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한 사람의 시간이 저물 때

저물어가는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 삶의 결

by 사색하는 덕주부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지만, 노년의 삶은 그 두려움보다 더 오래, 더 가까이 우리 곁에 머무릅니다. 힘이 빠지고, 익숙했던 일들이 조금씩 낯설어지는 시간. 노년은 그렇게 조용하고 느리게, 그러나 분명한 형태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마지막의 빛을 바라보는 한 인간의 시선을 보여주었다면,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은 그 마지막에 닿기 전, 삶이 천천히 저물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글은 그 느린 저물음 속에서 우리가 잊고 지냈던 ‘늙어간다는 일의 온도’를 함께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긴 여정 끝에서 마주한 노인의 시간


스웨덴의 작은 마을에 사는 노인 보에게 삶은 이제 혼자 버티기 어려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치매로 요양원에 머물고 있고, 보가 그리움에 잠길 때면 항아리에 고이 간직해 둔 아내의 스카프에서 그녀의 냄새를 찾아 위로를 받습니다.


그의 곁을 지켜준 반려견 식스텐 역시 이제 떠나야 할 처지입니다. 아들 한스는 노인이 된 아버지가 더는 반려견을 돌보기 어렵다고 판단해 식스텐을 다른 집으로 보내려 합니다. 자신이 더 이상 삶의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보는 깊은 분노와 무력감을 느낍니다. 이런 마음을 가장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오래된 친구 투레와의 전화뿐입니다. 관계가 하나씩 사라져 가는 삶 속에서 투레는 보에게 마지막 남은 ‘연결’이 됩니다.


저물어가는 하루, 함께 걷는 발걸음




나이를 먹는다는 의미 – 돌아가는 시간


아이의 눈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는 뜻이었지만, 실제로 나이를 먹고 나서야 우리는 알고 맙니다. 할 수 없는 것들이 다시 늘어가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을. 누구나 언젠가는 간단한 일에도 도움이 필요한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노년은 어쩌면, 어릴 때 할 수 없었던 일을 다시 할 수 없게 되는 ‘원으로 그려지는 시간’에 가깝습니다. 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완만하게 되돌아가는 곡선이라는 사실을 보의 삶은 조용히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다시 배우는 관계의 온기


우리는 오랫동안 스스로 모든 것을 해내는 존재라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삶의 초입과 끝에서는 누군가의 손길 없이는 하루를 버티기 어려운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보 역시 그렇습니다. 아내를 요양원에 보내며 관계의 형태가 바뀌었고, 식스텐을 잃으며 남겨진 빈자리를 확인했고, 투레와의 통화에서만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이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외롭다고 느끼는 삶 속에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온기들이 우리를 붙잡아왔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남을 배려하고 도우며 살려고 합니다. 언젠가 그 손길이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만은 아닙니다. 관계의 온기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물어가는 시간은 단순히 ‘역행’만은 아니다


저물어 가는 시간의 풍경

나이가 들어갈수록 다시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해지는 모습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보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시간은 뒤로만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남는 것과 사라지는 것, 지켜야 할 것과 놓아야 할 것이 선명하게 갈립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오히려 자신에게 더 가까워지기도 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통해, 생의 곡선을 정반대 방향에서 그려본 한 인물의 시간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보의 시간이 자연스럽게 저물어가는 과정이었다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면서 또 다른 방식의 질문을 던집니다. 두 인물의 시간이 어떻게 다른 울림을 남기는지, 그다음 글에서 이어가겠습니다.




by 사색하는 덕주부

책을 읽고, 삶을 사유하며,

언젠가 아들에게 전할 기록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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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는 AI 생성 도구를 통해 직접 제작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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