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옛 그림 속 나무 이야기 ⑤]

by 데일리아트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화첩 속 귤나무


겨울이 되면 빛을 발하는 과일이 있죠. 귤입니다. 귤은 제주도의 상징이기도 한데요. 귤나무는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중요한 상징적 나무 중 하나입니다. 귤나무는 삼국시대부터 귀한 나무로 여겨졌으며, 특히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지방 토산물로서 왕실에 바쳐지기도 했습니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귤의 재배와 헌납이 자주 언급됩니다. 귤은 열매의 상징성 외에도 향과 색감 때문에 왕실과 문인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생태적으로 귤나무는 따뜻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상록수로, 특히 제주도와 남부 해안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귤나무는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햇빛을 필요로 하며, 겨울철에도 푸른 잎을 유지하여 생명력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또한 귤의 껍질은 약용으로 쓰였으며, 과육은 단맛과 신맛을 함께 지녀 다채로운 음식 문화 속에서도 사랑받아 왔습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나 생태적으로 사랑받아 온 귤나무는 1979년 보물로 지정된 옛 그림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서 만나볼 수 있는데요. ‘탐라순력도’는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이 1702년(숙종 28) 제주도 각 고을을 순시하며 거행했던 여러 행사 장면을 기록한 채색 화첩으로서 화공 김남길(金南吉)이 그렸습니다. 총 41폭으로 이루어졌으며, 매 그림의 상단에 네 자로 제목을 달고 하단에는 그림에 대한 간결한 설명을 첨가하였습니다. ‘순력도’라는 이름의 기록화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것으로 18세기 초 제주도의 관아 건물, 군사 시설, 지형, 풍물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제주도 역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당시 중앙에서는 도화서 화원(畵員)들이 의궤도를 비롯한 기록화를 담당하고 있었는데요. 『탐라순력도』는 지방에서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화공의 이름이 남아 있고 그 화필의 수준이 중앙 화원들이 그린 의궤도를 능가하고 있어 독보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순력(巡歷)은 본래 관찰사가 도내의 각 고을을 순회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제주의 경우 전라도 관찰사가 매년 2차례 제주에 내려와 순력하는 일이 불가능하였기에 자신의 임무 중 일부를 제주목사에게 위임하였는데, 순력의 임무 역시 그중의 하나였습니다. 이 예에 따라 제주목사 이형상은 1702년(숙종 28) 가을 순력을 음력 10월 29일 출발하여 11월 19일까지 21일 동안 실시하게 됩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조선 후기 탐라의 삶과 자연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탐라순력도 화첩 중 귤나무가 그림 속에서 중심적인 상징물로 나타난 고원방고와 귤과 관련된 내용이 그려진 감귤봉진, 귤림풍악 등 세 그림을 소개합니다.


『탐라순력도』에 그려진 귤나무의 의미


'탐라순력도' 화첩은 귤나무가 재배된 정원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림 속 귤밭(감귤원)은 제주에서 가장 귀한 농업 자원으로, 귤나무는 가지가 넓게 뻗고 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귤밭은 주로 제주의 관아와 왕실의 하사품을 위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귤나무는 그 자체로 제주의 중요한 농산물뿐만 아니라 중앙에 대한 공물(貢物)의 역할을 했습니다. 귤나무의 생동감 있는 묘사는 단순히 농업적 중요성을 넘어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표현한 것으로, 그 시대 사람들에게 귤이 얼마나 중요한 자원이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제주도의 화산토는 물 빠짐이 좋고, 귤나무는 따뜻한 기후에서 잘 자라므로 감귤 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제공합니다. 『탐라순력도』 화첩 속 귤나무는 이러한 자연적 배경을 생생히 반영하며, 귤 재배의 번영을 나타냅니다. 귤나무는 사계절 푸른 잎을 유지하며, 탐라 지역의 강한 바람과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잘 자라납니다. 이 생명력은 제주의 상징적인 자연적 이미지를 대변합니다. 귤나무는 단순히 제주의 자연물일 뿐 아니라 경제적 가치를 지닌 농업 자원이었습니다. 귤은 지역 주민들에게 생계의 일부를 제공했으며, 공물로서의 역할로 인해 귤나무 재배는 제주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활동이었습니다. 귤나무는 탐라의 풍요와 번영을 나타내며, 탐라 주민들의 삶 속에 깊숙이 뿌리 내린 나무였습니다. 『탐라순력』의 귤나무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드러내는 상징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탐라순력도』는 귤나무와 제주 지역의 농업 문화를 기록한 중요한 문화재로, 현대에도 제주의 감귤 산업과 문화적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핵심 자료가 됩니다. 귤나무는 오늘날에도 제주를 상징하는 대표적 나무로 여겨지며, 탐라의 옛 기록 속 귤나무 이야기는 전통 농업과 생태적 지속 가능성을 되새기게 하는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옛 그림 고원방고(羔園訪古)에 나타난 귤나무


조선의 문인들은 귤나무를 단순한 나무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귤나무를 통해 계절의 변화를 관찰하고, 생명력과 조화를 느끼며 삶의 교훈을 얻었습니다. 귤은 종종 '제주 감귤'로 대변되는 고귀한 과일로 언급되며, 시와 그림에서 자연의 섭리를 상징하는 소재로 사용되었습니다. 귤나무의 뿌리 깊은 생명력과 열매를 맺는 과정은 인내와 결실의 교훈을 제공합니다. 조선 사대부들은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인간 사회의 도덕적 가치와 연결 지었습니다.

2402_6271_1023.jpeg

김남길, ‘고원방고(羔園訪古·1702년)’, 종이에 수묵담채. 55×35.5㎝, 국립제주박물관 소장

‘탐라순력도’ 41면의 그림 중 오늘날 서귀포 강정동에 있던 귤나무 과수원 ‘고둔과원(羔屯果園)’에 목사가 방문했을 때의 모습을 그린 것이 『고원방고(羔園訪古)』’입니다. 고둔과원은 현 용흥동 속칭 염돈마을 운랑천(雲浪泉) 부근의 염돈과원이라 불리는 곳으로 파악됩니다. 효종 때 제주목사를 지냈던 이원진(1594-1665)의 저서 『탐라지(耽羅志)』에 따르면, 이곳은 세종 때 한성부판윤을 역임했던 고득종(高得宗, 1388-1452)의 별장터로도 유명한 곳임을 알 수 있는데요. 고득종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통신사로 일본, 그리고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본관이 제주(濟州)였습니다.

2402_6272_1229.jpg

필자가 1월 20일에 방문한 운랑천(雲浪泉) 모습. 마을 안길 모퉁이에 위치한 큰 암반 틈에서 샘이 솟는다. 바로 앞 귤향촌 건물지가 ‘왕자구지(王子旧址)’로 추정되며 그 주위에 고둔과원으로 추측되는 귤밭이 지금도 존재한다.


당시 제주도에는 임금님께 진상하기 위하여 제주목이 직영하는 42개의 귤 과수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림에서 먼저 눈에 띄는 장면은 녹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목사의 방문을 환영하기 위하여 풍악을 울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장소는 과수원 한쪽 옛 제주도가 탐라국이던 시절의 왕자와 관련이 있는 ‘왕자구지(王子旧址, 왕자가 살던 집터)’입니다. 환영의 의미일지는 모르겠으나 목사의 공식 순례에 왜 풍악이 필요한지 지금의 눈으로 보면 이해가 어렵기만 합니다.



2402_6273_1346.jpg

‘고원방고(羔園訪古·1702년)’ 그림 중 ,‘왕자구지(王子旧址)’ 세부


과수원 주위에 둥글게 쌓아 올린 현무암 돌담, 그 안에서 다양한 귤나무들이 열매를 맺으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림 속 과수원의 모습은 오늘날 제주도에서도 여전히 그리운 풍경입니다. 짙은 색 현무암으로 쌓아 올린 경계석은 세 줄로 차곡차곡 올려졌고, 그 안쪽의 땅은 바람을 막기 위해 주변보다 낮게 조성되었습니다. 단순한 선으로 묘사된 듯한 돌담 안에는 31그루의 귤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귤나무들은 낮은 키와 사방으로 뻗은 가지들 덕분에 탐스럽고 다채로운 열매를 자랑합니다. 이들 중 붉은색 열매를 맺은 나무는 17그루, 농담의 차이를 보이는 노랑 귤나무는 13그루, 열매가 없는 나무도 1그루 포함되어 있습니다. 귤나무 품종마다 차이를 나타내려고 한 것으로 보이며 적어도 5품종 이상의 귤나무를 재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가는 나무마다 수십 개에서 백여 개의 열매를 그렸지만, 당시 실제 수확량을 기록한 문헌에 따르면 나무 한 그루당 평균 열매 수는 품종에 따라 크게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당금귤은 550개, 동정귤은 120개, 청귤은 276개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식물분류학적 기준으로 이 귤 품종들을 정확히 규명하기는 어렵지만, 오늘날 제주도에 남아 있는 당유자, 동정귤, 병귤, 유자, 진귤, 청귤 등의 재래종 귤나무로 짐작됩니다.


과수원의 북쪽에는 '진목전(眞木田)'이라는 작은 숲이 그림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진목(眞木)은 참나무를 뜻하지만, 그림 속 나무들이 높고 곧게 뻗은 점으로 보아 상록활엽수인 가시나무나 참가시나무일 가능성이 큽니다. 바람막이 역할을 톡톡히 했을 이 숲은 한라산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막아 귤나무들이 무사히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왔을 것입니다. 숲 아래쪽으로는 대나무가 심어져 또 다른 방풍림 역할을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1911년 일본에서 들여온 온주밀감 이후 현대의 귤 과수원은 삼나무 방풍림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과수원의 오른쪽 아래에는 관리인의 숙소로 보이는 네 채의 집이 자리 잡고 있고, 그 둘레를 매실나무가 감싸고 있습니다. 귤밭을 지키듯 자리한 이 매실나무들은 단순히 꽃 감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약재와 열매 수확을 목적으로 심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이형상이 제주 목사에서 물러난 1704년에 저술한 『남환박물(南宦博物)』에서는 귤밭에 대해 '귤과 유자나무가 숲을 이루고 매화나무 등걸이 구부러져 있다'고 묘사합니다. 하지만 귤이 익는 계절은 겨울이고 매화가 피는 시기는 초봄이니, 관람 목적보다는 열매를 활용하기 위한 실용적 이유로 심었음이 분명합니다.


2402_6282_3547.jpg

서귀포시 서홍동에 위치한 천주교 피정센터 면형의집. ‘내가 머물렀던 자리를 잠시 벗어나서 나를 바라보는 시간.’ 천주교에서는 이를 피정(避靜)이라 부른다. 식물학자이자 서귀포성당 제3대 주임이던 타케 신부는 1911년 일본에서 활동하는 선교사에게 왕벚나무를 선물로 보냈고, 그 답례로 온주밀감 나무 14그루를 받았다. 이것이 제주 귤 재배 역사의 시작이다. 당시 들여온 14그루의 나무 중 한 그루가 백 년 넘게 면형의 집 앞마당에 생존해오다 2019년 고사했다. 면형의 집은 고사한 나무를 방부 처리해 성당 안쪽에 전시하고, ‘홍로의 맥’이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국내 최초의 온주밀감 나무가 심어졌던 장소에는 60년 된 감귤나무가 그 뒤를 이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감귤나무 옆에는 감귤 시원지 기념비도 세워졌다. 제주에서 특별한 공간을 찾는다면 ‘면형의 집’이 바로 그런 곳이다. 특히 정원에는 한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노거수인 수령 240년 된 ‘성당 녹나무’를 만날 수 있다.




감귤봉진(柑橘封進)


2402_6278_264.jpeg

김남길, ‘감귤봉진(柑橘封進)·1702년)’, 종이에 수묵담채. 55×35.5㎝, 국립제주박물관 소장




한 해 동안 농사지어 생산한 여러 종류의 귤과 한약재로 사용하는 귤껍질을 진상하기 위하여 봉진 하는 모습입니다. 봉진(封進)은 밀봉하여 올린다는 뜻으로 지금의 포장 작업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감귤봉진’은 추수한 귤을 어떻게 선별하고 포장해서 보내는지 잘 보여주는데요. 제주목 관아에 있던 2층 누각인 망경루(望京樓,한양 쪽을 바라보는 정자) 앞뜰에서 귤을 상자에 넣어 봉(封)하는 과정 등이 상세히 그려져 있습니다. 좌측 건물 연희각에 앉은 이형상 목사가 작업하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고 그 오른쪽에는 남정네들이 귤 담는 궤짝을 만들고, 짚을 나누고 있으며, 아낙네들이 궤짝에 귤을 담고 있습니다.



2402_6280_2849.png

조선시대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던 제주목 관아[濟州牧 官衙]는 지금의 관덕정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에 분포해 있었으며, 이미 탐라국 시대부터 주요 관아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주목 관아는 일제강점기 때 집중적으로 훼철되어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 2002년 12월에 복원을 완료하였다. 가장 멀리 망경루가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귤의 진상은 9월부터 시작하여 매 10일 간격으로 1운(運)에서 20운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귤을 진상하기 위해 마련한 제주의 42곳 과원에서 생산되는 양으로서는 봉진의 수량을 충당하기에 역부족이었기에 관(官)에서는 일반 민가(民家)에 있는 귤나무를 일일이 조사하여 관리하였습니다. 일반 백성들에게는 귤나무 8주(株)를 기준으로 하여 1년의 역(役)을 면제하여 주는 방안이 마련되기도 했지만, 귤이 열매를 맺으면 관가(官家)에서 일일이 그 맺은 바를 헤아리고 장부에 기록하였다가 그 수를 귤나무 소유자에게 모두 부과시켰기 때문에 기상 변화에 따른 많은 문제가 파생되었습니다. 즉, 수확시기까지는 많은 시일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충 또는 바람 등에 의해 떨어진 귤마저 그 소유자에게 전가 시켰던 것이죠. 이에 민가에서는 오히려 귤나무가 고통을 주는 나무라 하여 고사(枯死)시키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합니다. 어찌 보면 귤은 백성의 눈물로 짠 과일이었습니다.


당시 그림에 기록된 봉진 수량은 당금귤(唐金橘) 678개, 감자(柑子) 25,842개, 금귤(金橘) 900개, 유감(乳柑) 2,644개, 동정귤(洞庭橘) 2,804개, 산귤(山橘) 828개, 청귤(靑橘) 876개, 유자(柚子) 1,460개, 당유자(唐柚子) 4,010개, 치자(梔子) 112근, 진피(陳皮) 48근, 청피(靑皮) 30근으로 그림 하단에 당시 진상한 감귤의 종류와 개수까지 기록하여 목사의 세심함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귤림풍악(橘林風樂)



2402_6281_3044.png

김남길, ‘귤림풍악(橘林風樂)·1702년)’, 종이에 수묵담채. 55×35.5㎝, 국립제주박물관 소장


『귤림풍악』은 망경루 후원(後園) 귤림(橘林)에서의 풍악도(風樂圖)입니다. 아마도 몇 회차의 귤을 나라님께 진상하고 이형상 목사도 한시름을 놓았는지 이 과원에서 주안상에 풍악을 울리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는데요. 좌측에는 망경루, 정면에는 작은 누각 귤림당이 있고 그 뒤 편으로 오늘날에 없는 방풍림과 과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세워져 있습니다. 당시 제주읍성 안에는 동.서.남.북.중과원(中果園) 5개와 별과원(別果園) 등 6개의 과원이 있었는데, 이 과원은 북과원(北果園)으로 유추됩니다. 과원 한가운데에는 풍악을 즐기는 모습이 보이며, 과원 둘레에 대나무가 방풍림(防風林)으로 심겨 있습니다. 이형상 목사는 아직 진상을 위해 남겨 놓은 밀감밭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주위로 관기들과 관아 아전들이 앉아있는 모습, 연회 장소로 다가가는 지역 유생들의 모습도 그려져 있습니다.


귤림당은 목사가 공무를 수행하다 휴식 차 잠시 이곳에 들려 거문고와 시문을 즐겼다는 곳입니다. 이 누각의 건립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탐라순력도에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1,700년 이 전에 세워진 것은 분명합니다. 이처럼 귤과 제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요. 제주도 유배객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도 자신의 거처를 ‘귤중서옥(橘中書屋)’이라 불렀을 정도니까요.


이렇게 고생스레 포장한 귤은 험한 뱃길을 지나 한양으로 가서 드디어 왕에게 진상됐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제주의 귤이 조정에 도착하면 임금은 성균관 유생들에게 그 일부를 나누어 주고 과거를 시행하였는데요, 이것이 이른바 ‘황감제(黃監制)’라는 과거시험입니다. 오직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만을 대상으로 치르는 시험으로 하루 만에 단 한 차례 시험을 보고 수석 합격자에게는 바로 사제(賜第)를 내려 관직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번 주 일요일 설 연휴를 맞아 창덕궁을 방문하시는 시민들께는 황감제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를 해드려야겠습니다.


[옛 그림 속 나무 이야기 ⑤] 제주목 관아 군사들이 밤낮으로 지키던 과일 ‘귤’ 이야기 < 옛그림속 그림이야기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keyword
작가의 이전글[스크린 밖으로 나온 악녀들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