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 여름
그럴 때가 있다. 처음 본 얼굴인데 기시감이 느껴지는... 살짝 소름이 돋기도 하지만 어떨 땐 본능적인 경계마저 풀어버리는 근거 없는 친근감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처음 본 사람을 오래 안 사람처럼 느낀다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바리케이드를 치우고 무방비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랬다. 기억을 더듬다 보면 언제가 만났던 순간을 분명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는 단지 그가 바라던 이상형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그로서는 열망과 절망이 묘하게 공존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녀의 긴 생머리는 야무지게 묶여 검은 말의 꼬리처럼 찰랑거렸고, 얼굴로 드러난 희고 투명한 피부는 스치는 바람에도 상처가 날 것처럼 여려 보였다. 그녀는 대기업을 상징하는 빨간색 앞치마와 빨간색 개리슨모자를 쓰고 시장의 한 복판에 서서 상품을 홍보하며 판매도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비슷한 또래의 여학생도 함께 있었다.
그에게 시장은 생계를 위해 갓 잡은 생선 내장의 비린내를 견디며 버티는 감옥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거의 매일, 쉬지 않고 이동하는 시장의 집기들과 좁은 통로를 오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잡스러운 소음들이 뒤섞여 밸브가 열린 하수로의 구정물처럼 시장 안을 돌고 돌았다. 그러면 소음의 박자를 변주하는 상인들이 여기저기서 싸구려 반주음악을 크게 틀거나 고통받는 돼지 소리를 내며 무심하게 지나가려던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내었다. 곧이어 그들의 소리를 뚫고 달려가는 오토바이들에선 매연과 진동이 협주를 하며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심기를 어지럽혔다. 시장의 곳곳에서는 푼돈을 위해 뜯긴 나물이나 부위별로 잘린 고기들이 심지어 말려지거나 삶아지거나 구워지기까지 하면서 팔려나갔다. 어쩔 수 없는 그런 것들을 누군가는 수십 년을 매일 보아도 여전히 정겹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시장에 들어선 날부터 벌써 진저리가 났었다. 그래서 더욱 그 지겨운 리듬을 깨고 산에서 불어온 바람처럼 풋내 나는 싱그러움을 끌고 들어온 그녀들에게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좌판행상은 버스정류장과 이어진 길고 좁은 시장 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만나는 일종의 허브 같은 곳 혹은 시장의 중심 혹은 시장의 심장 같은 곳에 있었다. 목도 좋고 제법 넓었지만 그의 생계는 골목이 끝나는 은행건물의 왼쪽 편 담벼락에 기생하듯 붙어서 언제 치워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불안하게 놓여 있었다. 베니어합판을 길게 덧대어 만들어진 작은 바퀴가 여섯 개나 달린 낮은 행상 리어카에는 오만가지 살림살이용 잡동사니들이 시장의 먼지를 뒤집어쓴 채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수세미, 행주, 파리채, 목욕수건, 플라스틱채반, 젓가락, 국자, 손톱깎이, 먼지떨이, 오래된 세탁비누와 발뒤꿈치 각질제거용 돌멩이 그외에도 별의별 물건들이 많았다. 리어카 구석구석에 만들어진 서랍에는 그가 다 기억할 수 없는 여성 전용 물건들이 들어있어서 행상을 시작한 지 두 해가 지났어도 한 번씩 서랍을 열면 그도 흠칫 놀라곤 했다.
그녀들이 은행건물과 붙어선 대형슈퍼마켓 앞에다 새빨간 앞치마와 개리슨모자를 쓰고 작고 귀여운 부스를 차려놓았을 때 시장 안의 사내란 사내들은 다 같이 부스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오토바이도 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도대체 저 귀여운 물건들은 어디서 왜 여기로 와야 했을까?'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들은 부스 안에 놓아둔 얼음을 가득 채운 커다란 아이스박스에서 자신들이 홍보해야 했던 회사의 커피음료를 꺼내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주었다. 짧고 좁은 현수막에는 무료시음회라고 쓰여있었지만 설명을 듣고 인스턴트 분말 커피를 구매하면 더 많은 무료 음료를 덤으로 얹어주고 있었다.
시장 안의 사내들 뿐 아니라 소문을 듣고 달려온 시장입구의 상인들까지 그녀들에게 다가와 시원한 커피음료를 염치없이 공짜로 빌어마셨다. 거절을 못하고 주섬주섬 나누어주다가 오후가 되자 행사 담당에게 들켜 결국 그녀만 호되게 혼이 났다. 다른 여학생은 운 좋게도 식사를 하러 간 듯 보였다.
그는 그녀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다른 상인들처럼 커피를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좀 부끄러웠다. 막냇동생 같은 소녀인데도 왠지 그는 그녀 앞으로 나가 뻔뻔하게 음료를 달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뻔뻔하기로 치자면야 그만한 사람도 없을 텐데 말이다. 주책없이 나아가고픈 달뜬 마음과 은근슬쩍 훔쳐보기만 해도 한없이 졸아드는 옹졸한 마음이 충돌하면서 그의 심장에서는 불규칙적인 스파크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수없이 말했다. '야, 고작 커피캔 하나야. 그거 하나 얻어먹는 게 뭐 그리 어려워? 그럼 커피를 사, 사 버리라고 이 모자란 놈아.'
그는 가슴을 향해 오징어 다리처럼 모여 오므라진 손가락과 비틀린 손목이 구부러져 굳어버린 오른팔 그리고 왼쪽발을 향해 오른쪽 발목이 45도 정도 비틀려 틀어진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신체의 다른 곳들은 멀쩡했고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그의 체격은 크고 단단했다. 절뚝이긴 해도 그의 보폭은 상당했으며, 왼쪽 손만으로도 행상 리어카의 무게를 충분히 들어 올리고도 남는 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장애가 있지만 양팔과 양다리의 두께와 길이도 비슷했다. 얼굴에 있는 크고 작은 날카로운 흉터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눈매가 꽤나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시장 안의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망나니'라고 수군거렸다. 동정을 유발할 수 있는 성치 않는 팔과 다리를 가졌음에도 시장 안의 사람들에게 항상 패악을 부리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출근 전인 자신의 행상 앞에 나물을 파는 할머니가 앉아 있으면 여지없이 바구니를 걷어찼고, 비좁은 통로에 놓여 통행을 방해하는 점포의 물건들은 주인이 보든 말든 굽은 팔을 휘두르며 미친놈처럼 치고 다녔다. 그는 기분에 따라 행상의 방향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바꾸곤 했는데 그럴 때면 행상에서 떨어지는 작은 물건들을 보며 시장 바닥이 얼어붙을법한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아무에게나 떨어진 물건을 제자리에 주워놓으라며 눈을 부릅뜨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가 눈을 치켜뜨면 웬일인지 사람들은 겁을 먹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은행 건물의 인색한 그늘아래 붙어선 땀투성이로 어정쩡하게 서 있었지만 그녀에게 커피를 구걸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오후가 지나며 한창의 더위가 진정이 되어갈 무렵이 되자 그녀가 차가운 캔커피를 들고 그에게 다가와 건넸다. 그때 가까이서 보는 그녀의 눈빛이 사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 없이 보고 있으면 그대로 빨려 들어가 그녀의 동공 안에 머물면서 그가 바라보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잠시 넋을 잃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문득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캔커피를 받아 들면서도 마치 당연한 자기 것을 돌려받은 것처럼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는 땡볕에 익은 얼굴이 더 뜨겁게 달궈지는 듯했지만 여름 햇살에 워낙 시달린 탓에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어리석지도 어리지도 않았다. 단지 꿈꾸던 예쁜 아가씨를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만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부질없는 동경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그녀는 며칠 주변의 공기만 환기시키고 신기루같이 떠날 버릴 사람이었다. 그녀의 첫인상이 어땠거나 그녀의 눈빛이 어땠거나 간에 그의 삶과는 하등의 관계가 이루질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친절할 필요도 없고 말을 섞을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고맙다는 말까지 하지 못한 것은 십 분에 한 번씩 후회가 되었다.
저녁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던 그는 오후 여섯 시가 되어 퇴근을 한 그녀의 부스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간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모든 생각은 그날 처음 본 그녀를 거치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로 집착적이었다. 발작하듯 일어나 앉은 그는 방구석에 십만 대군처럼 나열한 빈 소주병에 남은 소주가 없는지 한참을 뒤적거렸다. 한 방울 두 방울 운 좋게 한두 모금의 소주가 목구멍으로 들어가자 겨우 진정을 찾은 것 같았다. 그가 다시 드러눕자 천정에는 커피캔을 건네며 어색하게 미소 짓던 그녀의 얼굴이 그려졌다. 물론 그녀는 예뻤지만 그보다는 그녀가 누군가를 아주 많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마치 잘 아는 사람처럼 보였을 리가 없었다.
그의 삶에서 그녀처럼 고운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그가 겪은 여성이라야 업소종사자 몇 명에 불과했고, 어렸을 적 그를 돌봐준 고모는 떠올리기에도 고통스러울 만큼 고약한 성질머리와 그에 걸맞은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 다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닳고 낡은 지갑을 바지주머니에서 찾아 꺼냈다. 두 번이나 지갑을 떨어뜨리고 나서야 지갑의 카드포켓 깊이 박힌 작은 흑백 증명사진 하나를 꺼낼 수 있었다. 그가 그 사진을 꺼내어 본 것도 벌써 몇 년은 지난 것 같았다.
사진은 처음보다 바래어져 있었다. 그는 일어서서 형광등 가까이에 사진을 두고 더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사진 속의 사람과 그녀는 매우 닮아 보였다. 어머니는 고슬고슬한 파마머리였지만 앳된 얼굴이었다. 그녀의 긴 머리를 어머니에게 덮어씌우면 어머니도 그녀도 한 사람 같이 보일 것 같았다.
그는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라면 희미한 것조차 전혀 없었다. 사진도 할머니가 버린 쓰레기에서 그가 우연히 주운 것이었다. 고모의 말에 따르면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살림을 차린 부모님은 집도 절도 없으면서 애부터 낳았다고 했다. 붙어만 있어도 좋다더니 기어이 저승길도 함께 갔다며 고모는 틈만 나면 그들의 애통한 죽음을 웃으며 비꼬았다. 그의 부모가 택시 사고를 당한 건 그가 네 살 무렵의 일이었다. 그는 친할머니의 손을 거쳐 학교 갈 나이가 되자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가장 많았던 큰고모에게로 넘겨졌다.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사촌형들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중학교를 마칠 무렵 인내가 바닥에 닿았던 그는 다 큰 사촌형 둘을 죽도록 패고 돈을 훔쳐 부산으로 도망쳤다. 그렇게 싸움꾼이 되었다.
2년 전 어느 날 그는 피를 보는 싸움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보스를 찾았다. 그가 조직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보스는 그에게 솔직했다. 부하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를 온전히 놓아줄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떤 이유로도 그가 다른 조직으로 가거나 다른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의 조직과 맞서게 되길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순순히 보스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팔과 다리를 내어놓지 않는다면 그를 두려워하는 보스는 다른 조직원을 시켜 그를 더 비참하게 제거하려 할 것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그는 누군가의 피냄새를 다시 맡아야 할 것 같았다.
잔인했지만 보스는 그에게 폭력적인 방법을 쓰진 않았다. 아는 의사를 불러 수술을 받는 것처럼 마취를 하고 거세하는 짐승처럼 복구되지 않을 만큼 확실하게 힘줄을 끊어놓았다. 그리고 지금의 방까지 얻어주며 시장에서 밥이라도 벌어먹으라며 부하들을 시켜 행상을 잡아 주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교활한 보스는 조직을 이탈한 자가 어떤 나락으로 떨어지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본보기로 모두가 볼 수 있는 시장에다 그를 메어 놓은 것이었다. 맹목적인 충성으로 누군가의 턱을 부수고 팔을 부러뜨리고 배에 구멍을 내거나 다리를 못쓰게 만들던 트라우마에서 멀어지는 대신 보스가 던져주는 부스러기나 받아먹는 뚱뚱한 쥐가 된 기분이었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어도 보스는 아직 그를 놓아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시장을 돌며 수금하는 보스의 그림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을 마주하는 날이면 그는 유난히 행상 리어카를 이리저리 돌려세우며 신경질을 부리곤 했다.
그가 다음날 출근을 했을 때는 오전 시간이 다 갔을 만큼 늦은 시간이었다. 그의 리어카 앞에 나물을 늘어놓았던 할머니는 골목길을 나온 그를 보자마자 부랴부랴 바구니를 겹쳐치우며 도망하듯 자리를 비웠다. 그는 천천히 리어카에 씐 포대기를 걷으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부스를 살폈다.
부스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검은 봉지에 커피통 한 두 개씩 들고 나서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하긴 그런 이벤트 행사는 본 적도 없는 처음 있는 일이라 인근에 벌써 소문이 났던 모양이었다. 전날 동네 양아치나 다름없는 것들이 능글거리며 공짜 커피나 빌어먹던 것과는 다르게 아주머니 손님들이 꽤 많았다. 썰물처럼 한 떼의 손님들이 지나가자 그녀는 그제야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를 손수건으로 눌러 닦으며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뒤에 쌓인 시음용 캔커피의 박스를 열었다.
그때 흰색티셔츠와 물 빠진 청바지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잘생긴 남학생이 찾아와 그녀의 뒤에서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커피를 꺼내다 말고 돌아선 그녀는 좀 전보다 더 크고 하얗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허세를 부리는 것인지 남학생은 집으로 가져간다면서 동결건조공법을 자랑하는 인스턴트커피를 다섯 통이나 샀다. 그녀는 두 통만 사라며 말렸지만 이미 말을 뱉은 녀석은 끝까지 다섯 통을 달라고 고집을 부렸다. 녀석은 양손에 검정 봉지를 두 개나 들고 그녀와 함께 부스를 나섰다. 그녀의 손에는 시음용 캔커피가 한가득 들어있었는데 녀석이 한사코 자기가 다 들고 갈 수 있다는데도 굳이 정류장까지 들어다 준다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알콩달콩 실랑이하는 모습까지도 어찌나 귀여운지 같잖은 질투심에 속이 상한 그도 피식 웃음이 났다.
그리고 비슷한 남학생 네댓 명이 더 부스를 다녀갔다. 모두가 다 그녀의 친구들은 아니었지만 그들 중 한 녀석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녀와 식사도 같이 가는 듯했다. 그는 신경이 곤두설대로 곤두서서는 일부러 찾아와 물건을 찾는 손님들마저 파리채를 들고 쫓아버리고 있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은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껄끄러웠고 무더위에 녹아 늘어나기라도 했는지 더럽게 가질 않았다. 그런데도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그녀가 눈길도 주지 않고 그의 매대를 휭하니 지나쳐가는 것을 보자 그는 느닷없이 돋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부스에 닿기도 전에 그는 절뚝이는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뒤에 섰다. 그녀의 파트너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녀에게 뒤를 돌아보라는 듯 턱으로 신호를 보내자 그녀가 뒤를 돌아 그를 올려 보았다.
"거 더워 죽겠는데 시원한 커피나 하나 줘봐라."
다짜고짜 그가 던진 말은 거칠고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이거 아무나 주는 거 아니에요. 아저씨, 커피 사실 거예요?"
그녀의 파트너가 눈꼬리를 말아 올리며 제법 앙칼진 음성으로 그에게 맞섰다.
"아이씨, 뭐라고? 쪼그만 게, 너 뭐라고 했냐 지금?"
그는 눈을 부릅뜨며 금방이라도 부스를 내려 칠 것처럼 왼 팔을 들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 바람에 장애가 있는 그의 오른손이 그녀의 콧등에 닿았고 깜짝 놀란 그녀의 몸이 젖혀지며 부스에 놓인 허술한 탁자를 밀어 비딱하게 넘어뜨리고 있었다. 그는 들었던 왼 팔을 잽싸게 내리며 그녀가 탁자와 함께 넘어지지 않도록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엄마야! "
외마디 소리와 함께 미간을 찡그린 그녀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무엇을 의도했건 간에 그가 의도한 상황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지만 그를 올려보는 떨리는 눈빛만으로도 그는 이미 부정적인 사람으로 각인이 된 것 같았다. 그녀의 불안한 눈빛이 상처받은 심장 한가운데를 깊숙하게 찌르고 있었다.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움켜잡았던 손을 풀며 맘이 상한 그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에라잇 퉤! 안 먹어! 안 먹는다 내가! 시장사람마다 다 나눠주면서 인심쓰더만 나한테만 안 준다고? 왜? 내가 병신이라서? 더럽냐! 나도 더럽다. 에라이 퉤!"
늘 그렇듯이 그는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뱉으며 자신의 행상 리어카로 돌아갔다. 떨어지든 말든 리어카 귀퉁이에 올려진 몇 가지 물건들을 냅다 휘적이더니 조그만 틈을 만들어 걸터앉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팔아, 팔아, 다 팔아 아주 싸게 팔아 다 판다고 에,에,에 싸게 팔아요 싸게! 어서 와서 가져가쇼! 다 가져가라고!"
무식하게 떠드는 그와는 다르게 그녀는 강단 있는 파트너를 도와 무너진 부스를 차분하게 정리했다. 다시 한 떼의 무리가 와서 그녀의 부스를 쓸어갔고 판매할 물건이 모자랐던지 그들은 대형슈퍼마켓 안으로 들어가 무거운 커피박스를 하나씩 들어다 날랐다. 한 개의 물건도 팔지 못하고 소리만 시끄럽게 떠벌거리던 그는 고개를 꺾어 숙인 채 그대로 리어카 귀퉁이에서 졸고 있었다.
그가 벌게진 눈을 다시 떴을 때, 언제 다녀갔는지도 모르게 그의 리어카에는 결로로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캔커피 두 개가 올려져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두 개의 캔커피를 한 손에 쥐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파트너는 보이지 않았다.
"안 먹어!"
낮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를 향해 캔커피를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는 아이스박스를 열어 시원한 캔커피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이거로 바꿔 드세요. 이게 시원해요."
그는 가지고 온 커피를 놓고 그녀가 건네는 시원한 캔커피를 받아 챙겼다. 그리고 받아 든 사탕하나에 화가 풀린 아이처럼 자기도 모르게 벙글거렸다.
퇴근하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그녀가 준 커피 하나가 그의 바지주머니에서 늘어져 덜렁거렸다. 그는 한 번씩 주머니의 커피를 움켜쥐었다. 그리곤 간지럼을 타는 아이처럼 몸을 비틀며 좋아했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그렇게 즐거웠던 일은 거의 처음이지 않을까 싶었다.
다음 날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것저것 신경을 쓴 데다 더위까지 먹어 단단히 탈이 난 것 같았다. 병원은커녕 싱크대의 수돗물조차 받아 마시기가 어려웠다. 몸은 땀으로 범벅이었고, 이불에는 소변까지 지리고 말았다. 그의 손이 닿는 곳에는 그녀가 준 캔커피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큼은 손대고 싶지 않았다. 참고 참다가 그는 결국 캔커피를 땄다. 구정물 같은 미지근하고 달달한 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흐르며 지친 그의 몸에 최소한의 에너지를 채워주었다.
겨우 몸을 일으킨 그는 입은 옷을 다 벗어버렸다. 벌거숭이인 채 물을 한 사발쯤 들이켜고 매운 라면을 끓였다. 라면을 다 먹은 그는 찬물로 샤워를 하고 냄새나는 옷가지와 이불을 세탁기에 밀어 넣었다. 그제야 다시 살 것 같았지만 비어버린 캔커피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뭔가 모를 서운함이 차올랐다. 고이는 물이 차오르면 제방을 넘어서는 것처럼 서운함이 차서 설움이 되더니 설움이 차고 넘쳐서 끝내 기울어진 몸 밖으로 밀려 나왔다. 그는 또 아픈 주사를 맞은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벌거벗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