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가을은 발걸음을 재촉하고, 겨울이 문 앞까지 다가왔습니다. 차갑게 내려앉은 바람은 어느새 코끝을 시리게 하지만, 낮게 드리운 햇살은 아직도 따뜻합니다. 이런 초겨울의 마당이나 골목 끝에는 오래된 감나무가 유독 눈에 들어오죠. 잎은 모두 떨구었지만, 가지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주홍빛 감은 마치 겨울의 초대장을 건네는 듯합니다. 정겹고 따뜻한 풍경입니다. 감은 깊어 가는 가을의 주인공이자 겨울을 안내하는 전령사인 것 같습니다.
조선 후기 화원 이인문(1745-1824)의 도봉원장(道峰苑莊) 그림 속에서 감나무를 만날 수 있습니다. 도봉산 자락, 고요하게 자리 잡은 마을과 집들 사이로 서 있는 감나무. 세월을 이겨낸 나무줄기와 마을 풍경은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시간과 기억의 일부처럼 보입니다. 유춘(有春) 이인문(李寅文)은 정조의 규장각 초대 차비대령화원(조선후기 왕실과 관련된 서사 및 도화 활동을 담당하기 위하여 도화서에서 임시로 차출되는 화원)으로 활동하였고 단원 김홍도와 함께 조선 후기 정조 · 순조 연간을 대표하는 도화서 화원 화가입니다. 그림 오른쪽에 우뚝 솟아오른 봉오리가 북한산 자락인 도봉산입니다. 도봉산과 기와 건물의 원장을 평원(平遠) 방법으로 그려 냈습니다. 오른편 원장을 중심으로 자운봉과 오봉, 이웃한 북한산 삼각산(인수봉, 백운대, 만경대) 등 세 가지 볼거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능선에 필선(筆線)의 힘을 주어서 산세가 웅장하고, 계곡이 유장(悠長)하게 느껴집니다. 또 원장 가까이 마을이 자리 잡고 있어 인간과 자연의 조화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인문의 그림 속 풍경은 서울 북동부 우이동이나 도봉산 계곡 어디쯤으로 보입니다. 그림은 평화롭고 서정적인 마을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마을 뒤로 펼쳐진 도봉산의 웅장한 능선과 넉넉하게 흐르는 개울, 가지가 늘어진 능수버들 숲은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조화를 보여주죠. 그림 중앙 하단, 초가집 앞에는 유난히 눈에 띄는 두 그루의 나무가 보입니다. 먹으로 진하게 표현된 큰 타원형의 잎은 우리에게 익숙한 감나무로 추정됩니다. 집 앞이라는 위치와 나무의 생김새로 볼 때 더욱 확실해집니다. 그림 속에는 이외에도 오른쪽 언덕 위에 한 그루의 감나무가 더 있어 총 세 그루의 감나무가 등장합니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흔적처럼 줄기에는 깊이 패인 ⌃자 형태의 구멍이 눈에 띄는데, 이는 노거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목의 특성입니다.
감나무는 대개 집 안에 심겨져 가족들의 간식거리로 쓰였지만, 이 그림 속에서는 모두 담장 밖에 심겨있습니다. 이는 개인 소유라기보다는 원장(苑莊)에 속한 과일나무였음을 암시합니다. 가을이면 수확한 감 중 최상품은 원장에 바치고, 나머지는 나누어 먹거나 약으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원장(苑莊)이라는 말은 오늘날에는 거의 쓰이지 않지만, 그림을 보면 제법 규모 있는 기와 건물이 정연히 자리 잡고 있어 별서(別墅)로 짐작됩니다. 원장 앞에는 여러 채의 초가집이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아마 원장을 관리하던 사람들의 거주지이거나 부속 토지에서 농사를 짓는 백성들의 집이었을 것입니다.
감나무의 원산지는 중국 양자강 남부지역으로, 비교적 따뜻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나무입니다. 하지만 도봉산 자락에서도 감나무가 자랄 수 있었던 이유는 산들이 차가운 북풍을 막아주었기 때문입니다. 도봉산과 북한산이 북쪽을 감싸안아 주었고, 정남향의 양지바른 지형 덕분에 상대적으로 보온 효과가 컸을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감나무를 각별히 아꼈습니다. 감은 단순한 간식거리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귀한 과일이자 약재로도 쓰였고, 단단하고 치밀한 감나무 목재는 고급 가구 재료로 널리 사랑받았습니다. 특히 검은 줄무늬가 들어간 먹감나무는 고급스러운 멋과 실용성을 겸비한 귀한 목재로 알려져 있죠. 왼쪽으로 넉넉히 흐르는 개울과 능수버들, 들판을 지나가는 농부의 모습은 여유로움과 한가로움을 더합니다. 원장 뒤편의 높은 소나무와 전나무는 마치 집을 감싸 안은 듯 품격을 더해줍니다. 그리고 그 아래 자리한 감나무는 주홍빛 감을 매달고 겨울이 찾아오고 있음을 조용히 알려줍니다.
마을 옆 언덕배기에는 감나무 이외에도 대추나무, 배나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원장 앞 작은 숲에는 제사상에 올라가는 대추, 감, 배등 조율이시(棗栗梨柿)의 주요 과일을 일부러 심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밤나무는 다른 나무들과도 잘 섞여 자라므로 뒤쪽 숲에서 따로 조달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이처럼 대문 밖에 심겨진 과일나무들은 자연의 선물이자,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던 따뜻한 기억의 한 조각이었을 것입니다.
이인문의 다른 그림에도 감나무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우리의 정서와 오랜 삶의 일부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나무는 겨울로 가는 문턱에 여전히 따뜻한 색을 품은 채 서 있습니다. 그 모습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우리의 고요한 기억과 정서를 닮아 있습니다.
앞선 이암의 모견도에는 큰 감나무 아래서 어미 개와 강아지가 한가롭게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암의 자는 정중(靜仲)이고, 세종대왕의 넷째 왕자 임영대군의 증손으로 두성령(杜城令)을 제수받았다. 왕실의 후원을 받아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한 품위 있는 화가였다. 그는 영모와 화조로 조선시대 초기 화풍을 정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초상화에도 뛰어나 1545년에는 중종의 어진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혹시 ‘감쪽같다’라는 말의 의미를 아시는지요? 감나무의 가지를 고욤나무에 접붙이고 끈으로 칭칭 감아두면 두 나무가 밀착되어 접을 붙인 표시가 나지 않게 되고 둘은 하나의 나무가 됩니다. 이렇듯 감접을 붙인 것처럼 흔적이 없는 상태를 ‘감접과 같다’고 표현하였고 ‘감접과 같다’가 ‘감쪽같다’로 쓰인 것이 이 말의 어원이라고 합니다.
감은 명태만큼이나 참 이름도 많죠. 덜 익었으면 땡감, 나무에서 익으면 홍시, 따서 익히면 연시, 소금물에 담가 익히면 침시, 말리면 곶감, 불에 말린 것은 오시, 덜 말리면 반건시, 잘라 말리면 편시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옛말에 감이 익을 무렵에는 약방이 문을 닫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몸에 좋은 약효가 있다는 얘기지요. 특히 볕에 말린 곶감의 약성은 보통 감과 달라서 얼굴의 주근깨를 없애고 목소리를 곱게 한다고 하니 오늘은 감을 실컷 먹어봄 직합니다. 이제는 추운 바람이 불어오지만, 감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겨울을 준비합니다. 마치 우리에게도 잊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어릴 적, 감나무에 매달린 감을 따기 위해 긴 막대를 들고 서성이던 모습이 떠오르지 않나요? 고목의 가지에서 하나 둘 감을 따 먹으며 그 속에서 새콤달콤한 웃음을 나누던 시간들 말이죠. 어느덧 우리는 그 감나무처럼 시간의 가지를 뻗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지 끝에 남아 있는 붉은 감처럼, 우리도 작은 따뜻함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나무는 겨울을 맞이하는 작은 등불 같은 존재입니다. 당신의 기억 속에도 그 감나무가 환하게 빛나고 있기를 바랍니다.
도봉산 자락에 담긴 감나무 이야기 < 옛그림속 그림이야기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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