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

by MAMA

“대리님아! 여기 어때? 많이 먹을 거야? 많이 먹을 거면 샤부샤부 무한리필 가자.”

“저는 아무거나 괜찮아요.”

“배 많이 고프면 여기로 가고 아니면 우리 원래 가기로 했던 일식 돈가스 먹으러 가자.”

“저녁에 많이 먹으면 속이 안 좋아서요.”

“그래. 그럼, 돈가스 집으로 가자. 저 안쪽 주차장으로 더 들어가야 해.”


입사동기 박대리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우리끼리 조촐한 연말 회식을 가졌다. 그간의 일을 얘기하자면 박대리는 아주 지독한 감기를 앓았고, 몸이 만신창이였던 동안 업무량은 폭증했으며, 다른 직원들의 업무 처리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고양이 엄마 박차장과 동갑내기 사장님의 눈초리를 받아 직원들 사이 잡음이 꽤나 커졌었다. 박대리에 대한 불만 소리가 높아졌고, 박대리에 대한 권고사직까지 들먹이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갑자기 불거진 일은 아니었다. 누차 박대리는 업무량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었고, 사장님은 박대리의 태도에 대한 불만족을 간접적으로 표현했었던 것으로 안다. 3층에 있는 독거노인으로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알 턱이 없는 나로서는 오로지 박대리한테 듣는 얘기로만 판단을 해야 했다. 마냥 편을 들어줄 수는 없었지만 조언을 해도 그건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밭의 평수와 깊이에 달려있었다.


점심시간에 논두렁 밭두렁을 걸으며 그날 그날 있었던 해프닝들에 대해 어떤 날은 격분하기도 했고, 어떤 날은 듣기 싫어 듣는 둥 마는 둥 하기도 했다. 우리라고 늘 좋을 수만은 없었다. 특히, 요 몇 주는 몸도 마음도 고달팠던 터라 박대리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온통 새카만 색이었다. 공분을 같이 해주는 것도 한계에 부딪쳤었다. 여하튼 그렇게 사직서를 내니 마니하는 지경까지 이르다 보니 박대리와 친하다는 내게 사장님은 박대리의 사정이 어떠냐부터 박대리에 대한 이런저런 고민까지 말씀하셨고, 우격다짐으로 직원들과 사장님이 박대리란 고개를 넘었다.


사회는 냉정한 곳이었지만 그 냉정한 곳에 에반게리온을 좋아하는 오타쿠 박대리가 의지할 만한 얇은 나뭇가지라고는 나뿐이었으니 나까지 그녀를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박대리도 사직서란 고개를 힘겹게 넘었다.


“주임님! 여기 괜찮은데요?”

“응! 여기 새로 생긴 돈가스 집인데 딸들이랑 와보고 싶었어. 후기를 봤는데 괜찮더라고. 많이 먹어.”

“네!”


오랜만에 우리 관계에도 녹색등이 켜졌다. 어떻게든 1년을 버텨 나름대로 우리끼리 지난가을에 입사 1년 기념 파티를 가졌었다. 물론, 밥을 먹는 동안에도 차를 마시는 동안에도 회사, 상사, 사장 가리지 않고 보는 흉이 즐비했지만 그렇게라도 손바닥 마주치며 회사 일을 털어내 버릴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1년을 버텨낼 수 있었고 그것에 감사했다. 우리는 많이 웃었고, 연말을 기약했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이번에 우리는 회사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름다운 만남의 시간을 누군가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 박대리도 나도 의도적으로 그런 대화를 피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우리의 대화는 조금 더 솔직했고, 진솔했다.


“나는 요즘 독립 중이야.”

“네? 주임님? 무슨 독림....”

“아이들이 커가면서 엄마로서 독립할 때가 되었다 생각이 들어서..... 그런데 쉽지 않아.”

“저희 엄마는 주임님에 비하면 전혀 독립하지 못하셨는데요.”

“그래. 그게 어려워. 내 키를 훌쩍 넘어서부터는 진작부터 날아갈 준비를 시작한 아이들한테 여전히 이래라저래라 하는데 그 말투와 억양을 고치기가 쉽지 않아.”


엄마의 짐을 고스란히 지고 살고 있는 맏딸이자 가장인 박대리는 나의 말에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열 살 어린 동생과 엄마까지 돌보면서 살고 있는 사정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독립이라면 누구보다도 더 간절했을 그녀이기에.....


“주임님! 여기 돈가스도 우동도 진짜 맛있어요. 고기가 정말 부드러워요. 엄마 모시고 와야겠어요.”


효녀 박대리의 입맛에 맞았던 모양이다. 다행이었다. 나는 두 딸에 대해 남편에 대해 사는 얘기를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았다. 하하 호호 깔깔대며 우리의 대화는 젓가락을 놓고도 계속되었다. 자리를 옮겼다. 둘 다 커피숍에 가서 대추생강차를 시켜놓고는 선물을 멋적게 꺼냈다.


우리 회식의 하이라이트는 선물교환이었다. 그래도 4대 보험 들어간 직장인인 만큼 선물교환 금액은 2만 원으로 측정했었다. 난 누빔잠옷을 준비했다. 늘 cool 톤 색의 옷만 입어 안 그래도 하얀 피부가 더 하얗다 못해 창백해 보이기까지 한 박대리에게 warm 톤 색의 잠옷을 선물해 주었다. 박대리는 내가 좋아하는 차를 선물해 주었다.


그렇게 우리끼리 연말회식은 끝이 났다. 어떻게 1년이 지나갔는지 모른다. 여리 여리한 벼가 심겨 새초록 했다가 짙은 녹색에서 알알이 쌀이 들어차고 누렇게 고개를 숙여 베이기까지 우리는 함께 했다. 항상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 사이에도 돌이 낀 듯 껄끄러웠던 적도 있고, 일에 지쳐 무미 건조했던 적도 있고, 각자 말 못 할 사정으로 한 마디 대화도 없이 걷기만 했던 적도 있었다. 메말라 버린 감정에도 서로를 배려하려고 한 마디 더 해보았고, 따뜻하게 위로나 격려도 해보았다. 집에서 있었던 안 좋았던 일들로 인해 울먹이고 싶을 땐 어깨도 두드려주었고, 회사에 사직서를 냅다 던지고 싶었을 땐 탈출 대신 버팀으로 서로를 묶어 보기도 했다. 쉬는 시간에 햇볕을 쐰다는 핑계로 십 분씩 나와 실컷 사장 욕을 하고 들어가기도 했고, 분리수거를 핑계로 산책을 하고 들어가기도 했다.


앞으로 우리가 회사를 다니며 입사동기로 얼마나 함께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누군가와 하루의 삼분의 일을 함께하며 울고 웃음이 고마울 따름이다. 열 두살 어린 아이와 입사동기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게 쉽지 만은 않았지만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적당한 거리에서 우린 서로 응원한다. 별 거 없는 이력에 또 한 줄의 별 거 없는 이력일지라도 그 시간을 함께한 누군가가 있다면 별 거 없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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