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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24. 2024

조세희의 '난쏘공'의 배경,낙원구 행복동은 어디일까?

[서소문 밖 첫 동네]

조세희의 '난쏘공'의 배경,낙원구 행복동은 어디일까?
1978년에 발행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의 초판본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터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2022년 25일 성탄절에 하늘나라로 간 조세희 선생의 대표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한 대목이다. 난 이 대목이 가장 슬프다. 생활이 전쟁터와 같았고, 그 전쟁터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던 난장이 가족의 이야기. 아무리 전쟁터라고 해도, 지는 날이 있으면 가끔은 이기기도 해야 할텐데.. 난장이 가족은 날마다 지기만 했다는... 누구에게 진 것일까? 세월은 흘러 이 소설이 출간 된지 어느덧 반 세기가 눈 앞이다. 격동의 70년대를 지나 새 천년을 훌쩍 넘은 21세기에도 난쏘공이 늘 회자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소설로 200쇄를 최단 시간 내에 돌파하고, 300쇄가 넘는 초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난장이의 가족들은 지기만 하는 싸움을 아직도 계속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대의 억울한 자들이 '난장이'를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대의 패배자들은 그들의 대표선수 ‘난장이’가 세상과의 대결 속에서 이겨주기를 바라면서 분루(憤淚)를 훔치며 응원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아직도 70년대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계속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난장이 가족들이 날마다 졌다는 소설속의 공간은 ‘낙원구 행복동’이다. 그들의 삶이 지옥일망정, 작가는 난장이가 사는 삶의 공간을 그렇게 명명했다. 조세희는 지옥과 같은 전쟁터가 낙원으로 바뀌어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래서 1편의 제목이 뫼비우스....가 아닌지 모르겠다. 내면과 바깥의 삶이 고정되어 아무리 돌고 돌아도 겉과 바깥이 고정되는 삶이 아닌, 뫼비우스의 띠 같이 내부와 외부가 본질적으로 순환되는 삶.그래서 패자도 승자도 없이 서로 보듬어주는 삶을 바랜 것은 아닌지..


그러면 난장이 가족들이 사는 ‘낙원구 행복동’이라는 동네는 서울의 어디쯤일까?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이 어디냐는 것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서소문 밖, 이곳 중림동을 소개 할 때 사족처럼 따라다니는 문구가 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배경이라고 한다.

'닌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공' tv문학관의 한 장면.

그러나 조세희는 중림동, 서소문 밖을 소설의 배경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다. 그러면 실제배경은 어디일까? 김연수의 논문-’문학공간 현저동이 지니는 상징적인 의미들‘을 인용하면 현저동 옥바라지 골목이 난쏘공의 배경이라고 작가는 특정했다. 현저동 46번지이다.


’12편의 연작 중 4번째 중편소설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문학공간인 서울시 낙원구 행복동의 모습은 중랑천이 흐르고 있는 면목동과 현저동이다."(조세희 작가)


당시 초라한 작은 무허가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무악동, 지금의 '서소문 형무소 역사관' 일대를 모자이크해 놓은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김훈,박래부,문학기행1, 한국문화원,1997,p25.) 뿐만 아니라 작가는 무악동 일대(당시 현저동)를 취재 다니면서 난장이 가족이 밥을 먹는 장면 같은 것을 실제로 보았다고 술회했다. 이곳의 무허가 주택 철거 장면도 도처에서 목격했다고 집필과정을 이야기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주된 문학공간은 현재 무악동임을 알 수 있다.<문학공간 현저동이 지니는 상징적의미, 김연수, 57페이지>


현저동은 <엄마의 막뚝>과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의 배경이기도 하다. 난쏘공은 개발 논리에 삶의 터전을 잃은 난장이 가족이 자신들이 살았던 곳에서 뒷전으로 밀려난다는 서사가 중심 을 이룬다. 이곳이 소설의 배경이라면 작품이 쓰여진  1978년 이전에 철거민들과 건설사간의 분쟁이 있었던 아파트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중림동에는 그런 아파트가 없다. 중림동에서 가장 규모가 큰 아파트인 ‘삼성사이버빌리지’는 2001년에 입주했다. 1990년대 말에 지어진 아파트이다. 1972년에 세워진 성요셉 아파트의 개발자는 중림동 약현 성당이다. 이 일대의 토지는 성당 소유이다. 성당 인근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요셉 아파트 측은  무단으로 점유한 지역 사람들에게 아파트를 싼 가격에 분양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파트를 지을 때, 원주민과 개발사간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면 같은 시기에 지어진 서소문 아파트는 어떨까? 전술한 바와 같이 이 아파트는 하천 위에 지어졌기 때문에, 건설사와 지역주민간의 마찰은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었다.


조세희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에게 칠십년대는 파괴와 거짓 희망, 모멸, 폭압의 시대였다'고 말한다. 그가 한 사람의 작가이기 이전에 시민으로서, 제일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악'이 드러내놓고 '선'을 가장하는 것이었다. 악이 자선이 되고, 희망이 되고, 진실이 되고, 또 정의가 되는 것이었다. "어느 날 경제적 핍박자들이 모여 사는 재개발 지역동네에 가 집이 헐리면 당장 거리에 나앉아야 되는 세입자 가족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있는데 철거반들이 철퇴로 대문과 시멘트담을 쳐부수고 들어왔습니다. 철거반들과 싸우고 돌아와 작은 노트 한 권을 사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쓰기 시작한 것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다.

조세희 선생님은 2022년 성탄절에 돌아가셨다.

조세희 선생님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면 재개발이 확정된 지인의 집에서 식사를하고 있는데, 철거반원들이 들이닥쳤고, 그 아수라장을 경험한 후 작은 노트 한권을 사서 작품을 써 나갔다는 것이다.


철거반이 들이칠 사건이 중림동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면 왜 중림동을 난쏘공의 배경이라고 한 것일까? 추정컨대 조세희선생은 <월간 학원>과 <학생중앙>에서 취재 기자를 했다. 서소문 옛 중앙일보 건물이 그의 직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직장과 가까운 달 동네, 중림동을 소설의 배경으로 누군가가 지목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현저동이건 중림동이건 어디인들 어떻겠는가? 조세희선생님이 그렇게 이 땅에 실현되기를바라던 '낙원구 행복동'과 같은 하늘 나라로 떠난 마당에... 우리가 사는곳을 낙원구 행복동 지상 낙원으로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꿈 같은 이야기이다.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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