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이 필요한 나이 마흔 여섯

by MAMA

때는 바야흐로 내 나이 스물 여섯, West Seattle 셋방 살이 할 때였다.룸메이트 언니는 나보다 두 세 살 많았던 것 같다. 언니는 초등학교 영어 선생님이었다. 커뮤니티컬리지에서 ESL 을 들으면서 미국 생활을 누구보다도 만끽하고 있었다. 면허를 따서 중고차를 샀고, NordStrom에서 명품구두를 사서 신었으며, 근처 테리야키 식당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손에는 늘 길거리 플리마켓에서 산 원서 책을 들고 다녔고, 손에 두른 티파니 팔찌를 선물해 주고 디즈니월드를 데려가 준 두번째 백인 남자친구가 있었다. 미국에서 단, 1년뿐이지만 언니는 미국인 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다. 부러웠냐고 물어 본다면 무척이나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에 비해 나는 치열했다. 유학생이었지만, 토플과 GRE점수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심적으로 늘 부담이 있어서 그랬는지 무얼해도 즐겨지지가 않았다. 이런 일상의 푸념을 한국에 계신 엄마와의 짧은 전화통화로나마 매일 털어 놓았다. 매일 공부하느라 일하느라 바쁘다보니 룸메이트 언니 같은 사람이 즐비한 커뮤니티컬리지 한국인들의 커뮤니티에는 도통 들어 갈 수 없었다. 뭐 딱히 그들 중 누군가의 풍요로운 술자리 또는 브런치 수다에 동석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하튼 당시, 카카오톡이라는 신통방통한 녀석이 있었다면 엄마와의 전화통화가 그렇게 감질 맛 나지도 간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선불국제전화를 사서 하루에 몇 분 마음을 졸이며 아끼고 아껴서 통화를 했다. 가끔 싸이월드에 올리는 사진은 엄마가 볼 수 없으니 전화로 소식을 전할 수 밖에 없었다. 엄마와의 통화가 유일한 안식처였다.


어느 날, 룸메이트 언니는 울고 있었다.


"언니! 왜 울어? 무슨 일 있어?"

"아니, 나는 왜 너처럼 엄마와 대화할 수 없을까?"

"..........."


그러고보니 언니랑 살게 된 1년정도의 시간동안 언니는 한국에 계신 누구와도 통화하지 않았다. 나보다 사회생활을 먼저 시작해서 그런지 부모님께 어리광을 피운다거나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눌 필요가 없는 어른인가 싶어 그 점을 이상히 여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언니의 말을 듣고보니 라는 물음은 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남편을 만나 연애를 할 때 수도 없이 남편한테 듣게 된 말은 '마마 걸'이라는 말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엄마한테 불쑥불숙 걸려 오는 전화를 남편은 꽤 불편해 했고, 마흔이 훌쩍 넘은 지금도 장모님의 아내를 향한 그런 애정을 곱게 보지 않는다.


엄마는 삼남매 중 나한테 가장 많이 의지했다. 심지어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날 때도 사채업자의 돈을 빌려 쓸 때도 전당포를 가서 금덩어리를 팔 때도 어린 내가 동행했다. 엄마가 부모로서 힘든 순간마다 삼남매 중 내가 엄마 옆에 있었다. 엄마는 '언니는 심장이 약해서 안된다'고 하고 동생은 '어려서 안된다'고 하시며 내가 제일 든든해서 그렇다 하셨는데 그 때는 내가 엄마를 지켜주는 보디가드쯤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자식을 키우게 되니 엄마가 중학교 밖에 되지 않았던 내게 많은 짐을 지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걱정이 내 걱정이 되었고, 늘 힘이 들고 버거웠다.


20대 때는 그 짐을 대신 내가 해결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나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내 삶의 울타리에서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지다 보니 엄마한테 소홀해졌다. 아니, 소홀해지고 싶었다. 어느 날은 하루에 여섯통의 전화가 왔다. 아침 반찬이 뭐였냐 교회는 다녀왔냐 아이들은 잘 지내냐 저녁은 뭐 먹었냐 .... 마지막 전화에 급기야 화를 내고야 말았다.



얼마 전, 직장동료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 동료는 사정상 여동생과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어머니는 이제 정년퇴직을 앞두고 계신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그 동료가 채우고 있다. 병원을 갈 때도, 휴가를 갈 때도, 언제나 동행 또 동행을 한다. 그 동료는 어릴 적부터 그렇게 엄마의 반려자가 되었다. 어떨 때 보면 저 젊은 삶이 엄마에 대한 걱정으로 펴질 못했구나 딱하기도 하다. 어릴 적 내 마음, 이심전심으로 그 마음을 이해한다. 그 동료가 비혼을 선택한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동료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언젠가부터 바라고 응원하고 있다. 그게 둥지를 날아갈 수 있는 가장 행복한 방법이지 않을까 그 둥지에 새 가족이 생기면 또 다른 치유로 위안받지 않을까



남편의 바쁨으로 인해 독박육아가 이제는 독박지모(遲莫:점차 나이를 먹어 늙어감)로 바뀌었다. 코 흘리개들은 제법 숙녀들이 다 됐고, 어른 뺨치는 완숙한 생각을 하곤한다. 엄마한테 숨기는 비밀도 많아지고, 다이어트를 한다면서도 친구들과 단 거를 줄줄 빠는 여드름이 난 소녀들은 제 나이에 맞게 '언제 사람될래'라는 말을 들으면서 잘 자라고 있다. 가끔 아이들이 친구 같이 여겨 질 때가 있다. 그 때의 라떼는 집요한 푸념으로 전환 되면서 '아차' 싶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눈망울만 껌뻑거리는 시골소녀 막둥이 녀석을 보고 있으면 '내가 왜 이러나' 후회가 막급이다. 막둥이의 눈에 시름이 차 오를 때 즈음, 큰 녀석의 어깨는 이미 쪼그라들고 있다. 그래서...



나는 독립을 이미 선언했고, 독립을 하는 중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그 성과는 미약하지만

코흘리개 아이가 찾는 엄마로서 엄마이고 싶지 않으니까

아이들이 제 짐을 지고 가는 어른이 되야 하니까


마흔 여섯, 서툴지만 마음을 다시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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