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회사 안에 둥지를 틀었다.
고양이 엄마 박과장님의 소행은 아니다. 박과장님은 늘 말했다.
"사장님이 고양이가 회사 안으로 들어오는 거 엄청 싫어해요." 라고.
그런데 누군가 회사 정문 안쪽에 고양이 집을 마련해주었다.
그 누군가는 실장님. 대표이사실의 옆에 자리잡은 큰 사무실 안주인님. 면접 때 별 이력이 없는 나에 대해 좋게 생각지 않았던 대표이사님의 아내분. 곧, 월급 주시는 분이라고 대략 정의가 내려진다. 그럼 동갑내기 사장님은 누구냐 의문이 생긴다. 깐깐한 사장님은 대표 이사님의 사촌동생이다.
그 고양이 집의 배후가 밝혀지면서 난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었다. 고양이를 피해 이리 저리 소리치며 요란스럽게 도망쳐도 더이상 날 도와줄 이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포기로 인한 절망감. 물론, 고양이 앞에 쥐처럼 고양이 집 앞을 지날 때, 여전히 심박수가 올라가고 긴장감이 높아지기는 하지만 어디 그 긴장감이 월급 주시는 분에 비할 긴장감일까. 참는다. 또 참는다. 이렇게까지 내 자신이 비겁한 본질을 가졌다는 것에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얼마 전 유퀴즈에 가장 좋아하는 배우인 이민호가 출연을 했는데 유재석과 나눈 대화 중 '주제파악'이 그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라고 했다. 실로 지금 내 삶에 딱 맞는 주제다.
이제 회사 정문의 고양이를 대신 막아서주는 사람은 유일하게 입사동기 박대리님뿐이다.
자그마치 열살이나 어린 친구와 입사 동기가 되었다. 작은 개인 사업체이지만 열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고 20년 가까이 유지되고 있는 나름 자리잡았다고 말할 수 있는 회사에 입사란 것을 하게 되어 정신없이 고군분투하다보니 벌써 세번째 월급을 받았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차분하기도하고 세상 착해보이는 30대 초반의 입사 동기 박대리님은 나와는 다른 부서다. 나야 단순 노무와 사무를 적절히 섞어 놓아 굳이 말하자면 관리직이라고도 할 수 있고 재재부라고도 할 수 있지만 박대리님은 구매 및 발주 , 행정등의 서류업무를 맡고 있어 하루 종일 컴퓨터 모니터만 응시하고 있다. 점심 시간 전에는 업무상 카톡을 주고 받거나 사내 메일을 주고 받는 일 외에는 대화 할 상황이 아니다. 그래도 점심 때가 되면 3층에 있는 내게 전화를 걸어 '주임님! 점심 드시러 가세요.' 하며 챙겨준다. 나는 시간을 염두해두지 않고 일에 몰두하는 편이라 점심 시간이 다 된 것을 모르고 일을 하는 바람에 여러 번 대리님의 전화를 받았다. 한 번은 그게 미안해서
"대리님! 전화하게 해서 죄송해요. 제가 시계를 못봐서.."
"저희가 주임님을 깜빡하고 점심 먹으러 식당 가서 주임님 안 계신걸 알면 안되잖아요."
식당은 회사에서 약 1.5km 떨어진 한식뷔페이다. 걸어가면 15분 정도이지만 걸을만한 길이 아니기에 회사 차를 타고 간다. 만약에 3층에 있는 나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식당에 가서야 나를 잊었음을 안다면 서로 참 웃픈 상황일테니 말이다. 그러니 그 전화 한통이 참 고맙기만하다.
박대리님은 참 요즘 사람같지 않은 청년이다. 나와 같은 초식동물과.
커피도 안 마신다. 회사 사람들이 한 데 어울려 밥을 먹고는 그 중 누군가가 한식뷔페 옆에 편의점에 가서 음료수라도 사준다고 하면 꼭 요쿠르트음료나 모과생강차 또는 핫초코를 고른다. 딱 나와 같다.
어쩜 그리도 싹싹한지 사무실 잡다한 업무도 군말 없이 하고 있다. 쓰레기 버리는 일이며 귀찮은 분리수거까지 도맡아 한다. 회사가 쓰레기차가 지나다니는 길의 안쪽에 자리잡고 있어서 종량제쓰레기봉투나 재활용쓰레기를 버리려면 70m는 쓰레기 봉투를 들고 길의 입구까지 걸어야 한다. 젊은 친구가 투덜거릴 수도 있는 일인데 잘 해내고 있다. 쉬는 시간에는 앉아서 차를 마시며 책을 본다. 심심한 취향인 것 같아도 오며 가며 점심 시간에 나눈 대화를 통해서 이 청년은 절대 심심하지 않다는 확신이 들었다.
"카페 주인장이었다고? 그것도 엑소?"
"네"
"가입 회원 수는?"
"몇 천명 되어서 꽤 오래 활동 했어요."
"뭐라고?"
"그거 엄청 바쁘고 관리할 일도 많고 ... 이 사람! 보통 사람이 아니었구만."
단번에 알아봤다. 목소리 톤이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같이 잔잔한 사람들이 원래 무서운 법이라고 우리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목소리 큰 사람들이 다 허당이라고. 꼭 우리 회사 동갑내기 사장님과 이 친구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무서운 사람들'
박대리님과 점심 시간 후 잠깐의 티타임을 가질 때 나눈 대화는 젊은 시절의 내 이야기와 그녀의 이야기, 이사가야 하는데 책 짐이 정말 많다거나 나의 큰 딸의 비싼 체육복바지에 관한 한탄 또는 그녀의 아홉살 어린 동생에 관한 이야기등으로 들어보면 쓰잘데없는 소소한 수다들이지만 우리는 이 잠깐의 십오분 정도의 대화 덕에 꽤 친해졌다.
오늘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쓰레기를 정리해서 길 입구까지 들고가면서 대리님이 내게 물었다.
"석달이 되었네요. 주임님은 어떠세요?"
'어떻긴 뭐가 어때요. 대리님. 이 아줌마가 하기에는 딱 좋은 일이지만 최저시급은 일에 비해 너무 짜고 그대라는 꿈 많은 청년이 하기에는 지루할 만도 한 일이겠죠. 그래도 우리가 현실에 이제는 제법 타협할만한 연륜이란게 생기는 편이 더 현명하니 더이상 가타부타 말하지 말고 뭐가 뭔지 모르는 물건을 파는 이 회사에서 이렇게 만족하면서 일하다보면 큰 돈은 아니더라도 목숨부지는 하겠죠'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 나의 옛 사람이었고 지금의 나는
"이제 조금 적응이 되서 일할만해요. 뭘 팔아도 사람 죽이는 물건만 아니면 되죠. 뭐. 대리님은 어때요?"
"저는 .... 바쁘기는 한데 하루 종일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싶으면 하루가 가고 뭘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면서 모르는 것 같아요."
대략 대답이 서로 중심을 꿰뚫지 못하고 중구난방 동문서답이었으나 우린 서로의 진짜 마음을 아는 것 같기에 서로를 보면서 웃었다.
"그래도 대리님! 나는 그대가 있어서 참 의지가 되고 좋다우. 혼자 있었으면 어쨌겠나 싶어요. 일하는 곳도 뚝 떨어져서 외기러기 같은데 의지할 입사동기가 있어서 정말 힘이 돼요."
"저도 그래요 주임님! 저도 주임님이 계셔서 좋아요."
우린 언제까지 이 회사에서 서로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