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리 - '나는' 보리 - 나는 '보리'
'나는 보리' 영화 포스터
1. ‘나’
<나는 보리>에서 ‘나’에 방점이 찍혔다. 이는 보리가 마주하게 되는 존재론적 고민이다. 보리는 질문한다.
“나는 누굴까?”
천진난만하게 뛰어놀아야 할 열한 살의 보리가 왜 이런 고민을 하게 되었나. 보리는 두 가지 정체성 사이에 ‘낀’ 인물이기 때문이다. 보리는 농인 부모를 둔 자녀(CODA)이지만, 가족 중 유일한 청인이다. 보리의 고충이 표현된 장면은 보리네 가족의 식사 장면이다. 감독은 식사 장면을 연출할 때 배경음악 없이 오로지 수어만 자막으로 나타낸다. 이는 보리에게는 가족 간의 밀도 높은 대화는 ‘정적’으로 들림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물론 보리도 수어를 사용하지만 수어가 모국어는 아니다. 보리는 가족들이 재밌는 이야기에 박장대소를 터트릴 때도 뚱한 표정을 짓거나, 딴청을 피운다. 보리에게 집은 너무도 조용한 공간이다.
소리를 잃고 싶어하는 보리.(출처 : 네이버)
반면, 집 바깥은 너무도 시끄럽다. 친구들이 떠드는 소리, 시장의 시끌벅적한 소리, 단오제의 수많은 인파가 만들어 내는 소리가 그렇다. 유일하게 보리만 들을 수 있는 ‘가족들을 향한 무례한 말들’도 피할 수 없는 소음이다. 보리에게 집 바깥의 소리는 영화 속 인공와우를 설명하는 대사처럼 “자동차 클랙션 소리나 경보음은 정확하게 인지 가능하지만 구체적인 말소리는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보리는 매일 밤 집 안의 고요 속에서 바깥의 소음을 떠올리며 묻는다. ‘나는 누굴까?’ 하지만 질문할수록 길을 잃는다. 마치 ‘단오제’에서 가족을 잃어버리고 홀로 남겨진 보리의 모습처럼. 마침내 보리는 정적에 익숙해지기로 한다. 보리는 홀로 남겨진 단오제의 한복판에서 소원을 빈다.
“소리를 잃게 해주세요.”
"소리를 잃게 해주세요." 소원을 비는 보리의 모습.(출처 : 네이버)
신이 보리의 소원을 들어준 것일까? 보리는 정말 소리를 잃는다. 보리는 이제 가족들에게 “내가 소리를 듣지 않으니까 좋아?”라고 묻는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연기다. 가족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들리지 않는 척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리는 오히려 더 깊은 정적과 더 선명한 소음에 직면한다. 옷 가게 주인은 이젠 보리까지 들리지 않는다는 소식에 “저 여자 또 왔네”라며 대놓고 험담하고, 어머니는 그런 보리가 안타까워 눈물을 흘린다.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 끝에 농인의 정체성을 택했지만, 보리는 더 깊은 소외와 외로움을 경험할 뿐이다.
2. ‘날다’
그때 보리의 친구 ‘은정’이 보리를 찾아온다. 은정은 보리에게 “너 진짜 소리 안 들리는 거야?”라고 묻는다. 보리가 그렇다고 하자, 은정은 보리의 손을 잡아 준다. 그리고 보리에게 “나는 집에 있으면 엄마랑 아빠랑 말 한마디도 안 해. 난 너 학교 끝나면 아빠랑 낚시하잖아? 그것도 되게 부럽다.”라며 보리를 위로한다. 그제야 보리는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다고” 하며 사실을 털어놓는다. 은정은 보리에게 언제까지 안 들리는 척을 할 순 없다며,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라고 한다. 은정은 보리가 다시 날아오를 수 있도록 돕는 날개이다.
보리의 친구 은정. 은정은 보리의 날개이다.(출처 : 네이버)
보리의 다른 쪽 날개는 은정의 아버지이자, 보리네의 단골 짜장면 가게의 주인이다. 보리는 단오제에서 길을 잃고 찾아간 경찰서에서 짜장 세트에 ‘탕수육’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말을 듣고 놀란다. 경찰 언니에게 우리 동네 짜장면집에서는 만원이면 ‘짜장과 탕수육’까지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는 보리네 가정을 더 잘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이 담긴 은정 아버지의 배려였다. 또한 그는 보리의 동생 ‘정우’가 농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축구 대회에서 활약 하도록 돕는다.
단오제에서 가족을 잃어버리고 서럽게 우는 보리를 걱정하는 경찰관.(출처 : 네이버)
보리네 동네 사람들은 모두 이런 따뜻함으로 보리를 대한다. 보리에게 공감해 주고, 진심으로 걱정해 준다. 이들은 모두 보리가 날 수 있도록 돕는 날개이다. 보리는 자신의 날개가 되어준 따뜻한 이웃들을 통해 존재론적 질문에 답을 찾아간다.
3. ‘본다’
보리는 주위의 따뜻한 사람들을 통해 자신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허무는 ‘다리’임을 인식한다. 보리는 집에서 짜장면 배달 주문을 도맡아서 하고, 수어를 모르는 동네 사람들의 말을 가족에게 설명한다. 이는 보리가 ‘수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언어를 알고,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한 의사소통이 가능함을 넘어서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보리의 동생 '정우'.(출처 : 네이버)
보리의 동생 정우는 보리에게 “친구/ 모두 다/ 수어/ 할 수 있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이것은 친구들과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세계를 이해하는 친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보리가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는 왜 수어 못해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왜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더 이해해 주지 못했냐는 의미로도 해석되기 때문이다.
김진유 감독
존재론적 고민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간다. 보리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김진유 감독은 데일리아트와의 인터뷰에서 “영화 <높이뛰기>와 <나는 보리>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저는 청각장애인 부모를 둔 듣고 말할 수 있는 자녀인 코다(CODA : Children Of Deaf Adult)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 감독은 덧붙인다. “코다 이야기를 통해 장애에 대한 인식이나 편견을 조금이나마 없애고 싶었던 마음이 큽니다. <나는 보리>의 아빠 대사 중에 ‘들리든 안 들리든 똑같다’라는 대사가 있습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라고.
두 세계에서 든든한 다리가 되어주는 ‘보리’는 바로 김진유 감독이었다. 보리는 멋지게 자라 김진유 감독처럼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하나로 이어주는 다리가 될 것이다.
단오제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보리네 가족.(출처 : 네이버)
<나는 보리>를 다 보고 나면 보리네 가족을 너무도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의 모습이 현실과 달라 ‘판타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나는 보리>가 김진유 감독이 꿈꾸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묻고 있다. 장애인을 향한 편견이 사라지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워지지 않겠냐고.
[독립영화 리뷰] 김진유 감독의 "나는 보리" < 영화 < 문화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