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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Dec 18. 2024

억새와 유채, 자연의 소리를 그린 박광진의 빛과 풍경,

한국 구상미술의 발전을 이끈 박광진의 대표작, 네 가지 섹션으로 만나다


풍경은 말이 없지만, 그의 침묵 속엔 무수한 이야기가 고요히 깃들어 있다. 흐르는 물빛, 억새의 흔들림, 유채꽃 사이의 속삭임은 시간이 깎고 다듬은 자연의 언어다. 박광진의 화폭은 이러한 속삭임을 빛과 선으로 담아내며, 우리가 지나쳐 온 풍경을 다시 보고 느끼게 한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내년 2월 9일까지 한국 구상회화의 거장 박광진(1935~)의 개인전 《박광진: 자연의 속삭임》이 열린다. 이번 전시는 한국 구상회화의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한 박광진 작가의 예술 세계를 재조명하며, 그의 작품 세계를 네 가지 섹션으로 나눠 선보인다. 박광진의 대표작과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 중 117점을 엄선한 대규모 전시는 그의 평생에 걸친 예술적 여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기회다.

자화상, 1964, 캔버스에 유채, 53 × 41 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전시 제목 ‘자연의 속삭임’은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비롯되었다. 작가는 “자연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지만, 내게는 그것이 속삭임처럼 들린다. 이를 화폭에 어떻게 옮길 수 있을지 늘 고민한다”고 말하며, 자연과의 깊은 교감을 작품의 중심에 두었다. 박광진이 화폭에 그려온 자연의 소리는 그의 평생 응답이자 현재진행형의 대답이다.

네 개의 섹션으로 살펴보는 박광진의 예술 여정

전시는 ‘탐색: 인물, 정물, 풍경’, ‘풍경의 발견’, ‘사계의 빛’, ‘자연의 소리’라는 네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통해 박광진의 초기 탐색기부터 자연과의 교감을 응축한 후기 작품까지 그의 예술적 변천을 점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1. 탐색: 인물, 정물, 풍경

박광진의 첫 유화 작품인 <창경원 입구>(1952)를 비롯해 일상 속 다양한 소재를 탐구하며 예술적 방향성을 모색한 초기 작품들이 전시된다. 그는 이봉상, 손응성, 박수근 등 선배 작가들의 영향을 받아 한국 구상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기여했다. 이 시기 그의 작업은 정물, 인물, 풍경 등 구상회화의 여러 장르를 아우르며 예술적 근간을 다졌다.

향원정, 1965, 캔버스에 유채, 50 × 65.5 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해인사 법당, 1966, 캔버스에 유채, 50 × 65.5 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2. 풍경의 발견

1967년부터 1990년대까지 박광진은 도시와 농촌의 경관, 그리고 세계 각국의 명소를 탐방하며 풍경화에 깊이 천착했다. 농촌의 논밭, 도시의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유럽과 아시아 명소까지 다채로운 풍경은 그의 화폭을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이 시기 작품들은 자연에 대한 작가의 깊은 관심과 탐구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작업 세계가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당인리 발전소, 1976, 캔버스에 유채, 72.5 × 91 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3. 사계의 빛

196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의 작품을 통해 박광진은 한국 자연의 순수함과 사계절의 변화, 그리고 빛의 아름다움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그는 물에 비친 풍경을 통해 공간감을 확장하고 빛의 효과를 강조하며 시각적 깊이를 더했다. 작품들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면서도 작가의 섬세한 감각과 주관적 해석이 가미된 예술적 깊이를 보여준다.

인수봉, 1975, 캔버스에 유채, 129.4 x 95.54 cm, 정부미술품(국립현대미술관) 소장


4. 자연의 소리

전시의 마지막 섹션은 제주를 중심으로 한 박광진의 후기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제주도는 그에게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으로, 억새와 유채를 중심으로 한 작품에서 자연의 리듬과 생명력이 화폭에 살아난다. 이 시기의 대표작인 <자연의 소리> 연작은 배경을 생략한 채 중심 소재를 세밀하게 묘사하거나, 자연의 리듬을 표현하기 위해 가느다란 세로선을 도입하는 등 독창적인 기법이 돋보인다. 또한 근경을 뭉개어 덩어리처럼 보이게 표현하며 시각적 실험을 이어갔다.

자연의 소리 2019-9-B, 2019, 캔버스에 유채, 120 × 110 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자연과 화폭의 대화, 현재진행형인 박광진의 예술

박광진은 정물, 인물, 풍경이라는 구상회화의 전통적 주제를 시작으로, 점차 풍경화로 중심을 옮기며 한국 자연의 아름다움을 기록하고 재해석했다. 그가 화폭에 담은 억새의 흔들림, 물빛에 반사된 풍경,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장면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자연과의 교감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는 한국 구상미술의 거장이 걸어온 길을 조명하는 동시에, 그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동시대 미술계에 기여했는지를 깊이 있게 살펴볼 수 있는 자리다. 90세를 눈앞에 둔 작가는 여전히 자연의 속삭임에 응답하며 새로운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박광진의 화폭 속 자연은 우리가 미처 듣지 못했던 소리, 보지 못했던 장면들을 일깨우며 그의 예술적 여정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내설악 설경, 1985, 캔버스에 유채, 96.2 x 129.2 cm, 정부미술품(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억새와 유채, 자연의 소리를 그린 박광진의 빛과 풍경, 서울시립미술관 《박광진: 자연의 속삭임》 < 전시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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