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No.18
오늘도 여김 없이 나아가보자.
식당을 찾아 저녁을 해결하니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무시하고 돌아다니기에는 거셌기에 우리는 한참 동안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그칠 때까지 좀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백색소음같이 반복해서 들려오는 빗소리와 든든한 뱃속의 온기 덕분인가, 졸음도 함께 따라와 내 눈꺼풀은 매우 무거워졌다. 세상에나 처음 와본 나라에 숙소도 아닌 식당에서 첫날만에 무슨 가오로 그럴 수가 있는가. SW(친구)도 그런 나를 보며 '진짜 대단하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내가 이곳에 깃들인 영감들을 취해가며 평온히 보내고 있고, 곁에 있는 SW(친구)를 믿고 의지했다고 봐야 할 듯싶다. 그렇지만 좀처럼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끝내 택시를 호출해 숙소로 돌아오게 됐다.
그리고 문득 오늘 내내 마음껏 뛰고 유영했던 자리들이 떠올라 창 밖으로 한 번 나와봤다. 이전 제주도 월정리 바다(Chapter No.5)에서 시간에 따라 비친 분위기와 초점이 달랐듯, 이곳도 또한 그리 느껴졌다. 아마 그때처럼 같은 곳에 머물러 사색을 이어갔다면, 못지않은 깊은 감흥으로 젖어들었을 것이라. 하지만 여행 전부터 둘 다 기대하는 바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망고'였다. 과연 현지에서 먹는 그 맛은 얼마나 달달할까 하는 부푼 마음을 어떻게든 충족시켜야 했기에, 결국 그 근처까지만 둘러본 후 곧바로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kg에 80,000동이라면 한화로 4,000원이라니 대박이야." 대체적으로 한국에 비해 저렴한 가격대였지만, 이건 확연히 차이나는 금액이었다. 분명 관광객 대상으로 맞췄을 텐데 여기선 흔하디 흔한 과일인가 궁금증이 들면서도 꽤나 큰 한팩에 묵직이 담겨있는 걸 보니, 이내 돌아가 신물 날 정도로 먹을 상상으로 가득 채워졌다. 비단 누구든 나와 비슷한 상상을 하지 않았을까. 이것으로 이날의 여행 하루를 잘 마무리해 보겠다고 말이다. 중요한 건, 우리는 내일도 또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여유롭게 2kg 구매한 후 돌아가, 만족스러운 하루의 마침표를 찍었다.
푸꾸옥의 두 번째 하루는 눈 부시게 맑고 찬란한 아침과 함께 시작됐다. 물론 당장은 포근히 누워있는 자리에서 창 밖 너머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사실은 동전의 반대면에는 움직이기 귀찮아하는 나의 게으른 습성을 대변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어제 있었던 곳 반대편인 북쪽으로 가야 했기에, 곧이어 옆에서 메아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웅아 일어나, 이제 준비해야 돼." 그래, 그렇지. 기왕 멀리까지 왔는데 게을리 있어서는 안 되지.
그의 메아리 덕분이었나. 해가 중천에 도달하기 전 준비를 마쳐 해당 장소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의 중심 활동지는 마치 한국의 "에〇랜드"와 "캐〇〇〇베이"와 같은 곳이라 말할 수 있다. 도착한 위치에서 보인 입구는 마치 유럽에 있을법한 동네 분위기가 쭉 펼쳐져 있었다. 나로서는 다닥하게 붙어있는 건물들이 다채로운 색채를 띄고 있고,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로 가득 채워져 있어 인상 깊었다. 무엇보다 이 안의 곳곳을 누비며 다닐 것에, 마음속 기대감은 더욱 부풀어졌다.
그리고 이어서 입구 안을 들어서고 한 발치 앞에 걸어가는 SW(친구)와 그를 둘러싼 배경을 사진에 남기면서, 속으로는 그 기대감은 무엇인가 떠올려봤다. 그 결과, 첫 번째로는 놀랍게도 '모름'에서 비롯됐다. 뭐가 있는지 잘 모른 채 들어왔지만, 이게 도리어 색다른 묘미를 찾아낼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는 이전 '기억'이 찾아왔다. 제주도 행원리 일대(Chatper No.8)에서 마음이 이끄는 대로 거리를 거닐었을 때 사색의 터전을 찾았고, 영감 받았던 순간들이 여기서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그 꾸러미를 품은 채 오직 한 마디만 외치면 충분했다. "오늘도 여김 없이 나아가보자. 눈앞에 펼쳐질 이정표들을 따라."
그 한 마디가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해주었던 걸까. 뙤약볕으로 곳곳이 온통 달궈져 있지만 이보다 즐기는 것의 기쁨이 크게 차지했고, 보이는 것 하나하나마다 시도해보고 싶은 호기심이 더욱 발동했다. 그러면서 허울 없이 피어나는 순박한 미소도 또한 선명해지니, 오늘도 난 오롯이 풋풋한 마음가짐을 품게 되었다. 그래도 되는, 아니 그러는 게 더 자연스러운 자리에서 말이다. 한편으로, 진득하니 앉아 사색하는 것 외에 지금처럼 보내는 시간도 이 여정에 필요함을 느끼게 됐다. 영감을 찾아갈 수 있는 실재는 지극히 광활하기에, 새롭게 마주하고 쟁취할 사색의 터전을 보다 마련해 줄 거라는 믿음이 생겼던 것이다. 그러니 한창의 걸음 안의 발자취를 부지런히 이어가 보기로 했다. 이정표들을 잠잠히 따라가다 보면 이 땅이 내게 선사해 줄 푯대가 있을 거니까.
“우리가 진짜로 여행하는 이유는 풍경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기 위함이다." – Marcel Prou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