 '힘쓸 노(努)'와 닮아 보이기도 합니다. 이응노는 1960년대에 파리로 진출해서 '문자추상' 연작으로 유럽에서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벌써 글자가 그림처럼 되는 ‘문자추상’ 작품의 씨앗을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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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생맥', 1956, 한지에 수묵담채, 133cmⅩ68cm, 1958년 도불기념전 출품작

전쟁이 끝나고 세상이 어수선했지만 이응노는 잘못된 걸 보면 참지 못하고 앞장서서 나무랐기 때문에 화단(畵壇)과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어려울수록 용기를 내어 새로운 경향의 작품을 연구하였습니다. 1956년에는 '동양화의 감상과 기법'이라는 중고등학교 교재를 출판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의 해마다 개인전을 열 정도로 작업에 열중하였습니다. 1950년대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추상화풍으로 새롭게 개척한 시기였습니다. 1957년 작품이 미국 '록펠러재단'에 판매되고 해외에 알려져 프랑스의 화랑에서 초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초청장을 받은 것은 1956년이었지만 여권이 나온 것은 1958년이었습니다. 여권을 받는 데 무려 2년이나 걸린 셈인데요. 그것은 '국전 추천작가'를 그가 거절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다른 화가들의 방해도 있었답니다. 그럼에도 여권을 받았고 그는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갈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울 소공동에 있는 중앙공보관에서 《도불전( 渡佛展)》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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