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No.14
그때처럼 세상은 내게 찬란한 영감들을 선사해 줄 거야.
5시간가량의 이동 시간 동안 나는 뜬눈으로 있었고, SW(친구)는 출퇴근에 수속절차까지 끝내고 피곤했는지 감은눈으로 내내 보냈다. 반대로 난 나름대로 각성된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더욱 멀리 내 몸뚱이를 비행기에 띄워 보낸다는 것에 신났고, 낯선 땅에 발자취를 이어간다는 게 색다른 의미로 다가오겠구나 싶었다. 그러는 중간에 미리 챙겨둔 책을 읽어가는 순간은 그 상태가 잠깐의 반짝임이 되지 않도록 붙들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잠시 처음으로 도착할 호찌민시는 어떨지 나만의 상상의 나래 속에 들어가 봤다. '이곳 분위기랑 정서는 과연 어떨까.', '덥고 습하다고 하는데 충분히 버틸 수 있겠지?', '도착해서 경유하는 동안 어디에 있으면 좋을까?' 등. 기대와 낯섦의 공존상태였다. 자고 있는 이놈도 꿈나라에서 나랑 비슷한 나래를 펼치고 있으려나. 물론 몰골을 보니 아직 피로에 절여져 있어, 꿈이고 나발이고 숙면이 전부인 듯했다. 중요한 건, 이 모든 순간에 단 1초도 도착시간을 향해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이었고, 우리가 목표했던 바를 이루도록 이끌어줬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여행의 첫 루트인 호찌민시에 도착하게 됐다.
일단, 비행기에 내리자마다 습한 공기들이 내 숨 속을 가득 메웠다. 새벽 시간임에도 이건 상상했던 바 그대로였다 할 수 있었고, 그저 입국절차 끝내는 대로 여름옷으로 갈아입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어서 사뭇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비슷하다고 느낀 건, 이곳도 한국처럼 밤늦게까지 불빛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랄까. 입국하는 다양한 손님들을 기다리는 택시 기사들, 이륙 때까지 자리에 머물러야 하는 대기자들을 위해 24시간 영업하는 카페들이 이를 대표하는 예시라 할 수 있었다. 반대로 다른 점은 주객전도된 언어들의 배치였다. 비록 베트남에 찾아오는 여행객 비율 중 한국인이 가장 많지만, 언어의 점유율은 내 시야 기준 '베트남어 -> 영어 -> 그 외'였다. 그러니 그건 곧 여행객으로서 잘 모르더라도 해당 국가에 맞는 문화와 정서에 맞춰가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그래도 베트남도 알게 모르게 비언어적인 요소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아 크게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5시간 남짓 남은 경유 시간 동안 넉넉히 기다릴 수 있는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놀랍게도 밤하늘에 떠있는 달은 아직도 한참을 중심자리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몇 시간 동안 습한 공기를 머금은 채 바깥에서 노숙할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다른 고민 없이 우리는 카페로 곧장 발걸음을 옮겼고, 커피 두 잔으로 이 과제를 해결할 수 있어 오직 감사할 따름이었다.
새벽 늦게 이곳에는 우리처럼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피로를 달래기 위해 잠깐의 쪽잠을 청하는 사람들, 노트북을 펼쳐 과업을 수행하는 사람들, 동행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까지. 나로서 그들의 세세한 면모들을 눈여겨보지는 않았지만, 긴 시간 동안 차분히 있어보니 소소한 사색 속 두 번째 여정의 첫 영감을 발견하게 됐다. 그건 곧 '유영하듯 이어가는 기다림'이었다.
같은 곳에서 각자의 상황과 상태에 따라 내리는 선택은 다양하지만, 출국을 위해 기다리는 마음은 모두가 동일하지 않은가. 더불어 출국의 목적에 따라 무게감은 다르겠지만, 이후에 그 목적을 달성했을 때 마음은 잔잔한 평안을 향해 나아가겠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일까 하니, 그게 바로 '기다림'이었다. 기다림이 있어야만 출국함으로 비로소 시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중 특히 '유영'하듯 이를 이어가는 경우에는 과연 어떨까 하니, 내 앞에 한 메시지가 들리게 됐다. "그때처럼 세상은 내게 찬란한 영감들을 선사해 줄 거야."라고. 분명 세상은 이곳에서도 내게 보여주고 싶은 것들과 그 안에 깃들인 영감들을 발견하도록 이끌어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가 날이 밝아올 때까지 말똥말똥한 눈으로 보내게 됐다.
꽤 긴 기다림 끝에 우리는 본격적으로 주 여행지인 "푸꾸옥"으로 떠날 수 있었다. 또 모르는 사연으로 출국 시간은 지연됐지만, 분노는 결코 마음속 틈을 찾지 못했고, 도리어 웃음으로 이를 승화해 냈다. 물론 난 그 시간 동안 피로가 싹 몰려와서 도착할 때까지 밝은 아침을 제대로 보지 못할 수준이었으니, 이 또한 그럴만했다. 결국, 이는 유영하듯 기다렸던 시간 속 마련해 놓은 잔잔한 평정심이 주는 힘이었다.
마침내 도달하고 나서 SW는 곯아떨어진 나를 깨워줬다. 기억 상 노란빛의 태양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었는데, 당장은 몽롱한 상태였기에 정신 차리는데 급급했었다. 그리고 착륙한 후에 공항 바깥으로 나섰는데, 푸꾸옥만의 광활한 풍경이 우리를 맞이해 줬다. '거봐, 세상은 멀리서 와 기다린 내게 보여주려는 게 많다니까.' 그렇기에 이 여정의 발자취는 더욱 소중히 와닿게 되었다.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며, 그 세계는 책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 볼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