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생긴 일
나는 잘 아프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실은 그저 병원에 가기 싫어하는 게으른 환자였을 뿐인데 말이다. 이따금 찾아오던 복통이 어느 날 밤 식은땀이 온몸을 적실만큼 커졌어도 난 그저 조금만 참으면 지나갈 줄 알았다. 내 생각대로 두어 시간쯤 뱃속을 후벼 파던 그 잔인한 고통이 지나자 다음 날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한 달 뒤 먼저보다 더 지독한 복통이 일요일 밤 12시에 시작되었다.
다음 날 출근을 해야 할 남편의 눈치를 보다 정말 죽을 것만 같아서 남편을 깨워 응급실엘 가자고 말했다.
입원을 하고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별의별 검사를 다했다. 몇 시간마다 하는 채혈, 하루에도 서너 번씩 찍어대는 CT촬영에 복부에 가득한 가스를 빼기 위해 콧줄까지 걸었다. 결과는 대장암이었다.
거대종양이 대장을 막아 거의 복막 안으로 터져나가기 일보직전이더라고 했다. 병원 응급실에 들어서고 수술을 결정하고 다시 음식물을 먹기까지 꼬박 열 하루를 금식했다. 링거 덕에 허기는 느끼지 못했다. 원래 식탐이 없는 편이라 식사시간마다 병실 안으로 밀려드는 음식 냄새도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과 어쩌면 죽음과 직결한 시간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수술 후 전이 없는 2기 대장암이라는 판정이 나올 때까지 전례 없던 스트레스였다.
전이가 없더라도 종양이 장 벽을 거의 뚫을 것처럼 붉어져 있었으니 2기임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항암을 권유했다. 천만다행 혹은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나는 운이 좋았다. 그래도 의사의 권고를 따르는 편이 나을 것 같아 항암을 받기로 했다.
병원은 밤낮없이 시끄러웠다. 거기다 쉬지 않고 혈관을 타고 도는 독한 항암제와 수시로 찾아와 주사와 혈압을 체크하는 간호사들 때문에 항암을 하는 3박 4일은 거의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암병동의 늦은 밤엔 누군가의 들릴 듯 말 듯 훌쩍거리는 소리도 흔한 일이다. 그런 소리가 들리면 듣는 내내 가슴이 미어졌다. 둘러친 커튼을 젖히고 소리의 주인을 찾아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저 숨죽이고 자는 척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의였다.
입원실엔 갖가지 다른 질환을 동반하는 노인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고혈압, 당뇨, 고지혈, 위장장애, 관절염 등등. 그리고 세상 모든 이치를 알고 받아줄 것 같은 비슷한 나이의 그들 사이에 반드시 있었다. 병동의 온갖 크고 작은 소란을 일으키는 주범들, 나는 그들을 빌런이라 불렀다.
두 번째 항암을 하기 위해 412호실에 입원했을 때였다. 항암제를 투여하기 시작하고 얼마 후 맞은편 비어있던 침상으로 일흔은 넘긴듯한 아주머니가 왔다. 염색한 검은 머리에 작은 얼굴, 작은 키, 표정 없이 굳은 얼굴에 말이 없었다. 원래 보호자의 출입이 금지되는 간호통합병동이었지만 그녀는 특별한 사정이 있었는지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병실로 들어섰다. 간호사에게 연거푸 허리를 구부리는 남편과 달리 그녀의 시선은 줄곧 아래를 향해있다가 환복과 함께 곧장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저녁에 다시 오겠다는 남편의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고 감은 눈도 뜨지 않더니 병실 밖으로 남편이 나가려 하자 벌떡 일어나서는 칭얼대는 아이처럼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나열하며 소리를 크게 냈다. 깜짝 놀란 남편이 주변으로 미안하다는 듯 머리를 조아리며 침대로 다가와 필요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확인하려 속닥거리는데도 그녀는 귀가 먹은 사람처럼 냅다 큰소리를 내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남편은 당황하며 일단 알았다고 양손을 들어 아래로 내리누르는 시늉을 해 보였지만 그녀는 소리를 줄일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렇게 이상한 실랑이를 하다 남편이 병실을 나가자 실이 풀린 꼭두각시처럼 힘없이 털썩 침대머리로 자빠졌다.
간호사가 와서 먹는 약이 있는지를 물어도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을 묻고 흔들어 깨워도 그녀는 죽은 듯이 누워있어서 간호사는 할 수 없이 보호자에게 연락해야 했다. 저녁에 남편이 다시 병실에 들어서자 그녀는 일어나 앉아 남편과 말을 섞었는데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남편이 챙겨 온 물건들이 못마땅하다며 계속 타박을 했다. 남편은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하려 애썼지만 그녀는 남편이 하는 말에 관심이 없었고 왜 먹던 약을 가져오지 않은 거냐며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남편이 이전에 먹던 약을 병원에 제출하면 그와 효과는 같지만 이상 성분은 없는 약으로 대체해 준다고 해서 간호사실에 반납했다고 하는데도 계속해서 약을 가지고 오라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남편은 거의 울먹이며 그녀에게 사정을 하듯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남편을 향해 은근슬쩍 등신, 머저리라는 욕설까지 섞어가며 먹던 약을 찾아오라고 억지를 부렸다. 간호사와 당직 의사까지 나서서 설명했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심지어 말투는 흔들림 없이 차분하기까지 했다. 저녁 식사도 거부하고 일어나 앉아 몇 분에 한 번씩 혹은 당직 간호사나 조무사가 들어올 때마다 무슨 인형에서 나오는 기계적인 어투로 약을 달라고 했다.
저 아주머니는... 너무 아파서 미친 건가? 나는 그녀의 섬뜩한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자정을 넘어도 그녀는 앉은 그대로 계속 그 짓을 하고 있었다. 당직자들도 포기한 듯 외면하자 결국 병실 안의 사람들만 고통스러운 상황이 되었기에 여기저기서 제발 좀 그만하라는 신음 같은 원성들이 터져 나왔다. 정말 소름 끼쳤던 것은 벌어진 병실커튼 사이로 언뜻 비친 그녀의 작은 얼굴에서 여린 미소를 본 것 같아서였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잠이 들어 있었다. 사실 그녀는 시끄럽다고 할 순 없었다. 약 줘요, 약 안 줘요? 약 언제 줘요? 하는 말을 차분하고 조용하게 시간당 열댓 번씩 주절거렸을 뿐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낮은 데시벨의 음성이 얼마나 뾰족하게 환자들의 신경을 긁었는지는 하루 만에 병실 안의 사람들의 얼굴에 내려앉은 다크서클로도 알 수 있었다.
혈압을 재기 위해 간호사가 그녀의 팔을 당겼을 때 그녀는 감았던 눈을 뜨면서 다시 무심하게 "약 언제 줘요?"라고 말했다. 출입구와 가장 가까운 병상에서 거칠게 커튼이 잡아당겨지며 한 아주머니가 노이로제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그만하라고 이 미친 여편네야!" 그리고 오후가 되기 전에 출입구의 침상이 비워졌다.
내 침대는 창가에 있었다. 도심의 병원이라 전망이랄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하늘이 보이다 보니 답답함이 좀 덜했다. 출입구의 침상이 비워지자 그녀는 자신의 침대에서 내려와 내 침대의 창가로 왔다. 그러더니 돌연 창턱에 턱을 괴고 얼굴을 들어 5월의 햇살을 쬐었다. 한참 동안이나. 내 침상 가운데쯤에서 나의 프라이버시는 그녀의 돌발행동으로 뭉개지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햇살을 받고 있는 그녀의 표정이 평화로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같은 환자 입장에서 그런 표정을 짓는 사람을 나의 전유물도 아닌 창가에서 내칠 수는 없었다. 하긴 검사실로 내려가 비어있는 옆침대의 창가도 있었고 침대와 침대 사이의 공간에도 창가가 있는데 굳이 그곳으로 온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는데 간호사가 들어와서 그녀를 말렸다. 누군가 간호실에 가서 내 사정을 대신 이야기 했던 모양이었다. 어깨를 감싸며 "이러시면 안 돼요, 이 환자분도 안정이 필요해요."라고 말하는 간호사에게 소극적으로 저항하며 엉덩이를 뒤로 빼던 그녀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이는 있지만 한때는 아름다웠을 고운 눈매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매우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부담스러워요?"
그 시간 이후로 그녀는 틈만 나면 그 자리로 와서 턱을 괴고 햇살을 받아 마셨다. 내가 검사를 받거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병원의 여기저기를 다니다 병실로 돌아가면 어김없이 그녀는 내 침대의 중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몇 번을 그랬지만 그녀는 사과 한마디가 없었다. 나는 그녀와 말을 섞는 것이 더 불편할 것 같아 아무 말도 않고 그녀가 하는 대로 그냥 두었다. 오히려 그게 편했다. 내가 돌아가면 그녀는 곧장 침대에서 내려와 선채로 창가에 붙었고, 내가 없더라도 침대에 눕거나 물건에 손을 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서로 불평하지 않았다. 물론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날도 저물어 저녁이 다 되었을 때 그녀의 남편이 왔다. 그녀는 항암을 하지 않는데도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남편은 이것저것 가지고 온 것들을 펼치며 그녀를 먹이려고 했지만 그녀는 멀뚱히 남편을 바라보거나 절레절레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녀의 남편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그러다 문득 다시 약타령을 하더니 먼저 먹던 약을 다시 처방받아오라고 억지를 쓰기 시작했다. 기가 질린 남편이 주섬주섬 가지고 왔던 것들을 챙겼다.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나가는 남편의 등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그녀가 소리쳤다. "약도 못 갖다 주는 등신 같은 놈아,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알아?"라고.
다음 날 오전 주치의 회진 중에 그녀의 병명을 알게 되었다. 검사결과를 듣기 위해 그녀의 남편도 일찍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급성 위염으로 시작된 병이 소화불량과 구토 어지럼증을 동반하더니 삼일 전 갑자기 발생한 고열로 응급실을 찾았던 거였다. 신우염 의심소견으로 찍은 CT에서 작은 종양이 발견되었고 조직 검사결과 신장암이었다. 의사는 보호자를 향해 당장 수술이 필요하고 일정이 잡히는 대로 급하게 MRI를 찍어야 한다고도 했다. 조목조목 설명하는 의사와 당황한 남편의 얼굴 사이에 떠 있던 그녀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의사도 남편도 레지던트와 인턴 그리고 간호사들까지 아주 잠깐 시간이 멈춘 것처럼 얼어붙었다. 자신의 운명을 가를 병명이 나왔는데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나도 어이가 없었다.
얼굴에 웃음기를 담은 채 의사를 노려보던 그녀는 그대로 침대로 자빠졌다. 그리고 눈을 감아버렸다.
있으나마 나한 금식이라는 붉은 글씨의 푯말이 그녀의 침대 발치에 붙었다. 오후 식사시간이 되기 전에 그녀는 급하게 잡힌 MRI촬영을 가야 했다. 그리고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났다.
멀쩡해 보이는 그녀가 걸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간호사는 휠체어를 밀어줄 도우미를 불러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휠체어를 밀며 들어온 도우미에게 의사냐고 묻더니, 그가 의사가 아니라고 말하자 그럼 의사를 불러오라고 했다. 당황한 간호사는 의사가 촬영실로 대동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지만 그녀는 일단 의사가 와서 자기를 봐야 한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기어이 병실은 너도나도 그녀를 설득시키려는 사람들로 시끄러워졌다.
병실의 사람들도 거듭거듭 나서며 설명했지만 그녀는 의사를 기다리겠다는 말만 할 뿐 휠체어를 타지 않았다. 30분이 지나자 한 인턴이 달려왔다. 그는 자신과 얘기하자며 휠체어에 오르라고 설득했지만, 그녀는 그를 비웃으며 "너는 아직 의사가 아니잖아. 진짜 의사, 오늘 아침에 나보고 암이라고 말한 그 의사를 불러오란 말이야. 내 말은."이라고 말했다. 그녀를 둘러싼 모두의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 변하고 있었다.
"지금 가야 해요. 지금도 늦었다고요. MRI촬영실에서 20분 이상 기다리는 일은 없어요. 거기가 얼마나 바쁜데 이러세요. 오늘 검사 안 하면 언제 잡힐지도 몰라요. 왜 이러세요 진짜..."
담당 간호사의 얼굴이 흑빛이 되었을 때쯤 그녀의 남편이 들어왔다. 화가 나고 애가 타는 남편은 울먹이면서 화를 내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남편을 간호사를 자신에게 집중한 사람들을 둘러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의사가 와야 내려가서 검사를 받을 거야. 그 의사가 오기 전엔 절대 아무 데도 안가."
한 시간 반.
한 시간 반이 지나 처음 보는 젊은 남자 의사가 왔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오늘 괜찮으세요? 여기 불편한 게 뭐가 있었을까요?"
의사를 올려다본 그녀가 실소를 터뜨리며 깔깔 웃었다.
"정신과 의사구만."
초장에 전의를 잃은 의사는 다소 김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예, 저는 정신과 전문의예요. 많이 힘들어하신다고 들어서 왔어요. 혹시 털어놓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실까 해서요."
"아니요."
그리고 그녀가 입을 닫았다. 의사는 이렇게 저렇게 몇 가지를 물어보다 금세 포기했다.
"그래도 혹시 제게 뭔가 말하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간호사실에 말씀하세요. 그럼 제가 바로 올게요. 아셨죠?"
그녀는 다정한 의사의 말에도 고개만 까딱거릴 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두 시간이 지나 지친 간호사가 와서 말했다.
"지금이라도 오시래요. 안 그럼 내일 자정이나 촬영이 될 거래요. 어머니, 이러시면 병원에 있는 시간만 더 길어져요. 저희도 힘들고요."
그제야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모두가 보란 듯이 걸었다. '내가 이쯤에서 져주니까 고맙지?' 하는 표정이었다.
항암을 하는 동안 나는 거의 밥을 먹지 못했다. 병원의 음식 냄새가 역겹기도 했고, 음식물의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식사시간이 되면 주로 1층의 로비로 나가 있었다. 1층은 북적거리긴 해도 사람들의 출입이 많아 음식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녁 식사시간이 지나 내가 병실로 돌아갔을 때 그녀는 내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어둠에 거의 잠식당한 옅은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침대 위로 올랐다. 그녀는 침대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은 채 얼굴만 돌려 나를 보았다. 그리고 전혀 어색하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노을이 참 예쁘지 않아?"
일말의 노을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까지 그녀는 내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다음날은 내가 퇴원을 하는 날이었다. 오전 중에 마지막 항암제가 다 투여되면 오후에는 퇴원 수속을 할 수 있었다. 아침 식사시간이 지나고 병실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다시 내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오전의 햇살은 아직 내 침대에 미치지 못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몸을 살짝 비틀어 창 밖이 아닌 나를 보고 있었다. 지난 며칠 미운 정이 들었는지 나도 그녀가 싫지만은 않았다.
"저 오늘 퇴원해요. 그럼 여기 침상 쓰시면 될 거예요."
"저 빗 자기 거야?"
그녀는 개인 캐비닛 위에 올려진 머리빗을 가리켰다.
"네. 제 거예요.."
"좀 빌려줄래? 내가 머리를 감고 싶어서 그래."
"그럼요, 쓰세요."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으며 빗을 쓰고 난 그녀는 나에게 그 머리빗을 자기에게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빗이 너무 좋다고 했다. 나는 그냥 가지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옆 침상을 쓰던 언니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니 별 걸 다, 남이 쓰던 빗을 왜 달라 그래요. 그러지 마요. 이 사람이 그동안 말없이 다 받아준 고마움도 모르고 도대체가 양심이 없어."
그녀는 조금 미안한 듯 웃으면서도 내 눈치를 보며 빗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러자 입을 앙다문 옆의 언니가 잽싸게 달려들어 휙하니 빗을 뺏어다 내 손에 쥐어주었다. 싸움이라도 날까 싶어 놀란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그냥 아쉬운 듯 여린 미소만 지었다.
주사제투여가 끝나면 의사가 와서 오른쪽 윗가슴에 시술로 부착된 정맥 주사 포트에서 주삿바늘을 제거한다. 퇴원 수속은 벌써 끝내었지만 그날따라 모든 의사가 바쁜지 바늘을 제거해 줄 의사가 오지 않고 있었다. 따듯한 오후의 햇살이 창을 통해 날아들고 있었다. 식사시간의 역겨운 음식냄새도 참으며 의사를 기다렸지만 곧 온다는 간호사의 말뿐 의사는 오지 않고 있었다. 기다리는 의사는 오지 않고 대신 그녀가 왔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햇살이 참 좋아. 저기서 보는 것보다 경치도 여기가 더 좋고. 노을도 예쁘더라."
"그래요? 저도 답답하지 않아서 좋더라고요."
"자기는 어디가 아파?"
"저 대장암 2기예요."
"그렇구나, 그럼 여기 다 암환자야 ?"
"아마도 그럴 거예요. 가끔 외과 수술 환자도 있긴 해요."
"나도 암 이래."
"그러게요. 어제 그러시던데."
"난 암에 걸릴만했어. 힘들었거든."
"다들 그렇죠. 사람들이 다 힘든 시기를 지나면 조금씩 아프더라고요."
"아니, 그런 거 말고. 난 진짜 아플만했어. 난 말이야..."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며 독백을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그 말을 듣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급성 위염이 생긴 것은 약 8개월 전쯤 한 통의 전화에서 시작했다. 보이스피싱. 사는 동안 한시도 쉬어본 적 없이 열심히 살았던 그녀였다. 건물 청소, 학교 청소, 가사 도우미 주로 그런 일들을 하며 살았지만 성실한 부부는 그렇게 아이들을 키웠고 자기 집을 장만했고 한 푼 두 푼 저축을 하며 살았다. 결혼을 하고 독립을 한 자녀들을 두었지만 그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겠다고 다짐한 부부는 1억에 가까운 저축성 예금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노후를 풍요롭게 채워줄 소중한 목돈이었다.
은행에서 일시금으로 찾은 돈을 생판 낯선 사람이 와서 가져가는데도 그것이 사기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평생 또순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어리석을 수가 있었는지 스스로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처음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부모가 돌아갔을 때도 그렇게 막막하지 않았노라며 치를 떨었다. 다들 괜찮다며 위로했지만 그녀는 전혀 괜찮아지지 않았다. 그러다 몇 달 전엔 자살까지 시도했다. 하지만 눈치 빠른 남편이 곧바로 수습을 하는 바람에 죽지도 못했다며 남편을 원망했다. 그러나 결국 잠도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시간들이 쌓이자 병이 생겼다. 죽을병이 말이다. 그녀는 막상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세상의 별의별 것들이 다 좋아 보인다고 말했다. 사람만 빼고 다 좋아 보인다고.
사람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말하던 중에 창틀에 놓아둔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는 휴대폰을 귀에 대며 자기 침대로 돌아갔다.
"네, 맞아요. 아니 그러니까 몇 번씩이나 내가 설명을 들었지만 난 아직도 모르겠다니까? 고객인 내가 이해가 안 간다는데 그러면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뭐라도 더 해줘야지, 안 그래요?"
추측건대 그녀는 보험사 직원과 도통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같았다. 순간 나는 계획된 범죄로 조각조각 부서진 그녀보다 미미해도 끈질기게 휘둘러질 그녀의 보복적 심술을 감당해야 할 보험사 직원이 더 안쓰러웠다. 어쨌든 그녀는 412호실의 빌런이었으니까.