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생산과 유통 측면에서 일어난 근대적 변화는 만화, 삽화 등의 인쇄 미술의 등장이다. 인쇄 미술은 근대기 새로운 시각 언어로서 전통회화에서 다룬 적 없는 새로운 시각적 체험을 제공하고 서구의 시각 문법과 근대적 감각을 체득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만화는 근대기의 새로운 시각 언어로 신문과 잡지라는 대중매체와 함께 성장한다. 대중매체를 통해 공산품처럼 대량 생산되어 전파되었고, 시각 이미지의 공공화와 대중화를 이룬다.
이도영,『대한민보』1면, 1909. 6. 2
동양화가 이도영이 『대한민보』에 그린 만평이 최초의 만화로 기록되어 있다. 이도영의 만평은 만화라는 장르가 본격적으로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는 신호탄이자, 많은 미술가들이 신문과 잡지에 만화를 발표하거나 연재하게 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대한민보』는 사장인 오세창이 일본에 머물 당시 신문의 만화 게재가 일반화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 구성을 따 와 시사만화를 도입한다. 그에 따라 오세창과 인연이 있던 이도영은 시사만의 그림을 담당하여 비율 축소. 확대, 왜곡 혹은 동물의 의인화를 통해 만화를 그렸다.
(좌) 이도영,『대한민보』1909. 6. 10. (우) 이도영, 남의 숭내(남의 흉내),『대한민보』1909. 6. 17.
『대한민보』는 시사만화를 1면 중앙에 배치하여 매일 게재하여 비중 있게 다뤘다. 주제는 크게 『대한민보』 초기에 자주 등장하는 대한협회 취지와 계몽을 촉구하는 만화,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거나 당시 사회의 관심이 높은 사건을 주제로 그린 만화, 제국주의 열강들의 경제적 침탈을 주제로 그린 만화, 친일 인물과 친일 단체들의 활동을 비판한 만화 등 시사적 주제를 가지고 풍자하는 그림들이 주를 이뤘다.
'멍텅구리'의 게재 공지,『조선일보』1924. 10. 12.
하지만 한일합병 이후 민족 자본의 신문들이 일제에 의해 검열당하고 정간, 폐간이 거듭되면서 최초의 만화를 게재하던 『대한민보』 또한 폐간된다. 식민지 시기 무단 강압 정책은 1920년대가 되자 이른바 문화통치로 통치 체제가 바뀌면서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대일보』 와 같은 조선어 신문이 발행된다.
멍텅구리에 나타나는 만화적 기호
각 신문사는 독자를 확보하고 판매 부수를 늘리기 위해 판매 전략의 하나로 네 컷 연재 만화를 내놓았다. 그 중 단연 대중적인 인기를 끌며 장기간 연재에 성공한 사례는 1924년에 시작하여 1927년 3월 11일까지 2년 5개월간 지속된 『조선일보』의 <멍텅구리> 시리즈였다.
<멍텅구리> 시리즈는 기승전결이 있는 네 컷 만화로 『매일신보』와 『동아일보』에서 일한 적이 있는 김동성의 기획과 동양화가 노수현과 이상범 등이 그림을 그리고, 이상협, 안재홍이 글을 담당하여 공동 제작한 만화이다. 산수화가로 잘 알려진 심산 노수현은 오랜 기간 동안 <멍텅구리>의 삽화가로 활동하며 당시 삽화가로서 명성을 얻는다.
멍텅구리 헛물켜기 방문편,『조선일보』
<멍텅구리>는 1910년대 이도영의 시사 만평처럼 시사성보다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따라 오락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럼에도 당시 세태를 풍자하고 시의성을 확보하며 근대기 인쇄 미술의 품격을 보여주었다. <멍텅구리>의 주된 이야기는 경성에 살고 있는 최멍텅이라는 인물이 겪는 사건들이다. 모던 보이였던 최멍텅은 서구식의 모자와 지팡이, 양복, 콧수염 등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당시 모던 보이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처음으로 성공한 만화 캐릭터였다. 도시 소비 문화를 선도하며, 당시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도 있었지만, 새로운 인간형으로 독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갔다. 당시 조선인 독자들에게 모던 보이라는 이미지는 1910년대 후반부터 상영되었던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 영화를 통해 접한 이미지이기도 했다.
멍텅구리 총독부에,『조선일보』
<멍텅구리>는 자체 제작 만화로 실제 경성의 모습을 반영하였다. 경성에서 최멍텅이라는 인물이 겪는 실제 사건으로 인식하게 하며 더 몰입으로 이끌었다. 실제로 만화에서는 당시 경성의 길거리 모습이 간략화되었지만 조선총독부, 경복궁과 같은 랜드 마크를 특징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실제 사건을 만화에 담으면서 풍자했다. 을축년(1925) 대홍수 때 주요 신문사들이 구제활동을 나갔던 실제 사건을 포함시켜 빠르게 만화로 게재한 것이 그 예이다. 이외에도 일본 공병대 50여 명이 뚝섬 주민을 구호하려다가 신용산 둑이 터져서 일본인 촌으로 강물이 엄습했다는 소식을 만화로 제작하기도 한다. 당시 조선인들을 화나게 만들었던 사건들을 최멍텅에게 투영해 풍자하고 비꼬면서도, 보도적이고 오락적으로 전달한 것이다.
노수현_산수도_한지에 수묵담채_33×114cm_20세기 초 /출처: 한원미술관
근대적 만화 기법과 문화 기호들이 만화에 적극 수용되어도, 만화를 그리는 작가의 실력이 받쳐주지 못했다면 <멍텅구리>는 흥행하지 못 했을 것이다. 노수현은 근대 동양화 대가 중 하나로 산수화를 잘 그렸다. 그러나 전통 회화를 학습하였음에도 신문 연재소설의 삽화나 만화 제작에 기본적으로 서양화법을 사용했다. 당시는 서구의 펜 문화와 결합하여 미술가와 만화가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서구식 스타일이 일반적이었다. 그럼에도 노수현은 동양화 화가로서 연재소설의 내용에 따라 전통 화풍의 느낌을 내는 필선이나 진한 먹선을 사용하여 강렬한 명암 대비의 작품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당시 신문 연재 만화는 유명작가가 삽화를 그리면서 짧은 기간 동안 변화 발전했고 그에 따라 대중들의 호응이 따라왔다. 산수화가로 잘 알려진 심산 노수현은 <멍텅구리>의 삽화가로도 활동하며 근대기 인쇄미술을 이끌었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 배경 속에서 <멍텅구리>는 적극적인 저항의 내용을 담지는 못했으나, 유희적이고 풍자적으로 현실을 담았다. 그렇게 암울한 식민지 시절에도 웃음을 놓치지 않으며 저항은 계속되었다.
[저항하는 예술 19] 식민 정책을 풍자한 네 컷 만화 '멍텅구리' < 미술일반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