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 보따리를 챙겨 가자

Chapter No.12

by JiwoongSS
여정 속 발걸음에 힘을 실어줄 것이니, 계속해서 사색을 거듭하기로 했다. 그 이정표에 도달할 때까지.

첫 여정의 마지막 날이 됐다. 살면서 이렇게 찬란한 영감들을 순간마다 누렸음에 감사했다. 내 기대를 넘어 두 팔 벌려 맞이해 주며 사색의 터전으로 이끌어준 세상, 영감이 깃든 공간에 자리한 시간들, 그 과정 중 본보기가 되었던 사람들까지. 덕분에 사색의 가치를 제대로 경험했고, 영감 보따리를 한가득 손에 쥐게 됐다. 신기하게도 이 보따리는 무겁다고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기억 속에 머무는 여행이 아닌, 유영하듯 동행하는 여정이 되었으니. 다른 건 몰라도 이 보따리는 잘 챙겨야겠다 싶었다.

< 풍경이 다한 자리 >

그러니 이날 또한 잘 보내보려 특별한 장소를 찾아봤다. 여기서 대부분 바다에서 시간을 보냈으니, 높은 곳에 가봐야지. 기왕이면 끝자락에 바다가 보이는 경치를 보면 좋겠는데, 딱 걸맞은 장소가 있다니. 바로 운전대를 잡아 그곳을 향해 나아갔고, 내내 한 번도 경사진 곳으로 간 적이 없는데 쭉 올라가니 기대감 함께 올라갔다.


그렇게 도착해 주차를 마치고 나왔는데, 눈앞에 마당 딸린 하얀 집과 제주의 넓은 경치가 쭉 펼쳐져 있었다. 살아온 주민은 아니니 실상은 모르나 평온을 온 땅에 끼얹은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건 곧 내게 있어 사색으로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곳들이 많다는 걸 의미했다. 일일이 그때를 기약하지 않았더라도, 또다시 찾아갈 이유는 되겠구나 싶었다.


근처를 돌아다니며 몇 장의 사진을 남긴 후, 출출한 뱃속을 달래야 하니 그곳으로 향해 갔다. 그런데 맙소사. 예약제로 운영되는 곳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당일 예약은 모두 다 찼다니... 좀 더 꼼꼼하게 찾아볼걸. 심지어 살짝 둘러본 내부 공간도 여정에 어울려 보여서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으나, 바깥 풍경이 바람으로 그 공백을 전부 메워줬다. 그리고 끝자락에 보이는 저 푸른 바다에서부터 세상은 내게 가까이 와, 월정리 일대에서 못다 한 한마디를 전해줬다.


"언제든 내게 너의 발이 닿는 곳에 머무를 자리를 마련해 줄 거야. 너에겐 영감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으니 말이야."


드넓은 존재가 지극히 작은 한 사람에게 이리 따스한 마음으로 함께해 준다니, 고마우면서도 나 또한 아늑한 공간의 의미를 찾았다. 세상은 나보다 긴 시간 동안 많은 것들을 보고 왔는데, 그중에 보기 힘든 슬픈 일들도 있지 않았는가. 언제든 쉬어갈 수 있는 자리가 내 공간이 된다면, 그게 곧 동행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조금이나마 무거운 짐을 덜어놓는 순간이 될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

< 유영하듯 보낸 사색의 자리들 >

풍경 속 알곡 있는 대화를 마친 후, 뭐든 먹으라고 애태우는 배를 붙들며 또 다른 장소를 몰색했다. 밥도 커피도 모두 해결하는 겸 자리도 한몫하는 자리면 좋을 것 같아 인근 브런치 카페를 찾게 됐다. 들어서자마자 포메라니안 강아지가 처음 본 내게 경계하듯 짖더니, 이내 곧 익숙해졌는지 옆에 와 몸을 비비고 유유히 제 자리로 돌아갔다. 개인적으로 강아지를 좋아하기에 가게 안 분위기가 정겨워 보일 따름이었다.


오는 길에 코난 해변에서 그랬듯 지금 당장 무엇이 당기는지 잠시 떠올렸고, 신선한 음식을 먹겠다는 의지로 리코타 치즈 샐러드와 핸드드립커피를 주문했다. 더부룩한 건 싫고, 그랬다고 빈 속에 커피는 결코 좋지 않으니, 이에 대한 대안이기도 했다. 주문한 후 옆을 보니 창가에 또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어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감귤 밭에서 그랬듯 메뉴가 나올 때까지 잠시 창밖으로 나가 싱그러운 햇볕을 받는 여유를 가졌다. 확실히 점점 사색에 익숙해지는 듯한 모습이 내게 담기는 걸 체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리에 돌아와서도 며칠간 찍은 사진들을 있는 내내 질리도록 보며 흐뭇해했다.


회고하기를 반복하고 틈틈이 사진을 수정하다 보니, 차량 반납까지 4시간 정도 남았다. 한두 곳정도 들리면 만족스러울 듯 해, 중간 경유지를 몰색하던 중 어느 우드 소품집을 발견했다. 그래서 뭘 살지는 정하지 않았더라도 가보게 됐는데, 그곳에서 이놈의 충동성은 좀처럼 주체를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우드 인테리어로 집을 꾸며왔으니 수제로 만든 목공품들에 눈돌아갈만 했다. 다행히 홀쭉해져 버린 내 지갑이 이 충동의 불길을 잡아 이성을 되찾았고, 내게 줄 현관문종 하나와 선물로 줄 것 하나로 나름 합리적인 구매로 마쳤다.

< 함덕 해수욕장 >

중간 경유지를 지나 이제 첫 여정의 마지막 장소인 함덕 해수욕장에 다다르게 됐다. 확실히 며칠 중 갔던 바다 중에 가장 넓었고, 그만큼 사람들도 많이 보이기도 했다. 신발을 벗고 바다와 모레 사이 경계로 걸아가는 모습들, 가만히 서서 흘러가는 바다를 감상하는 모습들, 나처럼 멀리 감치 위에서 구경하는 모습들까지 모두 사색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동시에 문득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생각나기도 했는데, 때마침 친누나로부터 영상통화가 왔다. 대개는 음성통화지만 영상통화인 건, 곧 옆에 아이도 있다는 걸 의미하기에 평소보다 높은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정말 아이는 날이 다르게 빨리 커가는 걸 느꼈고, 이제는 삼촌을 아주 살짝 알아보는 듯했다.


여담으로 나와 친누나는 서로 부지런히 연락하지는 않더라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이이다. 더불어 그리스도인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에 나눔의 깊이는 살면서 더욱 풍성해지고 있다. 그래서 한 번 통화하면 길게 통화하는 편인데, 이 날의 대화 속 누나에게 들은 한 마디가 첫 여정의 마지막 영감으로 남게 됐다.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여행다운 여행을 제대로 떠나본 적이 없거든. 그 대신 가정 안에서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 근데 너는 혼자만의 여행도 떠나보고 은혜롭다고 하니, 분명 너에 대해서는 확실히 다른 가봐."


나의 여정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는 말. 이는 곧 계속될 여정에 대한 응원의 메시지가 되기도 했다. 덕분에 극히 값진 진주를 향해 소유를 팔아 나아가려는 마음에 엄습해 온 부담감을 덜 수 있었다. 이는 반대로 지극히 값진 것으로 채우는 과정이었다. 그렇기에 영감은 이어지는 여정 속 발걸음에 힘을 실어줄 것이니, 계속해서 사색을 거듭하기로 했다. 그 이정표에 도달할 때까지. 제주도 속 첫 여정은 그렇게 영감 보따리를 챙긴 채 마무리되었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그가 값진 진주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 - 마태복음 13장 45~4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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