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20대 중반까지 우리 집 형편은 아주 나빴다. 이렇게 표현하고 싶지 않지만 가난했다.
아빠는 IMF 무렵 사업에 실패 후 20년 가까이 일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식당에서 일을 하며 번 200여만원의 월급으로 다섯 식구가 겨우 먹고살았다.
어느 정도로 가난했냐면, 엄마는 퇴근 후 나와 동생들을 데리고 종종 시장에 있는 횟집을 지나가곤 했다. 금전적, 시간적 여유가 없던 엄마에게 횟집 수족관은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아쿠아리움이었다.
밑창에 구멍이 난 운동화는 장판을 덧대 신기도 했고, 먹물 묻은 옷은 버리지 못하고 검은 얼룩이 옅어질 때까지 손빨래를 해 입었다.
10평도 되지 않는 보증금 2000만원 반지하 전세를 10년 넘게 살았다.
그런 와중에 엄마는 500만원에 가까웠던 내 대학 입학금과 등록금을 마련해 줬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엄마는 가장인 당신께서 아프면 남겨질 자식들이 걱정스러워 들어뒀던 보험을 해약했다.
그런 엄마에게 편입 지원까지 바라는 자식새끼가 될 순 없었다.
다행히 등록금에 보탤 요량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1년 동안 모았던 돈을 편입 학원비에 쓰기로 했다. 이 돈만으로는 6개월치 수강비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말 아르바이트도 계속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1년의 수험생활을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국 편입에는 실패했다. 스스로 수험생활을 평가한다면 '남들 노력하는 만큼은 했다'
지하철에서도, 지금은 사라진 노량진 육교를 걸을 때 스마트폰 대신 손바닥 만한 영단어장을 외웠다. 밥을 먹을 때도, 쉬는 시간에도 늘 책이랑 함께 했다. 집에 와서도 잠자기 전까진 늘 책상 앞에 있었다.
나만 그렇게 살진 않았을 거다.
남들 노력하는 만큼 하는 것만으로는 턱도 없었다. 나는 그랬으면 안 된다.
평일엔 동일한 조건이었겠지만 앞에서 말했듯 나는 학원비를 벌기 위해 주말 아르바이이트를 했다. 그 시간에 내 경쟁자들은 책상 앞에 앉아 영어 단어를 외우고 기출문제를 풀었을 것이다.
단순하게 계산해 보면 하루에 9시간, 한 달에 주말은 8일이니까 8x9 = 72시간, 1년이면 12x72 = 864시간. 남들보다 뒤처진 864시간을 채우려면 두 배, 세 배, 네 배 아니 잠자는 시간을 뺀 숨 쉬는 모든 시간에 공부를 했어야 했다.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으나 여하튼 난 그러지 않았다. 실패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이건 먼 훗날 얻은 깨달음이고, 모든 시험이 끝난 후엔 내 능력 안에선 모든 걸 쏟아 냈다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꿈을 좇는 건 뜬구름 잡는 일이라 판단했고, 결국 주어진 현실에 맞춰 살아가는 삶을 택하기로 했다.
그렇게 1년의 휴학을 마치고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오로지 글쓴이 기억에만 의존해 작성된 글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