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도입시기 풍경
다방(茶房)'이라는 말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려시대이다. 차와 술 등 나랏일을 주관하는 관사가 '다방'이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도 다례(茶禮)의 명목으로 외국 사신들의 접대를 주관한 관청을 '다방'이라 불렀다.
다방, 하면 모두 커피를 생각한다. 커피를 마시는 곳을 '다방'이라 부른 것은 해방 이후로 보아야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끽다점으로 불렀다. 이 칼럼에서는 해방 이후에 커피를 파는 곳으로 불린 '다방'만이 아닌 커피 도입시기 부터 '커피를 판매한 공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먼저 커피의 도입에 대해서 알아보자. 커피의 등장은 1880년대 초반이다. 서양선교사들과 상인들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커피를 가지고 들어왔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법궁인 경운궁(덕수궁) 정관헌에서 고종은 서양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셨다. 이 때 마신 커피는 각설탕에 커피가루가 포함된 것이다. 고종은 이것을 물에 녹여 마셨다. 얽히고 설킨 복잡한 국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커피를 즐겼던 것이다. 커피를 즐기며 우아한 서양 음악을 즐겼다.
커피는 서양에서 들여온 탕처럼 생긴 '탕국'이라하여 '양탕국'이라 했고, 커피(coffee)를 음차하여 '가배차', '가비차'라고도 불렀다.
덕수궁 정관헌
이 시절에 고종과 순종이 커피를 마시다 변을 당했다.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정동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 있을 때, 국내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었고 각종 이권도 많이 넘어갔다. 러시아어를 익히면 출세 할 수 있는 시대였다. 이 때 함경도 출신 김홍륙은 천민 출신이나 블라디보스토크를 내왕하며 러시아어를 익혔다. 조선 유일의 러시아 통역관이었다. 그는 러시아를 믿고 전횡이 갈 수록심하였다. 그래서 고종은 그를 귀양보내고자 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김홍륙은 대담하게도 그의 부하 김종화를 통해 일을 저질렀다. 고종과 순종 부자간에 마실 카피에 아편을 탄 것이다. 커피 맛을 아는 고종은 한모금 마시고 이상하다 하여 금방 뱉어서 화를 면했으나 커피 맛을 모르는 순종은 커피를 단숨에 마셨다. 순종이 몸이 약해진 것은 이 일과 무관하지 않은데, 이후로 시름시름 앓았다고 전해진다.
2018년 복원한 대불호텔 출처: 위키백과
대불호텔 손탁호텔 스테이션호텔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처음 팔았던 곳은 어디일까? 아마도 개항직후 일본인 호리 리키타로가 인천에 설립한 우리 나라 최초의 호텔 <대불(大佛 다이부츠)호텔>이 아닐까 생각 된다. 주인의 모습이 큰 불상처럼 몸집이 크다하여 불리어진 대불호텔은 경인선이 개통되기 전 제물포에 내린 서양 사람들의 하룻밤 묵는 장소였다. 아펜젤러를 비롯한 많은 서양선교사, 상인들이 대불호텔 신세를 졌다. 이들은 이 호텔에 찻집에서 커피를 마셨다. 호텔식 커피숍의 원조이다.
많은 서양인들이 궁궐에 드나들면서, 서울에도 잠을 자고 사람을 만나 이야기 할 곳이 필요했다. 마침내 정동을 비롯한 서대문에도 호텔이 들어섰다. 정동에는 손탁호텔이, 서대문에는 스테이션 호텔이 들어섰다.
스테이션 호텔
서대문 정거장(현 이화외고, 농협)에 있던 스테이션 호텔은 경인선 개통으로 제물포에서 굳이 묵을 필요가 없던 사람들이 서대문 정거장에서 하차 후에 묵었던 호텔이다. 나중에 스테이션호텔은 애스터하우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린 사람이 대한천일은행(현 우리은행)두취 박영철과 조선의 '마타하리' 배정자이다. 이 세기(?)의 결혼식 광고가 대한매일신보 1907년 12월 24일에 실렸다.
“전 한성판윤 배국태씨의 매제 배정자와 일본 유학하여 졸업한 시종무관 박영철 씨가 새문 밖 호텔에서 혼례를 거행하였는데, 예절과 잔치하는 음식을 다 서양법으로 하고 내외국 신사 수백 인을 청하여 대접하였다더라.”
음식을 서양법으로 했다는 것은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먹던 음식이아니라 양식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커피가 제공되었을 것이며 호텔 결혼식의 원조가 아닐까 생각한다.
1885년 러시아 초대공사 베베르가 부임할 때 같이 입국한 사람이 손탁이다. 그는 베베르의 처형이다.
1886년 경복궁의 양식 조리사로 임명되었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극진하게 섬겨 이화여고 경내에 하사받은 땅에 1902년 호텔을 지었다. 널리 알려진 손탁호텔이다. 1층에 호텔식 다방을 선보였다. 이 호텔에 묵고 커피숍에서 사람을 만나며 이토우 히로부미는 을사조약을 진두지휘했다. 손탁은 러일전쟁에 러시아가 패하자 1909년 프랑스 칸으로 돌아갔다. 국망 이후인 1914년에는 소공동에 조선호텔이 건립되었다. 조선호텔과 이후에 생긴 반도호텔은 일제강점기 최고급호텔과 커피숍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주인이 운영하던 청목당도 있었다. 일층에서는 양주를 팔고 이층에서 차와 음식을 팔았다고 『서울 6백년사』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한 최초의 다방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먼저 문을 연 다방은 1927년 영화감독 이경손이 종로구 관훈동에 만든 '카카듀'였다. 이 이름은 앵무새라는 뜻이다. 지금 들어도 생소한 이름 '카카듀'를 어떻게 일 백 여년 전에 지었는 지 경이로울 뿐이다.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며 왜 이런 쓴 물을 마시며 돈을 내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기준으로 나라에 커피가 들어온 지 50년 가까이 되었지만 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커피 맛을 모르던 시절이다. 영화감독 이경손이 독립운동가 현순의 딸 엘리스 현과 개업한 카카듀는 수 개월만에 문을 닫고 이경손은 상해로 떠났다.
사실 내가 어릴적인 70년대에도 커피를 마시는 집이 드물었다. 대량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인스턴트 커피를 프림도 없이 큰 사발에 타서 돌려 먹었던 기억이 엊그제 같다. 벌컥벌컥 마시고는 왜 이런 것을 먹는지 모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영화 밀정에서 나오는 카카듀
일제 강점기에는 다방은 '끽다점'(喫茶店)이라했다. 카페는 요즘처럼 커피를 마시는 곳이 아니었다. 카페는 여종업원이 나와서 주류를 판매하는 접객업소였다. 끽(喫)은 애용한다는 의미, 차를 애용하는 점포이니 다방이다. 술을 파는 곳이 카페였다. 지금의 카페에서는 차와 커피를 파는 곳이지만 일제강점기에 '카페'는 여급을 두고 술을 파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